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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omance

그녀의 고백 _ 흐르는 대로,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

그냥_ 2023. 9.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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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숨겨뒀던 책갈피를 꺼내다.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

『흐르는 대로 :: の方へ、流れる입니다.

 

 

 

 

 

# 1.

 

오프닝입니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간신히 매달린 손은 연약함과 위태로움 따위를 은유합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은 거대한 흐름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지나간 건지 모를 정도의 빠른 속도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수동성이죠. 이내 여자의 뒷모습이 카메라에 길게 담깁니다. 뒷모습은 숨겨뒀던 솔직한 마음일 수도 혹은 뒤돌아 서있게 만드는 부끄러운 치부일 수도 있을 겁니다. 여자 옆에 한 남자가 섭니다. 여자는 어깨너머로 책을 훔쳐봅니다. 두터운 책의 두께는 사연의 깊이, 몰래 훔쳐보는 것에서는 느슨한 호기심이 발견됩니다.

 

책갈피입니다. 흘러가던 흐름을 잘라 멈춰 세우는 도구. 삶의 특정한 단면을 박제시키는 물건인 것이죠. 책의 같은 곳을 나란히 보는 장면은 같은 곳을 보게 될 두 사람의 관계를 느슨하게 암시합니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는 책갈피를 떨어트리고 풍경에 섞여 흘러가 버립니다. 여자는 닫힌 버스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고, 그녀의 손엔 책갈피가 들려있습니다. 남자는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여자의 흐름을 멈춰 세우는 책갈피입니다.

 

 

 

 

 

 

# 2.

 

언니의 잡화점입니다. 자신의 잡화점이 아니라는 것은 대신한 자리 혹은 불편한 자리임을 의미합니다. 버스와 달리 여자가 정지해 있는 만큼 창밖의 세상도 천천히 흘러가는 데요. 줄어든 속도는 곧 단위 시간당 흐름의 밀도는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여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창밖 놀이터에 나타난 남자입니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담배를 태우던 여자는 Closed라는 팻말을 뒤집습니다. 흥미 없던 언니의 잡화점이 남자의 등장과 함께 열렸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이 동했음을 은은하게 은유합니다.

 

여자는 창밖 풍경을 흘려보내는 사람, 남자는 창밖 풍경을 붙잡으려는 사람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알지만 남자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책갈피를 잃었음을 알지만 남자는 알지 못합니다. 남자는 책갈피의 가격을 물어보지만 책갈피에는 가격이 없습니다. 남자는 화장실을 묻고 여자는 짓궂게 농담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라인을 보내라 말하자 남자는 피처폰을 쓴다며 거짓말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인식의 차이는 반복적으로 전시됩니다. 인식의 차이는 다른 공간, 다른 높이, 다른 프레임의 영역으로 시각화됩니다. 그 사이 가로지르는 두꺼운 나무는 넘어서기 힘든 분절을 강하게 은유합니다.

 

하지만 인식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식의 차이에 숨겨진 인간적 호기심입니다. 대화는 농담과 장난으로 가득하지만 호기심만큼은 농담이 아닙니다. 이내 두 사람은 남자의 소개로 같이 '좋은 곳'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 3.

 

버스는 흐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공간, 잡화점은 흐름이 느리게 지나가는 공간이라 한다면, 걷는다는 것은 흐름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자연스레 흐름의 밀도는 실시간이 되고 관객과의 정서적 밀착은 최댓값이 되죠. 두 인물이 흐름으로서의 풍경 안으로 들어감은 인물 뒤를 받치는 잔잔히 흐르는 강의 물결로 증명됩니다. 여기까지는 관계를 소개하는 일종의 '세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대화가 영화를 견인하고 있죠.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습니다. 말이 말의 뒤를 잡고 그저 흘러가는 동안 대부분은 힐난과 조롱으로 점철되고 있죠. 중요운 것은 대화의 구성이 상당히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조롱과 힐난을 일삼는 동안 남자는 전적으로 받아낼 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환경 내지 사건에 불과합니다. 대화로 인해 투영되는 것은 무표정한 척하는 그 순간 여자의 마음인 것이죠.

 

모호한 두 사람의 대화는 빈 손으로 보이지 않는 테니스 공을 주고받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테니스 공은 실체가 없습니다. 남자는 처음엔 여자의 움직임을 이해 못 해 공을 받지 못하지만 이내 보이지 않는 공을 받게 됩니다. 테니스공을 증명하는 것은 마치 공을 들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움직임뿐입니다. 대화가 아니라 움직임, 동선과 위치에 담긴 정서가 훨씬 중요합니다. 앞서 걷기도 하고 뒤따라 걷기도 하고 발맞춰 걷기도 하고 다른 높이에 있기도 하듯 말이죠. 일례로 여자는 남자들은 성욕만을 탐한다 힐난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과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호응했다는 것이죠.

 

 

 

 

 

 

# 4.

 

늦은 밤은 더 깊고 솔직한 내면을 의미하기도 하고, 치부로서의 어둠에 다가감을 의미하기도 할 겁니다. 나이보다 더 어른스러운 여자와 나이보다 더 아이 같던 남자의 동행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아이 같은 여자의 투정을 어른스러운 남자가 받아주는 관계였을 뿐입니다. 남자의 키스를 거절한 여자는 이내 자신이 먼저 키스합니다. 이 관계는 엄연히 여자가 선택한 관계라는 것이죠.

 

다시 처음의 잡화점입니다. 이전 여자의 흔적인 책갈피를 버리고 새로운 자신의 책갈피를 선물하려 했지만 남자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가게에 있는 동안 기다리는 여자가 돌아왔고 그녀에게 가버린 배신인 것이죠. 그는 미련이 남은 듯 비굴하게 연락처를 달라하지만 여자는 거절하고 돌아갑니다. 홀로 걸어간 곳엔 거짓말이라던 뮤지션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라인, 불륜, 배우를 해볼까 하는 백수 따위의 코드는 주연 배우 카라타 에리카의 개인사를 재구성한 작품임을 노골적으로 암시합니다. 배우에게 이 작품은 처절한 자기 고백이자, 숨길 길 없는 원망이고, 그보다 더 깊은 자기혐오이며, 이 모든 것을 쏟아내는 홀가분함이었음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거겠죠. 반면 감독은 카라타 에리카라는 인물의 사건에 대한 탐구를 근거로, 한 인물의 지독한 경험을 통해 현대인의 공허한 사랑을 함께 연구합니다. 인물을 평범한 사람들이 타고 있는 버스에서 꺼내는 오프닝으로 시작해, 사람들 안에 파묻으며 막을 내리는 구성은 이 같은 추측에 확신을 더하죠. 자극적이고 말초적이고 파편적이고 애매모호한 관계와, 그렇게 밖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비극이라는 면에서 영화는, 그 자체로 관객에게 던지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테니스 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 <흐르는 대로>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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