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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Social

새벽이 오리라 _ 체념 증후군의 기록, 존 햅터스 감독

그냥_ 2020. 3.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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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배경지식이 전무한 제게 이 다큐는 근래 가장 충격적인 영화로 기억될 듯합니다.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무슨 이딴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사자들의 고통을 폄하하거나 희화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증세와 경과가 너무도 상식을 벗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존 햅터스', '크리스틴 사무엘슨' 감독,

『체념 증후군의 기록 :: Life Overtakes Me』입니다.

 

 

 

 

 

# 1.

 

언젠가부터 나쁜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작품을 보기도 전부터 자꾸만 앞질러 추측하게 된다는 것이죠. 『주홍색 연구』에서 달리는 마차 안의 '홈즈'는 근거도 없이 앞질러 선입견을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했는데요. 제가 딱 그 멍청이가 된 꼴이군요. 무슨 체념에 증후군까지 붙이냐는 무신경한 생각과 함께 대충 현대인의 우울증이나 사회적 불안, 무기력증을 다루려나 싶었습니다. 당사자들을 위하는 척 하다가 마지막 사회 구성원 일반을 질타하는 식으로 마무리되리라는 나태한 추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맙니다.

 

'체념 증후군'이란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스웨덴과 호주 등지에서 발견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었던 난민 가정의 아동들이 점차 식음을 끊다가 어떠한 자극에도 깨지 않는 수면상태에 빠지는 병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만화 설정이라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발상이라 할법한 일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눈앞에서 다큐멘터리로 펼쳐지는 동안의 충격이 어마어마합니다. 처음 증세가 발견되던 시기의, '아이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등의 폭압적인 가짜 뉴스들에 직접 보지 못하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 심정적 동화가 일어날 만큼 충격적입니다.

 

 

 

 

 

 

# 2.

 

'증후군'이라 하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정신병'의 정의부터가 정신 기능의 이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잦은 지장을 초래하는 병적 상태를 의미하고, 일상생활에서의 잦은 지장은 보통 불편함과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체념 증후군은 이 일반의 상식과 궤를 달리합니다. 고통스러운 모습은커녕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천사처럼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죠.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 대신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정신건강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경제적인' 가사상태에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날이 추워지면 곤충들이 가사상태에 들어가듯. 곰과 개구리가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 듯. 사회적으로 너무 '차가운 곳'에 내몰리게 된다는 충격이 아이들을 가사상태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만 같은 인상입니다. 배경이 되는 스웨덴의 만개한 얼음꽃은 총탄으로 빗발치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런 물리적 차가움보다 더욱 차갑다는 걸 이중적으로 은유합니다.

 

여타 질병들이 부조리한 사회가 낳은 부작용처럼 여겨진다면, '체념 증후군'은 효율적 선택의 끝이 죽음과 다르지 않은 가사상태로 귀결된다는 측면에서 훨씬 엄중하게 느껴집니다. 부모들의 처참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절절한 묘사와 천사의 얼굴로 곱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이 주는 대조가 무겁습니다. 뜨지 못하는 눈과, 움직이지 못하는 관절과, 말하지 않는 입과, 깨어나지 않는 꿈과, 뛰놀지 못하는 아이와, 이 모든 것들의 역설이 난민을 양산케 하는 전쟁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강박적 배타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인가를 구체화 해 물리적으로 묘사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폐하고 잠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증명하는 듯한 모습에서, 삶의 터전의 파괴가 초래하는 수많은 비극적 결말 가운데서도 가장 단호한 '선고'와 같은 느낌도 드는군요.

 

숨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잠에 드는 것이라는 것과 잠이 든 아이들이 부모의 정성으로 하나 둘 깨어나고 있다는 것이 주는 울림은 있습니다. 절망적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라는 느낌이랄까요. 그나마 난민에 개방적인 스웨덴에서야 비로소 '정착'했기에 편히 잠에 들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다만, 『캔디드 샷』의 리뷰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이런 식의 가상의 작품들을 평할 때와 같은 문학적이고 관념적인 해석이 구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례함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모로 어렵고 또 조심스럽군요.

 

 

 

 

 

 

# 3.

 

저는 떼 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것으로 모든 문제를 퉁치고 뭉개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죠. 빈곤한 경제력과 연약한 발언력에 반비례 해 그들의 고통을 불필요하게 고평가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경제력에 기반한 사회적 발언력의 빈부 격차가 벌어지는 것에 언제나 경계하고 보완해야 하지만, 동시에 언더 도그마 역시 견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난민 문제에 있어 무조건적인 낙관론이나 무분별한 시혜적 관용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피해자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피해자를 '교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선 안된다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잘난 어른들의 사정이나 고매한 정치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은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언제고 치열하고 진지하게 우리 시대의 올바름을 찾는 여정을 자유롭게 나설 권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이 존재함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든지 간에, 7살 배기가 학교에서 총탄이 떨어지는 지옥으로 돌아갈 거라 절규하고 오열하게 해선 안 됩니다. 고매한 정치철학이라는 것이 얼마 대단하든지 간에, 아이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삶을 유보하는 선택을 하게끔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이래선 안된다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아이들과 이런 가정이 더 나와선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문제의식만은 분명히 하게 됩니다. 무슨 사정이 있건 간에 최소한의 선은 지켜져야 합니다.

 

아닌 건, 아닌 거죠.

 

 

 

 

 

 

# 4.

 

앤딩 크래딧을 보며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에 충전되는 감각을 느끼게 됩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이런 아이들이 있으니 무조건 모든 나라가 난민을 무한정 수용해야 한다라는 식이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것대로 일방적으로 비용이 전가된 사람들에게 폭력이죠. 다만, 그 대안이라는 것에 세계인으로서의 현대인의 도덕 기준에 부합하는 최소한의 선에 대한 합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각 사회의 권한을 가진 누군가들은 자신의 책임에 부합하는 대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지구 반대편의 남의 일이라고 등한시하는 건 곤란합니다. 지금은 스웨덴이고 지금은 난민 문제이지만, 언제 어떤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주변의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체념 증후군'에 빠져들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존 햅터스', '크리스틴 사무엘슨' 감독, 『체념 증후군의 기록』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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