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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omance

장미빛 절망 _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디 앨런 감독

그냥_ 2020. 8. 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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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을 슬쩍 보여준 후 영원히 다시 맛볼 수 없다는 걸 증명합니다. 사탕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1920년의 파리가 낭만적이면 낭만적일수록, 스크린을 탈출한 모험가와의 데이트가 황홀하면 황홀할수록 절망감은 비례해 커져갑니다.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소년과 소녀들에게 우디 앨런의 붉은 장미는 제이슨의 마체테만큼이나 가혹합니다.

 

 

 

 

 

 

 

 

우디 앨런 감독,

『카이로의 붉은 장미 :: The Purple Rose Of Cairo』입니다.

 

 

 

 

 

# 1. 

 

2012년작 『미드나잇 인 파리』의 기시감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영화입니다. 이를테면 『미드나잇 인 카이로』랄까요. 물론 연대를 생각하면 이 작품이 원조, 『미드나잇 인 파리』가 계승작이라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습니다만 지금의 관객에겐 최근에 개봉한 영화가 35년 전 영화보단 훨씬 익숙할 테니 편의적으로 『미드나잇 인 파리』를 기준으로 삼아 접근하는 게 쉬울 겁니다. 개인적으론 작가주의적 시각에서 감독의 철학적 발전을 논하는 사유 방식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감독은 1985년의 영화와 2012년의 영화를 들어 같은 서사에 대한 다른 결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죠.

 

주인공 세실리아는 노름과 폭력을 일삼는 쓰레기 남편 몽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대공황으로 돈 벌 구멍은 좁아만가고 간신히 구한 일터에서는 실수투성이입니다. 몇 번의 실수 결국 일자리를 잃게 된 세실리아. 지긋지긋한 현실에 집을 뛰쳐나온 그녀는 때마침 개봉한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관람합니다. 현실을 잊으려 수차례 영화를 보고 또 보던 어느 날 흑백영화 속 모험가 톰 벡스터는 스크린을 뛰쳐나와 세실리아의 완벽하고 이상적인 연인이 됩니다.

 

톰은 꿈에 그리던 완벽한 연인이지만 본질적으로 가상의 인물입니다. 그는 열쇠 없인 차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연극용 가짜 돈으론 음식값을 치를 수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놀이동산에서의 달콤한 키스에 맞춰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도, 무턱대고 카이로로 떠나기엔 현실의 무게란 녹록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간절히 꿈꾸던 이상을 영화처럼 손에 쥐었지만, 이상은 손에 쥐어진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톰은 세실리아에게 분명 이상적인 연인이지만 이상적인 연인과 함께하는 현실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 2.

 

반면 자신의 분신이 스크린을 탈출해 돌아다닌다는 걸 알게 된 배우 길 쉐퍼드는 톰이 자신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전에 영화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톰을 쫓던 그는 뉴저지에서 세실리아를 만나게 되고 배우로서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완벽하지만 허구적인 톰에 대한 갈증의 대용품으로서 현실의 길 아니, 허먼 바데비디안은 상대적으로 완벽해 보입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길 역시 뉴저지에 살고 있는 세실리아의 현실은 아닙니다. 배우 길 쉐퍼드는 우디 앨런의 영화 속 또 다른 톰 벡스터에 불과하죠. 세실리아가 아무리 몸을 던져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톰 벡스터와 이루어질 수 없듯, 우디 앨런의 로맨스 속 주인공 길 쉐퍼드와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실리아는 톰을 영화로 돌려보내고 길을 선택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도피해 나온 뉴저지의 거리에 만나기로 약속한 사랑은 없습니다. 짐가방을 울러 매고 쓸쓸하게 영화관으로 돌아오는 그녀. 톰과 길과의 사랑이 마치 한여름밤의 꿈이었던 듯 처음 영화를 보던 순간과 같은 모습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길과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세실리아 모두 현실의 도피로서 이상향에 막연한 동경을 내면화한 인물입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녜스, 아드리아나, 가브리엘 / 몽크, 톰 벡스터, 길 쉐퍼드)은 각자에 대응하는 관념들을 짊어지고 있고, 길과 세실리아가 주변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동안의 불만과 행복과 사랑과 절망 속에 주제의식을 녹여냅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눈부시게 황홀한 이상향을 즐기지만 결말에서 실망감을 가득 품은 채 원래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주인공의 정서적 변화와 관객의 동화를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각각 1920년대 파리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로 벌고 있죠. 소재만 변주되었을 뿐 사실상 동일한 두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예술의 천국으로 인도할 완벽한 파리가 존재하지 않듯 세실리아를 이상적인 사랑으로 인도할 완벽한 연인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드리아나와 톰 벡스터에 투영된 결핍된 완벽함이라는 허구적 동경을 감독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최대한 우호적으로 긍정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모순을 증명함으로써 절망의 한가운데로 관객을 인도하는 영화라 할 수 있죠.

