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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루프는 폭발이다 _ 팜 스프링스, 맥스 바바코우 감독

그냥_ 2024. 2. 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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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갈(喝)!

 

 

 

 

 

 

 

 

맥스 바바코우 감독,

『팜 스프링스 :: Palm Springs』입니다.

 

 

 

 

 

# 1.

 

루프물에 로맨틱 코미디다 보니 언제나처럼 '그 이름'이 불려 나올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사랑의 블랙홀>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일부의 평은 썩 정밀하진 않아 보입니다. 모름지기 재해석이라 하려면 주제의식의 발전이 있어야 할 텐데요. 내적 성찰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영혼의 성장을 그렸던 빌 머레이 & 해럴드 레이미스와 달리, 맥스 바바코우는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관계성의 가치불안정성을 직시하고 내일을 맞이하는 용기라는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그럼에도 여타의 모든 루프물과 같이 사랑의 블랙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감독 역시 그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사랑의 블랙홀을 끌고 들어와 오마주 하고 있는 장면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흥미롭죠. 폭탄 두르고 동굴에 꼬라박는 염소는 겨울의 끝을 알리며 동굴을 나오는 마멋(Groundhog)을 뒤집은 것처럼도 보이구요. 겨울이 끝나는 경칩에서 시작된 시간대 역시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초로 뒤집어 끌고 들어오고 있죠. 아침에 눈을 뜨는 장면을 포함 다방면에서의 파편적 연출들도 끊임없이 기시감을 자극하고 있구요. 내내 추우면서 포근한 그림으로 가득했던 펜실베이니아 펑수토니 또한, 캘리포니아의 휴양지 팜 스프링스의 화창한 날씨와 시원한 수영장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노골적인 오마주라면 루프에 갇힌 것을 처음 알게 된 세라의 반응이라 해야겠죠. 어떻게 해야 루프를 탈출할 수 있는지 마치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대놓고 선행을 연기하는 크리스틴 밀리오티의 모습은 빌 머레이의 무뚝뚝한 표정과 대비되어 익살스러운 즐거움을 줍니다.

 

 

 

 

 

 

# 2.

 

사랑의 블랙홀에서의 환경은 성촉절(聖燭節)입니다. 루프 속에서 성촉절을 반복한다는 것은 곧 주인공 필 역시 하나의 마멋이 되어 끊임없이 동굴을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고 있음을 은유합니다. 설화에 의하면 겨울을 끝내고 봄을 맞이하기 위해선 동굴을 나오던 마멋이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않아야 하는 데요. 필 역시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착각하던 외부의 조건이라는 그림자를 뒤돌아보지 않고 온전히 자기 삶의 주인에 도달함으로써 루프를 벗어날 수 있었죠.

 

반면, 팜 스프링스에서의 환경은 결혼식입니다. 루프 속에서 결혼식을 반복한다는 것은 당사자인 탈라 커플뿐 아니라 주인공 나일스와 세라 역시 서로의 관계를 끊임없이 새로이 실험하고 재정립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영화는 결혼식의 기준에서 '나일스의 축사'로 시작해 '세라의 축사'로 끝난다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요. 인생은 혼자라 생각하지만 그저 필요에 의해 마음에도 없던 말을 하던 나일스와, 진심으로 동생 부부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함으로써 자신의 잔인한 오늘과 작별을 고하던 세라의 대비는 영화가 지향하는 성찰을 증명합니다.

 

여담으로 나일스와 세라의 축사가 끝나고 나면 흰머리 할머니가 다가와 더없이 훌륭한 축사였다 칭찬하는 데요. 세라에게만큼은 "나갈 때가 되었구나"라는 말을 건넵니다. 의미심장하죠. 나일스의 축사와 세라의 축사를 구분함과 동시에 루프 안에 갇힌 제4의 인물, 혹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초월적 존재를 암시한다는 면에서 유쾌한 이스터에그라 할 수 있겠죠.

 

 

 

 

 

 

# 3.

 

팜 스프링스의 가장 특징적인 변주라면 역시나 루프 안에 다수의 사람이 갇혀 있다는 점일 겁니다. 앤디 샘버그의 나일스와, 크리스틴 밀리오티의 세라, J.K. 시몬스의 로이죠. 루이의 오늘은 행복하고 나일스의 오늘은 지루하고 세라의 오늘은 불행합니다. 셋 중 특히 중요한 것은 루이입니다. 에이브로부터 달아나는 세라와, 무표정으로 자위하는 나일스뿐 아니라 루이의 행복한 오늘 역시 똥무더기에 물을 줄고 있는 것만큼이나 허무합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행복한 루이는 순응하고, 지루한 나일스는 인내하고, 불행한 세라는 포기하지만, 그것이 답이 되지 못함은 쾌락으로 점철된 일탈 속에서도 점점 허물어져 가는 세 인물의 내면이 증언합니다.

 

거짓말처럼 공룡을 본 그날 밤, 나일스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만약 세라가 없었다면 그가 본 공룡과 그날 밤의 기억은 언젠가 마모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겠죠. 세라는 루프에 들어오기 전 나일스와 무수히 잤었다는 사실에 좌절합니다. 지금 어떤 추억을 쌓느냐와 무관하게 새로움은 과거의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고 과거의 방향으로 돌아보는 순간 에이브와의 불륜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고통을 직시하게 되죠.

 

결말에 이르러 나일스와 세라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데요. 통상 루프를 벗어난 후 기적적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으나 감독은 구태여 루프를 탈출하기 전에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게 합니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과 오늘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사랑을 확인한 후 함께 죽는 것만 못합니다. 답은 설령 폭발에 휘말려 내일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결혼식의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닌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본질은 이후 사랑으로 헤쳐나가게 될 불안정한 내일들인 것이죠.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 뜬금없이 웬 이상한 남녀가 수영장을 쓰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 4.

 

관객 경험의 측면에서 보자면, 소장르 특성상 전반적인 내용은 루프 안에서의 일탈로 채워져 있긴 합니다. 재미의 상당 부분을 장르의 동력에 최대한 의지하는 터라 특별한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장르의 동력을 성실하게 소비하고 있다 정도의 평 정도는 들어도 좋은 거겠죠. 일탈의 내용이란 경비행기를 몰고 경찰을 차로치고 석궁을 갈겨 대는 등 충분히 과격한 형태의 쾌감으로 채워져 있는 데요. 닳고 닳은 아는 맛이지만, 아는 맛이 무섭기는 합니다. 경쾌하고 말초적인 화장실 유머의 재기 발랄함은 일정한 재미를 보장하고 있죠.

 

루프를 벗어나기 위해 양자역학을 배운다(...)는 전개는 스스로 방법을 찾는다는 면에서 인간의 자주적인 의지를 투사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좀 뜬금없긴 합니다. 코미디언이 핸들링하는 각본 특유의 광기 같은 걸 텐데요. SNL 같은 데 쓰일 파편적 콩트였다면 문제없이 유쾌했겠지만 영화적 즐거움은 그것보다는 더 치밀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군요. 전개에 비해 결말은 다소 시시하다는 평이 더러 보이는데요. 동의합니다. 아무리 양자역학을 배우고 TNT를 터트려도 결국 교훈극이라는 루프만큼은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하고 말이죠. 맥스 바바코우 감독, <팜 스프링스>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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