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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대가를 활약으로 대신한 대가 _ 패신저스, 모튼 틸덤 감독

그냥_ 2023. 7.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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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생존이 공격받는 상황 앞에 윤리는 얼마나 허약한가. 당위는 얼마나 허무한가.

 

 

 

 

 

 

 

 

모튼 틸덤 감독,

『패신저스 :: Passengers입니다.

 

 

 

 

 

# 1.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화, 패신저스입니다. 어떤 영화가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단순히 못 만든 영화들에 비해 특히 격앙된 비난을 듣곤 하는데요. 이 작품이 들어야 했던 비난들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죠. 사실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이 경악하는 게 이해가 가는 소위 '욕 들어먹을 만한' 작품이긴 합니다. 다만 그냥 비난만 할 뿐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더라구요.

 

<비상선언>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듯 영화감독 역시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들도 평범한 윤리 의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죠. 어떤 영화감독이 특별히 윤리적으로 파산한 괴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고, 설령 문제적 인간이라 한들 그것을 작품에 노골적으로 담아내는 경우는 더더욱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단계에 걸쳐 협업하게 되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감독 한 명이 특별히 미친놈이라 그 미친놈의 사상이 영화에 온전히 투영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솔직히 미련합니다.

 

윤리적 문제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영화들은 대게 도덕적 비난을 감수하게 됩니다만 개인적으론 대부분 그냥 영화를 더럽게 못 만들었을 뿐이라 생각하는 쪽입니다. 시간도 충분히 흐른 김에 조금 더 차분한 톤으로 이 영화는 어디에서 모티브를 얻어 어떤 메시지를 주려 했는지, 대체 무슨 이유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실패한 것인지를 이야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겠죠.

 

 

 

 

 

 

# 2.

 

산발한 머리, 덥수룩한 수염, 헐벗은 옷차림에 탱탱한 엉덩이를 가진 남자가 홀로 표류되는 이야기. 이런 영화가 <로빈슨 크루소>로부터 자유롭다면 솔직히 거짓말일 겁니다. 실제 많은 부분에서 로빈슨 크루소로부터 모티브를 얻고 있는 작품처럼 보이는 데요. 주인공 짐이 아발론 호라는 무인도에 표류된 로빈슨 크루소라면 오로라는 윌슨이라 생각하는 것은 썩 자연스럽습니다. 고독감을 견디기 위해 이름 붙였던 낡은 배구공(윌슨)을 살아있는 사람(오로라)으로 각색한 다음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관찰해 보자라는 출발점에서 시작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로빈슨 크루소의 표류와 짐의 표류 사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생존이 위협받는가라는 점입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는 윌슨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관계의 결핍과, 먹고 마시는 등의 생물학적 위험이 공존하는 복합적 위기였던 것에 반해, 짐의 우주선은 생물학적 위험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죠. 실제 짐은 안전하고 풍요롭고 놀거리도 충분하고 대화를 기능적으로 대신할 안드로이드도 있어 생물학적 수명을 향유하는 것은 전혀 위태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짐은 자신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느낍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다를 바 없이 삶이 공격받고 있다 여긴다는 것이죠. 이후 진실을 알게 된 오로라 역시 자신이 짐에 의해 살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규정하는 데요. 대부분의 관객 또한 그것을 특별히 오류라 생각지 않았을 겁니다.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가를 증명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 3.

 

우주선 하나가 드넓은 우주를 가로질러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남자가 먼저 깨어나고, 뒤이어 남자에 의해 여자가 깨어납니다. 누가 봐도 <창세기>죠. 감독은 로빈슨 크루소에서 가져온 모티브를 창세기를 통해 인류 보편의 문제로 확장합니다.

