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Romance

올해의 단편 _ 맛있는 엔딩, 정소영 감독

그냥_ 2021. 11. 8. 06:30
728x90

 

 

# 0.

 

이번 옴니버스 너무 좋은데요?

단편 옴니버스 <맛있는 영화> 두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정소영' 감독,

『맛있는 엔딩 :: Tasty Ending』입니다.

 

 

 

 

 

# 1.

 

무수히 많은 신발과 오브젝트는 누적된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특유의 물 빠진 색감과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깊은 한숨이 인물과 공간의 수분을 제거합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대사는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물건을 챙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손길에 과격하면서도 처연한 정서가 엿보입니다.

 

서랍장에서 상자를 꺼냅니다. 상자 속에서 다이어리를 꺼냅니다. 1000일. 3년 여가 넘는 긴 시간을 만났다는 것보다, 1000일 이후론 세지도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시콜콜한 잘잘못에 대한 작품이 아닙니다. 여자의 이별은 어떤 사연 어떤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결국은 시간에 의해 증발되고 마모되어버린 사랑. 권태죠.

 

여자 '예니'는 다이어리를 첫 장으로 넘깁니다. 1일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을 되짚는 이야기군요.

 

# 2.

 

수년 전의 여자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앉은 모습 정면의 얼굴로 등장하는 여자와, 서서 옆모습으로 등장하는 남자가 대조됩니다. 남자는 우측 상단에서 화면 안으로 파고들며 등장합니다. "진짜 잘 그린다." 남자 '상혁'의 말에 예니는 화들짝 놀랍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짜 놓은 노란 물감에 파란 물감이 번집니다. 서서히 스며들어 뒤엉킵니다. 여자는 노란색 옷, 남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D-23. D-15. 입시 시험일자를 뜻하는 디데이지만, 1000일과 1일 따위의 영화 시작부터 짚은 날짜와 연결되어 두 사람의 정서가 발전되어가는 과정을 중의적으로 표현합니다.

 

예니와 상혁은 친구였던 듯합니다. 여자는 입시를 위해 스스로 이전의 시간과 단절한 인물입니다. 원래 쓰던 사투리를 금세 고친 건 그녀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은유합니다. 아직까지 진한 사투리를 쓰는 상혁은 나도 안 볼 거냐 묻습니다.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답이 없습니다.

 

 

 

 

 

 

# 3.

 

시험날입니다. 거친 숨소리와 타이트한 클로즈업이 예니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정석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순간 시야에 상혁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니-샷 Knee-Shot으로 발견됩니다. 동시에 숨소리가 멈춥니다. 감독은 예니가 상혁의 존재로부터 위로를 얻고 있다는 정보뿐 아니라, 그 위로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까지 함께 전달합니다.

 

불안한 눈동자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를 걸어 시험 결과를 확인합니다. 피아노 선율 위로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옵니다. 배우의 울먹이는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빛을 떨어트려 그 순간 인물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정석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묘사합니다. 기쁨에 차 계단을 오릅니다. 하지만...

 

# 4.

 

학원의 사람들은 실망하거나 울먹이고 있습니다. 모두가 떨어지고 예니만이 합격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입시는 경쟁이 아닌 전쟁이죠.

 

듣는 사람은 들리지 않았으면 말하는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들어줬으면 싶은 그 미묘한 크기의 목소리. "지독하다.". 수근 거리는 말 하나하나가 날 선 비수가 됩니다. 옆으로 비켜서 돌아보는 시선 하나하나가 차갑게 얼어붙습니다. 이를 한숨에 담아내는 제법 긴 테이크가 주인공의 고립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좋은 연출입니다.

 

거리에 홀로 선 예니는 얼이 빠진 표정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상혁이 화면을 넘어 등장합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면 내 영역을 웃는 얼굴로 주저 없이 침범하는 사람. 여자에게 남자는 그런 이미지입니다.

