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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무시하는 겁쟁이 _ 오목소녀, 백승화 감독

그냥_ 2021. 8.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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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촉망받던 유망주였지만 바둑 대회에서 실패를 겪은 후 기원 알바를 전전하던 주인공이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오목 대회에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전반적으로 짧은 호흡의 가벼운 말장난 개그로 승부 보는 코미디물인데요. 57분 내내 한방의 훅 없이 잔펀치만 집요하게 때리다가 마지막에 따뜻한 메시지로 반창고를 붙여주는 영화라 말씀드린다면 무난하겠네요.

 

 

 

 

 

 

 

 

'백승화' 감독,

『오목소녀 :: Omok Girl』입니다.

 

 

 

 

 

# 1.

 

2014년 이후 만들어진 바둑과 인생을 엮는 다른 모든 창작물들처럼 <미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작품입니다만 감독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패러디물로 가볼까?' 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합니다. 알파고 드립과 같은 잔잔한 농담뿐 아니라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슬램덩크>나 <기생수> 드립 등은 특히 노골적이죠.

 

'패러디성 병맛 개그'로 승부 보는 B급 영화들은 보통 이 '병신 같음'을 등장인물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합니다. 당사자가 설정을 진지하게 받아 들어야 관객이 몰입할 수 있다는 당연한 전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인디 영화 특성상 대체로 감독이 자기 자신의 컬트적 코드에 흠뻑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허나 이 작품은 다소 시니컬한 태도로 자신의 코미디를 대합니다. 스스로 만든 설정을 스스로 비웃는 역설적인 방법론으로 코미디를 작동시킵니다. 영심이스러운 캐릭터 이름들을 관객에 앞서 먼저 짚는다거나, '쌍삼'이 먼저 오목 ㅈ까라하고 스포츠스태킹에 올인하는 설정이라거나, '안경'의 손에 든 왼손이를 일부러 조악하게 연출한 후 '영남'의 입을 빌려 놀리는 장면 등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죠. 일련의 방법론은 병맛 영화 특유의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의 손발 오그라들게 만드는 유치함'을 생각보다 효과적으로 희석합니다. 고전적 플롯의 이야기가 주는 지루함을 적당히 해소해 주는 건 덤이구요.

 

 

 

 

 

 

# 2.

 

작품을 관통하는 코드는 무시無視 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어떤 대상을 업신여겨 깔봄'을 뜻하죠.

 

주인공 '이바둑'은 팔짱끼고 짝다리 짚은 사람의 염세적인 태도로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인물입니다. 바둑에 비해 단순해 보이는 오목을 무시하고 오목으로 대회를 치르는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오목에 빠져 사는 안경을 무시하고 룸메이트 친구의 음악을 무시하고 푼돈 밖에 되지 않을 인형 눈 붙이기를 무시하고 '박복심'의 투혼을 무시하고 '쌍삼'의 비닐하우스를 무시하죠.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있을 관객들 또한 알게 모르게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바라보고 있었을 겁니다. <퀸스 겜빗>이라는 제목을 대할 때의 온도와 <오목소녀>라는 제목을 대할 때의 온도 사이에 적잖은 간극이 있었을 것이라는 걸 애써 부정하기란 쉽지 않을테죠.

 

 

 

 

 

 

# 3.

 

감독은 이 '무시'라는 행위를 두려움과 연결합니다. 무의식 중에 서열을 매기고 상대를 평가절하 하는 욕구의 근간에 두려움이 있음을 포착합니다. 오목을 무시하는 이면엔 바둑에 내던진 자신의 인생이 부정되는 두려움이 투사됩니다. 오목 대회를 무시하는 이면엔 바둑 대회에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자신의 두려움이 투사됩니다. 안경에 대한 무시와 친구에 대한 무시와 복심에 대한 무시와 쌍삼에 대한 무시의 이면엔,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하는 순간 과거에 얽매여 기원에서 컵라면 물이나 올리는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투사됩니다.

 

무시하는 인간의 내면에 담긴 깊은 두려움을 위로합니다. "패배해도 괜찮아.", "잘 지는 것도 중요해." 라는 핵심 메시지는 무시당한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무시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무시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무시하는 사람을 힐난하는 보편의 영화들 사이에서, 무시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무시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라는 문제의식이 담긴 이 가벼운 B급 코미디 영화는 분명한 자신의 영역을 점유합니다. 흥미롭네요.

 

 

 

 

 

 

# 4.

 

박세완은 눈이 참 좋은 배우라는 생각입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인물의 내면에 누적된 피로감이 설득력으로 승화되는 독특한 매력의 배우죠. 아무리 급격한 장르 전환, 상황 전환이 있더라도 캐릭터에 일관된 톤을 지켜낼 수 있다는 건 분명 특별한 능력이라 해야 할 겁니다.

 

'조영남' 역의 '이지원' 양 또한 놀랍습니다. 파트너와 호흡을 맞춰가며 캐릭터를 차곡차곡 만드는 솜씨가 아역의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군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대체로 좋습니다. 모든 배우들이 만화적 캐릭터의 표현을 코미디 콩트가 되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하고 있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 솔직히 전작 <걷기왕>은 느낌이 쎄~해서 주저했었는데요. 이 정도의 결과물을 만든 감독의 작품이라면 한번 찾아봐도 나쁘지 않겠다 싶네요. 무언가를 무시하는 동안 우린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걸까요. '백승화' 감독, <오목소녀>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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