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Documentary/Ecology & Exploratory

켠김에 끝까지 _ 지구의 밤, 알렉스 민턴 감독

그냥_ 2020. 3. 2. 06:30
728x90

 

 

# 0.

 

영화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더 피곤한 일입니다. 특히나 저같이 미취학 아동과의 팔씨름도 장담할 수 없는 극심한 운동 부족이자 미운 7살 부럽지 않은 중증 ADHD 환자에게는 더더욱 말이죠. 아무리 하루가 멀다 하고 볼만큼 영화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가끔 쉬어가는 느낌으로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보는 시리즈물이 하나씩 있으면 썩 유용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용도로 작품을 고를 때는 평소 영화를 볼 때와는 조금은 다른 기준이 필요하죠.

 

 

 

 

 

 

 

 

'알렉스 민턴' 감독,

『지구의 밤 :: Night On Earth』 입니다.

 

 

 

 

 

# 1.

 

너무 길면 곤란합니다. 옴니버스 식으로 각 에피소드들이 따로 놀아주면 더욱 좋죠. 감독이 누구인지보단 돈 많은 제작사 이름값이 더 신뢰할만하구요. 깊은 이야기나 주제의식 같은 건 없으면 없을수록 좋습니다. 자연 속 동물들이 본능과 섭리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주는 고요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정도면 아주 훌륭하죠.

 

지금 이 글을 쓰기 전, '사프디 형제'의 『언컷 젬스』를 보고 왔습니다.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를 하자면 미친 듯이 지치고 불안하고 피곤한 영화네요.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황해』, 『곡성』 같은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딱 그런 류의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나 잠깐이라도 정신적 휴식을 가질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이유로 고른 게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 『지구의 밤』 이였죠.

 

저 역시 이 작품을 고르셨을 대부분의 분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눈뽕을 곁들인 ASMR 정도를 기대하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목부터 『지구의 밤』. 뭔가 자연자연하고 동물동물 하잖아요? 막 하늘하늘에 별별 나오고 초원초원 하고 동물동물한 애들이 낭창낭창하게 뛰어다니고 얕게얕게 깔리는 벌레벌레 소리소리가 나오는 그런 힐링힐링 다큐다큐. 크~!

 

하지만 제 예상은 형광색 전갈을 한방컷 낸 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는 설치류 한마디와 함께 박살이 나고 말았답니다. 짜잔.

 

 

 

 

 

 

# 2.

 

생각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기대보다 더 흥미진진합니다. 예상보다 더 황홀합니다.

 

어릴 적 엄마가 사준 공룡 백과사전을 처음 펼쳐 보았을 때처럼,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간신히 외우던 꼬마가 행성과 별이 나오는 잡지를 처음 볼 때처럼.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던 어린 동심의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오랜만에 깨어나는 그런 맛이 있습니다.

 

다 덮어놓고 그림 하나하나 모두 굉장히 신기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낮은 조도의 환경에서 특수 목적 카메라로 저렇게나 고화질의 화면을 저렇게나 생동감 있는 다채로운 화각으로 영상에 담아낼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반짝이는 전갈과 부드럽게 춤추는 박쥐의 날갯짓과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을 박차고 달리는 암사자와 그런 사자 나부랭이를 개무시하고 내달리는 하마느님과 생과 사가 교차하는 치열한 물웅덩이에 비친 어린 코뿔소. 미감이 발현한 영상이 아니라 호기심이 재단한 영상들. '폴 토마스 앤더슨'이고 '웨스 앤더슨'이고 '장 피에르 주네'고 나발이고 간에, 단언컨대 이런 건 제 아무리 그림 잘 뽑는 영화감독이라 해도 못 만들 거란 확신이 듭니다. 이런 류의 화면은 정확히 이런 다큐멘터리물을 찍는 데 인생을 갈아 넣은 극한의 공돌이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죠.