 

짐은 아담, 오로라는 하와의 은유라는 가정하에 영화를 따라가 봅시다. 선악과를 유혹하는 뱀은 끊임없이 두 사람에게 술(타락 혹은 욕망)을 권하는 안드로이드 아서 정도가 될 겁니다. 영화는 등장인물을 승객과 승무원이라는 두 계급으로 구분합니다. 승객은 허가받은 영역까지만 닿을 수 있고 특히 승무원이 있는 곳은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데 반해, 승무원은 승객들의 여행을 관리하고 시스템을 관장하는 전능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승객이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이라면, 승무원은 신적인 존재들의 은유라 상상하는 것은 썩 자연스러운데요. 추측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때마침 모피어스 그 자체가 되어버린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로렌스 퍼시번의 거스는 시스템을 관장합니다.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우주선이 무사히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며, 두 사람에게 화해를 권유합니다. 신(승무원)의 영역에서 인간(승객)의 영역으로 내려온 존재. 인간을 이끌지만 얼마가지 못해 대신해 피를 흘리게 되는 존재. 예수군요.

 

결말은 이 같은 기독교적 해석에 힘을 더합니다. 목적지인 식민 행성 홈스테드 2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 데요. 소위 맥거핀이라는 것이죠. 인생의 목표라 생각하던 막연한 낙원이 있고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삶은 의미 없는 것이라 생각하던 주인공들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설령 낙원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을 녹음(에 은유된 본질적 풍요로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그곳이 곧 낙원이다.라는 이미지는 확실히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는 결말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 4.

 

본격적인 사건으로 들어가 봅시다. 오로라는 자신이 깨어나게 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뱀(아서)에 의해 선악과(금단의 지식)를 먹게 된 하와(오로라)랄까요. 오로라는 자신이 납치된 것과 다를 바 없음에 절망합니다. 모피어스는 짐을 만나 당신의 선택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합니다. 동시에 오로라에겐 물에 빠지면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된다며 '옳지는 않지만 이해는 된다' 말합니다. 모피어스는 감독을 대리하는 페르소나이기도 하고, 안전한 공간에 있는 관객의 판단을 대리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두 인물을 평하는 장면은 작품의 주제의식이 거스의 입을 빌려 삐져나오는 순간이라 할 수 있겠죠.

 

# 5.

 

생존이 공격받는 상황 앞에 윤리는 얼마나 허약한가. 당위는 얼마나 허무한가.

 

작품의 주제의식은 위의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절망 앞에 짐의 허약한 윤리는 손쉽게 허무러 집니다. 짐이 죽고 나면 여생을 홀로 보내며 짐이 느꼈을 갈등을 평생 짊어져야 한다는 절망 앞에 오로라의 당위 역시 손쉽게 포기됩니다. 이 영화를 부도덕하다 힐난한 관객조차, 당신이 짐이나 오로라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 당당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죠.

 

어쩌면 감독은 영화를 향한 윤리적 질타가 억울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짐의 선택과 오로라의 태도 변화가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작품은 비윤리로 내몰리게 만드는 삶의 고립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역설적으로 말하는 작품이라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가 조커가 옳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서가 조커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무수히 많은 기회와 사회안전망의 부재를 지적하는 작품이었던 것처럼. 영화 <패신저스>는 나의 이기심으로 남을 납치해도 좋다가 아니라 그런 극한의 상황 앞에 인간의 윤리와 당위란 너무나 허약하므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개인이 고립되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는 것이죠.

 

 

 

 

 

 

# 6.

 

영화는 특별히 두 개의 공간을 중요하게 쓰고 있는 데요. 하나는 우주선 밖의 광활한 우주고, 다른 하나는 수영장입니다. 우주와 수영장은 각각 짐의 내면과 오로라의 내면을 투영합니다. 두 공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추가적으로 중력이라는 개념을 포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에서 보셨듯 통상 중력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즉 관계성을 의미한다 이해하시면 무난합니다.

