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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누가 돌봐주고 있어? _ 클레오 & 폴, 스테판 드무스티에 감독

그냥_ 2021. 5.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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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쌍둥이 남매 '클레오'와 '폴'이 길을 잃는 영화입니다만 사실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부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방황과는 다릅니다. 방황에는 갈등과 번민이 포함되지만 이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쌍둥이 모두 부모의 품이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저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죠.

 

 

 

 

 

 

 

 

'스테판 드무스티에' 감독,

『클레오 & 폴 :: Allons enfants』입니다.

 

 

 

 

 

# 1.

 

'클레오'와 '폴'은 부모가 아닌 보모의 아래 있습니다. 보모 '엘사'는 보모로서의 적합한 능력도 책임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울고 있는 '클레오'를 달래줄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는 행인이고, 처음 손을 맞잡은 사람은 공원에 자리를 깔고 누은 노숙자 뿐입니다. 천진하게 따라나서는 '클레오'에게서 위험이 느껴지지만 그 뒤를 지나는 경찰차처럼 노숙자의 손에 이끌린 어린아이를 도시의 치안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일에만 집중합니다. 누구도 어린아이가 홀로 공원을 떠도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현실의 혼자된 아이는 스마트 폰 속 가상의 포켓몬만 못합니다. 차가 오는 길에 아이가 멀뚱멀뚱 서 있지만 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책임이 생겨버린 사람을 제외한 모두는 그저 지켜만 볼 뿐입니다. 경찰은 경비에 아이를 떠맡기고 경비는 다시 개인에게 아이를 떠맡깁니다. 길 잃은 아이는 그저 골칫거리일 뿐이죠.

 

보모에 의해 버려진 어린 '폴' 역시 점점 꾀죄죄한 모습으로 길을 걷습니다. 혼자 물을 마시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함에도 누구 하나 관심이 없습니다. 홀로 남겨진 '폴'은 자연스럽게 엄마를 가진 아이로부터 무언가를 빼앗는 것을 연습합니다. 사람이 없는 음습한 곳으로 자신도 모르게 흘러들어 가기도 합니다. 섬뜩하죠.

 

 

 

 

 

 

# 2.

 

어린아이들의 모습에 비춰진 해체된 사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아닌 보모 아래 있습니다. 쌍둥이 남매는 영화 내내 떨어져 있어야 했고, '루이스' 역시 고립된 존재이며, 아이의 손을 처음 잡는 사람 또한 노숙자입니다. 서로에 대한 보호에 일방적인 관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길 잃은 아이를 보호하던 '루이스'는 어느샌가 '클레오'로부터 위로와 구원을 얻기 시작하죠.

 

미래는 연약하고 나태한 책임감에 떠 맡겨져 있습니다.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보모는 '클레오'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뻔뻔하게도 '폴'을 탓합니다. 보모는 끝내 남은 아이마저 버린 후 뒤돌아 떠나버리죠. '클레오'에게 잠시 동안 엄마가 되어주는 '루이스'와 아빠가 되어주는 '다비드'. 하지만 이들은 모두 허구적 관계일 뿐입니다. 개인의 의지는 답이 될 수 없고 그 의지마저 너무도 연약합니다.

 

'폴'은 그런 연약한 의지마저 만나지 못합니다. 숨바꼭질과 같은 사소한 이유로 갈라져 버린 '같은 곳에서 출발한 아이들'이 이후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단 하루만으로도 얼마나 다른 시간을 걷게 되는 지 묘사합니다.

 

# 3.

 

아빠가 어떻게 생겼냐는 말에 '클레오'는 "바지를 입었고 신발을 신었다." 말합니다. 바지를 입고 신발은 신은 모두가 <클레오의 아빠>입니다.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43 마넌 거리의 파란 문"이라 답합니다. 하지만 역시 43 마넌 거리에 찾아가도 집은 찾을 수 없죠. 파리의 모든 집이 <클레오의 집>이니까요. '클레오'가 사는 문은 저렇게 어둡지 않습니다. 어둡지 않은 문은 파리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 4.

 

영화의 프랑스어 원 제목은 <Allons enfants>. 직역하자면 <가자, 얘들아>쯤 될겁니다. 즉, 이 영화는 '클레오'와 '폴'이라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자고 말하는 사람, 보다 정확히는 가자 말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 할 수 있겠죠. 함께 가야 할 아이들은 '클레오'와 '폴'뿐 아니라 '루이스'와 노숙자와 경찰과 보모와 행인. 이들 모두를 포함한 내일의 프랑스입니다. 감독은 프랑스에게 상처를 이겨내고 앞으로 가자고 말합니다.

 

'이래도 관심을 안 가져?' 싶은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클레오'와 '폴'. 결국 아이들은 서로 만나게 되는데요. '폴'을 본 '클레오'는 가장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너 혼자 있어? 누가 돌봐주고 있어? 네가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폴, 누가 돌봐주고 있어?"

 

 

'클레오'의 말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대변합니다. 감독은 관객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들을 지금 누가 돌봐주고 있는 거냐'고 말이죠. 순수하고 발랄한 아이들의 모습과 어드벤처 뒤에 비친 암울한 현실의 극단적 대조가 강렬한 작품입니다.

 

 

 

 

 

 

# 5.

 

영화를 이처럼 사회적 맥락에서 읽게 만들었던 건 역시나 영화가 개봉하기 몇 해 전 일어났던 파리 테러에 얽힌 코드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대테러리스트 정책을 핑계로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는 경비소와 아이들이 노는 곳에 아이의 눈높이에 놓인 총든 군인, '나쁜 사람들은 숨어 있다'라는 뼈 있는 대사 등은 사회에 스며든 테러리스트에 대한 강한 사회적 긴장과 스트레스에 대해 노골적으로 힌트를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죠.

 

'루이스'의 전 남친 '다비드'. 그가 하필 '영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나, 우호적이었으나 지금은 헤어진 관계, 잔인하게 무수히 많은 신발을 건네는 행동과, 이후 '클레오'를 내려놓지 않겠다는 '루이스'의 다짐. 끝내 터지는 울음. 등의 시퀀스가 앞선 테러에 대한 코드와 얽히며 정치외교적 관계에 대한 은유적 뉘앙스로 강하게 읽히는 것 같긴 한데요... 자신있게 말씀드릴만한 배경지식이 없어 아쉽네요. 쌍둥이가 배회하는 공간을 감독이 의식적으로 특정하려는 느낌에서 역시나 사회적 함의가 읽히는 듯 보이지만 이 또한 잘 모르겠고... 역시 무식하면 이렇게나 서럽습니다. 혹 생각하는 바가 있으신 분들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네요. :)

 

 

 

 

 

 

# 6.

 

'폴'이 홀로 수로를 따라가는 동안의 청아하면서 외로운 공간과 일련의 시퀀스가 인상적입니다. 감독의 실제 자녀인 어린 두 주인공이 불안한 상황에 솔직함과 순수함을 한껏 불어 넣습니다. 늘어지는 바 없이 선명한 메시지만으로 간결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마지막 아이들을 챙기는 경찰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줍잖게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겸허함도 갖추고 있습니다. '좋은 영화'라는 뜻이죠. '스테판 드무스티에' 감독, <클레오 & 폴>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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