 

 

 

 

 

 

# 3.

 

창작되지 않은 본질적인 강렬함, 화면을 꿰뚫고 뛰쳐나오는 생명력의 힘이 대단합니다. 열을 베이스로 하는 열화상 카메라 특성상 무생물들이 일반의 가시광선을 활용한 영상에 비해 거의 잡히지 않는 데다, 야생 동물들이 어지간하면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보호색 역시 벗겨져 있기에 훨씬 역동적인 그림이 완성됩니다. 야간 촬영으로 인해 '선'과 '운동'이 더더욱 강조된 화면이 주는 생동감이 굉장합니다.

 

주행성인 인간의 생활패턴과 주간엔 사기적인 가시거리와 원근감과 시야각을 발휘하지만 야간만 되면 고자가 되는 우리 인간의 눈깔 덕에 '밤'의 야생은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늘상 소외되곤 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더더욱 그 희소가치가 크다 할 수 있겠네요. 뭐랄까요. 상상력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던 공포와 환상의 요람에 덮인 담요를 슬쩍 들어다 엿보는 느낌이랄까요.

 

 

 

 

 

 

# 4.

 

문학적인 작품에서라면 굳이 불필요한 고어한 표현을 피하기 위해 폭력적인 장면들은 은유로 대체되지만, 우리 공돌이 과학자 이과생 형님 누나들에겐 얄짤없습니다. '이거시 냉엄한 자연의 섭리다! 문과들아!' 라는 선언과 함께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보여주시죠. 때문에 이런 류의 자연 다큐멘터리 작품들이 생각보다 은근히 취향을 탑니다만 다행히도 열화상 카메라 덕에 선혈이 낭자하는 그림은 없습니다. 자체 모자이크랄까요. 만약 폭력성에 대한 낮은 내성으로 인해 생태 다큐멘터리를 주저하시는 분이라 하더라도 이 작품은 한 번쯤 도전해 보실만 할겁니다.

 

덤으로 동물 찍다 심심하다 싶으면 배고프단 손주의 투덜거림을 들은 시골 할머니마냥 어지러울 정도로 눈뽕 영상을 때려 부어 주십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황홀하게 돌아가는 은하수의 바다와, 한꺼번에 일제히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의 장관과,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서서히 물들어가는 서정적인 달과, 말로 설명하기 버거운 미친 그러데이션의 노을과 석양이 끊임없이 쏟아집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아! 짝짓기 해보려고 기웃거리는 도마뱀과 토실토실한 두더지 엉덩이 개 귀엽습니다! 진짜루요!

 

 

 

 

 

 

# 5.

 

언제나의 과학 다큐멘터리들처럼 누군지 모를 내레이터가 조곤조곤 설명을 곁들입니다.

 

만, 언제나처럼 그런 걸 새로 배우기엔 너무 늦은 아저씨 아줌마들의 귀에는 딱히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냥 그림의 때깔을 즐기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누가 누군지 정도 알려주는데 의의를 가지시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봤다 싶어서 찾아봤더니 '사미라 윌리' 였네요. '사미라 윌리' 아시죠? 다들 냉장고에 먹다 남은 트러플 쯤은 굴러다니듯 '사미라 윌리'라고 하면 다들 아시잖아요?

 

농담이구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짧은 머리의 흑인 레즈비언 '푸세 워싱턴'이라고 말씀드리면 아~ 하시는 그 배우가 '사미라 윌리'입니다. 그녀가 내레이션을 했군요.

 

 

 

 

 

 

# 6.

 

여기까지가 딱 첫 번째 에피소드 '달빛이 내리는 평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런 에피소드가 무려 5개나 더 있죠.

 

굳이 첫 번째 에피소드와 관련된 이야기만으로 리뷰를 쓴 건, 혹여나 이 글을 보시고 시리즈를 찾아보실 분들이 그 뒤의 에피소드들을 감상하는 동안 방해받지 않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영화보다 지치면 잘게 잘게 잘라가며 쉬어가려던 시리즈를 한큐에 정주행 해 버리고 말았군요. 쉬려고 본 시리즈를 정주행 해 버린 바람에 또다시 쉴만한 시리즈를 찾아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모처럼 만에 『Netflix』가 돈값한다 느끼게 한 역대급 눈뽕 다큐멘터리 시리즈. 『지구의 밤』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