 

 

 

 

 

 

# 3.

 

결말을 이야기하기 앞서 표현을 살짝 살펴볼까요. 영화의 제목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입니다만 (물론 원제는 우아하면서 절망적인 결말에 대한 암시로서의 Purple Rose이긴 합니다.) 영화의 색감은 미묘하게 바래 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마치 시든 장미처럼 말이죠. 그토록 쥐고 싶었던 붉은 장미는 손에 들어오자마자 시들어버리지만 그럼에도 그 시든 장미로서의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 또한 썩 아름다운 장미입니다. 당신의 현실은 언제나 영화보다 조금은 더 시들어 있겠지만, 당신의 현실은 결코 영화처럼 붉고 싱싱한 장미가 되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시들어 있는 당신의 현실 역시 썩 아름답듯 말이죠.

 

영화의 마지막 집을 나온 세실리아를 버려두고 길이 할리우드로 돌아가는 장면. 혹시 비행기 안에서 생각에 잠긴 길을 보며 그가 사실은 세실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비행기를 내려 한달음에 그녀에게 돌아가 주었으면 생각지는 않으셨나요. 만약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그 장면이야말로 주인공과 관객이 정서적으로 온전히 합치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로 본다면 오프닝 3분 20초에 대응된다 할 수 있겠죠.

 

진행에서 살짝 비켜난 인물들이 의뭉스럽게 묵직한 대사를 흘린다는 점 역시 재미있습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 싶어요. 다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현실에선 허구의 삶을 원하고 허구의 인물은 현실을 원하다니..." 등의 대사는 작품의 비관주의 철학을 관통하는 대사들이라 할 수 있죠. 톰을 영화 안으로 데려온 후 필름을 태워버려야 한다 말하는 대사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요, 스크린을 벗어나 현실에 떨어진 로맨스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법이죠.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의 예술가들의 역할은 로맨틱 코미디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톰의 오그라들지만 싫지 않은 간지러운 대사들과 대전 액션 게임을 연상케 하는 몽크와의 결투 장면. 신과 작가에 대한 은유와 그를 이어받아 "멍청한 작가들의 놀음에 부자들만 배를 불린다"는 대사가 주는 알싸함. 창부의 손에 이끌려 사창가로 흘러들어 간 '톰'의 천진난만한 동문서답은 모두 편안하고 유쾌합니다. 로맨스라는 장르 영화를 사랑하는 감수성 충만한 관객들의 야들야들한 멘탈리티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감독의 탁월한 감각이 수십 년 전부터 반짝이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표현과 상상력에 담긴 과감함과 감수성은 혀를 내두르게 하죠.

 

 

 

 

 

 

# 4.

 

다만 결말에서 덩그러니 홀로 남은 '세실리아'를 보고 나면

그래서 이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같은 로맨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로맨스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이미 합의한 사항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 명제를 합의한 상태에서 이상적 사랑에 대한 갈증을 대리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로맨스 영화의 정의이자 의의라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로맨스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로맨스 영화인 셈입니다. 손에 쥘 수 없는 그림의 떡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 스스로가 관객으로 하여금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게 하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말죠. 세상에나. 환상을 판매하지 못하는 로맨스라니요. 끔찍하죠.

 

하지만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결말이 참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절망적인 영화관에 세실리아를 홀로 내버려 뒀던 감독은 35년의 시간이 지난 후 길의 곁에 그의 슬픔을 함께 공유할 레코드 가게 아가씨 가브리엘을 데려다 놓습니다.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과 낭만 따위의 갈증을 단숨에 채워줄 치트키 같은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절망감을 공유하고 위로할 현실의 로맨스는 존재할 수 있다는 불완전한 희망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개인적으로 완성도와 별개로 이 작품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시니컬한, 어떤 면에선 무례하기까지 한 결말이 영 거슬리거든요. 하지만 『미드나잇 인 파리』를 패키지로 묶어 30여 년의 세월을 넘어선 연작이라 생각한다면 충분히 다시 보고 싶은 매력적인 영화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역시 희망은 버리더라도 힘은 내야 합니다. 우디 앨런 감독, 『카이로의 붉은 장미』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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