 

 

 

 

 

 

# 5.

 

트럭 포장마차의 새빨간 떡볶이입니다. 냉소적인 돌아선 뒷모습은 무릎 꿇고 새하얀 신발을 닦는 모습과 대조됩니다. 표독스러운 상처의 말들은 "개안타."라는 따듯한 말과 대조됩니다. 그 온기. 떡볶이 입니다.

 

입시에 떨어진 남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나도 안 볼 거냐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여자는 이제 언제 볼 수 있느냐 먼저 묻습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가는 상혁. 돌아서던 예니는 용기 내어 상혁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침범하던 남자는 처음으로 여자의 부름에 나타납니다. 화면의 상단에서 파고들던 남자는 처음으로 계단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나타납니다. 시험에 붙어 계단을 오르던 여자의 정서와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정서가 연결됩니다. 설레고 행복합니다.

 

# 6.

 

다시 지금입니다. 물건을 챙기던 예나는 떡볶이를 만듭니다. 정갈한 레시피 사이사이로 두 사람의 좋았던 추억과 그렇지 못했던 추억이 빠짐없이 파고듭니다. 떡과 어묵과 파와 고추장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 1초, 1초가 모두 재료입니다. 음식이 익어가는 동안 무엇으로 싸웠는지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끝내 영화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그뿐입니다.

 

기억 속 여자가 떠나간 빈 집에 혼자된 남자 상혁이 들어옵니다. 어지럽혀진 집보다 곱게 정리된 집은 정말 끝인 것만 같죠. 남자는 아직 따뜻한 떡볶이를 먹습니다. 떡볶이를 먹는 동안 남자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집니다. 표정의 여운은 들썩이는 어깨의 뒷모습에 남습니다. 뒷모습의 여운은 울먹이는 목소리에 남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는 다시 피아노 선율에 남습니다. 음악에서의 페이드 아웃처럼 감독은 관객을 최대한 배려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영화를 서서히 페이드 아웃시킵니다.

 

 

 

 

 

 

# 7.

 

소재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만 같은 작품입니다. 예니가 느낀 상혁과, 상혁과의 사랑이라는 피사체를 놓고 스크린 위에 밑선을 그리고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그리고 채색을 하는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표현과 감정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복잡 미묘한 감정선은 선명하면서도 풍성해져 갑니다. 깊이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은 잘 다듬어진 감수성입니다. 런타임이 아쉬울 만큼 안정적인 멜로드라마군요.

 

균형이 상당히 좋습니다. 특별히 모난 곳이 없습니다. 모든 장면에서 소리가 좋고 모든 장면에서 색이 좋습니다. 구도도, 연출도, 편집도, 호흡도, 배역도, 캐스팅도, 연기도 모두 안정적입니다. 그럼에도 표현이 더 중요한 것의 자리를 빼앗지 않습니다. 표현은 오롯이 감정에 복무합니다. 누적된 감수성을 평범한 음식 한 그릇에 연결합니다. 음식 영화 특유의, 음식을 위해 영화를 만든 것만 같은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충분히 근사한 음식 영화입니다만, 그 이전에 충분히 근사한 영화군요. '정소영' 감독, <맛있는 엔딩>이었습니다.

 

 

숙주와 라임. 고수는 빼고 _ 나이트 크루징, 김정인 감독

# 0. 단편 옴니버스 <맛있는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김정인' 감독, 『나이트 크루징 :: Night Cruising』입니다. # 1. 오르막길의 뒷모습. 누군가를 부축하는. 지나는 차량에 가려진. 물리적

morgosound.tistory.com

 

소녀는 엄마는 친구 _ 좋은날, 황슬기 감독

# 0. 단편 옴니버스 <맛있는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황슬기' 감독, 『좋은날 :: A Good Day』입니다. # 1. 진수성찬입니다. 이전 두 편의 음식과는 결이 많이 다르군요. 장소도 휴양지에 있을

morgosound.tistory.com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