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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이슬 _ 은교, 정지우 감독

그냥_ 2024. 2.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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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시들어 메마른 꽃은 꿀을 탐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이슬을 탐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정지우 감독,

『은교 :: Eungyo』입니다.

 

 

 

 

 

# 1.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10년 전에 비해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된 걸까 하고 말이죠. 아무래도 타향살이 고학생이었던 당시보다 주머니 사정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본업에서의 직무능력이나 위기가 있을 때 되새겨볼 경험치도 조금은 늘었죠. 상황에 맞춰 어른 연기를 하는 것에도 조금은 익숙해진 듯합니다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졸업반 선배가 되어 스무 살 신입생 앞에서 억지 조언을 짜내던 순간의 기분과,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사회초년생 후배들 앞에서 어른 흉내를 내는 지금의 기분은 크게 다르다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또다시 십 년이 흘러 사십 대 중반이 되면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까요. 글쎄요, 자신은 없군요.

 

어쩌면 사람들은 스무 살 즈음에 완성된 자아의 큰 덩어리를 가진 채로 여생을 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024년의 이십 대와 2024년의 오십 대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2024년의 달력 위에 2024년의 이십 대와 1994년이 이십 대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죠. 우리가 느끼는 세대차이란 이십 대와 오십 대의 '세대' 차이가 아니라 2024년에 자아를 완성한 사람과 1994년에 자아를 완성한 사람 사이의 '시대' 차이가 아닐까 상상하면 우리 주변의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김은희 작가의 대표작 중에 <시그널>이라는 드라마가 있죠. 무전기 너머 차수현과 이재한의 교감이란 과감한 SF적 상상의 산물이 아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일지도 모르겠군요.

 

 

 

 

 

 

# 2.

 

<은교>는 박범신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해피 엔드의 정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살인의 추억과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이 주연으로 나와 백발노인으로 분해 열연을 펼칩니다. 물론 대부분은 김고은의 등장으로 기억하실 걸 알고 있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동의 여하와 별개로) 이적요의 저 감정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직관을 부여한 것에는 김고은의 맑고 솔직한 존재감이 주요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죠.

 

마약하고 전쟁하고 자살하고 죽이는 건 딱히 문제 될 게 없지만 이상하게 섹스만 하면 야단법석이 나는 우리나라 특성상 논란작이지 아니하지 아니할 수 없는 작품이었는데요. 사실 유교 탈레반 타령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논란을 피하기 힘든 작품이긴 합니다. 실제 배우의 나이와 무관하게 은교는 미성년자, 17세 소녀라는 설정이었으니까요. 심지어 그녀에게 욕망을 느끼는 박해일의 이적요는 70대 노인이었죠.

 

파격적인 설정과 그보다 더 파격적인 묘사가 이목을 끌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은교는 문학적인 방법론으로 인간 본성을 탐미하는 것에 본질이 있는 드라마라 평하는 것이 정당할 겁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세 주인공은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인물들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작가 이적요에게는 작가로서의 재능과 명성이 있지만 젊음이 없고, 제자 서지우에게는 젊고 강건한 육체가 있지만 작가로서의 재능이 크게 박약합니다. 은교는 재능과 그 재능을 꽃피우게 해 줄 젊음이라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당사자에게 가능성이란 불안의 다른 이름일 뿐이죠. 각자는 서로에게 동경하고 시기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그 끝에 이 모든 것들이 혼재된 욕망으로서 파멸에 다다릅니다.

 

 

 

 

 

 

# 3.

 

세 주인공은 각자의 시각에 따라 욕망의 주체이자, 욕망의 대상이며, 욕망을 숨겨야 하는 적이기도 합니다. 이적요는 은교를 통해 젊음과 창작의 열정을 찾지만, 노회한 육신의 탐욕은 서지우를 포함한 모두에게 숨겨야 하는 치부입니다. 이적요에게 동경과 열등감을 느끼는 서지우는 은교에게 박탈감을 느끼고, 은교의 육체를 취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표출합니다. 은교는 이적요에게 성숙함에 대한 동경을 가짐과 동시에, 강건하고 안정적인 성인으로서 서지우를 사랑합니다. 클라이맥스에서 보인 지우와의 관계는 그녀에게 온전히 교감한 어른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여기는 듯 표현되어 있는 이유죠.

 

서지우는 은교와 잠자리를 가짐으로써 사실 이적요의 욕망과 단절감을 공격합니다. 이적요는 잠자리를 훔쳐보고 이를 관객에게 폭로함으로써 은교의 순수성을 공격합니다. 은교는 존재 자체로 서지우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타격합니다. 클라이맥스는 그 자체로 동경과 질투가 혼재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사랑과 시기심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작품의 주제의식을 구현합니다. 이후 자동차를 망가트려 서지우가 사망하고, 은교가 돌아누운 이적요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들은 그 순간의 파멸이 남긴 데일 듯한 잔열이라 할 수 있겠죠.

 

되돌릴 수 없는 젊음에 대한 좌절, 가져본 적 없는 재능에 대한 분노. 젊음은 노인의 성숙함을 동경하고, 노인은 젊음의 싱그러움을 동경하는 아이러니. 이들의 공통점은 극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절대적 결핍이라는 점입니다. 소녀의 나이가 구태여 17세 미성년자인 것은 이적요가 탐하는 은교가 구체적 개인으로서 매혹적인 여성이 아닌 젊음이라는 개념의 구체화였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금기의 뉘앙스를 단절감으로 연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그려낸 탐욕이 가장 순수한 존재(은교)와 가장 현실적인 존재(서지우)와 가장 이지적인 존재(이적요) 모두에게 작동한다는 면에서 동경과 질투와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론적인 무기력함이 투사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죠.

 

 

 

 

 

 

# 4.

 

특히 좋았던 것은 이러나저러나 포커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이적요와 은교 외에 김무열의 서지우 역시 그 정서적 공간을 유의미하게 배려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가 단순히 미성년자를 탐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었던 건 일련의 균형에 기인한다 해야겠죠.

 

세 인물을 오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상황적으로 시각적으로 표현함에 있어 뛰어난 성취를 거둡니다. 편안한 환경 속에서 신체적 표현들을 섬세하게 카메라로 옮겨 담음으로써 정직하게 승부를 본 우직함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냥 뜨겁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처연하게 침전하는 느낌을 시도했다는 것, 마냥 추악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냉각이 공존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의의라 해야 할 겁니다. 이적요의 감정은 서늘한 한기의 그늘로, 서지우의 감정은 차가운 쇠의 질감으로, 그 사이에 놓인 은교를 푸르른 투명함으로 시각화한 것 역시 인상적이구요, 과도하게 윤리적으로 치우쳐 진단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미술과 음악의 역할도 주요합니다. 정지우 감독, <은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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