 

홀로 깨어난 짐은 중력 없는 우주 공간 한가운데 수명이라는 끈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람입니다. 오로라가 깨어난 후 그녀로 인해 우주는 더 이상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라 자유의 공간이 됩니다. 이후 오로라와의 관계가 망가지며 연약한 희망마저 끊어져 우주 공간에 내버려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지만, 다행히 오로라의 용서에 의해 구원받게 됩니다. 반면,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오로라에게 우주선은 같은 자리를 헤엄쳐 오가는 감옥과 같습니다. 짐과의 관계는 오로라에게 작가로서의 갈증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하는 느슨한 중력, 즉 부력에 의해 감소된 중력으로 묘사됩니다. 이후 짐과의 관계가 파괴되자 느슨한 중력마저 잃고 수영장의 물과 함께 떠오릅니다. 짐을 원망하는 것과 별개로 그와의 관계조차 잃고 난 후 감당하게 될 숨 막히는 공포는 물 안에서의 발버둥으로 구체화됩니다.

 

영화의 결말을 '우주'를 뒤로 한 '수영장' 안에 몸 담근 두 사람의 모습으로 정리한 이유입니다. 짐과 오로라는 여전히 두 사람 밖에 없는 불완전한 관계성 밖에 누리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믿으며 극복해 내리라는 온화한 결말인 것이죠.

 

 

 

 

 

 

 # 7.

 

이렇게만 말하면 영화는 멀쩡한 데 사람들이 잘못 본 거라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텐데요. 설마요. 패신저스는 얄짤없이 졸작이 맞습니다. 그럼 왜 영화의 주제의식이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 걸까라는 실패의 이유를 살펴봐야겠죠.

 

가장 큰 패착은 짐이 치러야 할 '대가'를 '활약'으로 대신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대가를 치른다면 잘못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잘못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활약으로 갚아버리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이후 활약으로 때우면 된다는 식의 정당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한 것은 치명적입니다. 앞서 비유했던 조커를 예로 든다면 조커는 자신의 폭주로 인해 결국 아서로서의 인격과 성품과 희망을 대가로 지불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머레이를 죽이고 경찰차 위에 선 조커가 치러야 했던 대가에 대한 페이소스가 충분히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 이면에 담긴 주제의식 역시 온전히 전달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짐이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점은 오로라의 합리성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적어도 짐이 통렬한 대가를 치르기라도 했다면, 오로라가 그를 용서하는 것에 최소한의 명분은 되어줄 수 있었을 테니까요.

 

결과적으로 일련의 패착은 '생존이 공격받는 상황 앞에 윤리는 얼마나 허약한가. 당위는 얼마나 허무한가.'라는 주제의식을 '그냥 대충 주어진 인생 즐기며 사는 게 짱이야. 너무 뭐라 그러지 마. 좋은 게 좋은 거잖아.'라는 것으로 뒤바뀌게 만들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상식적인 관객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말인 것이죠.

 

 

 

 

 

 

# 8.

 

후반부 SF 어드벤처는 주인공의 업보를 갚기 위한 거대한 활약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그 목적과 접근이 태만했기에 무수히 많은 과학적 오류는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죠. 원자로의 초고온 열풍을 방패 하나 들고 막는다거나, 그 반동으로 날아가는 운동량을 고작 문짝 집어던지기로 복구한다는 식의 결말은 드라마 이전에 SF물로서의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갔을 관객층 역시 돌아서게 만드는 치명적인 단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면에선 클레르 드니의 <하이 라이프> 라거나, 제임스 그레이의 <애드 아스트라>, 닐 버거의 <보이저스>와 비슷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비행선 타고 우주 가는 데 목적지는 맥거핀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인생 혹은 사회를 축약하고 있으며, 모티브를 기독교 창세 신화에서 가져온다는 점이 모조리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네 편의 영화에 대한 평은 극단적으로 갈리고 말았습니다. 하이 라이프와 애드 아스트라는 제법 좋은 영화였던 것에 반해 보이저스는 혹평을, 패신저스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으니까요. 네 편의 작품은, 모티브는 사소한 출발점일 뿐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큰돈 들여 제법 흥미로운 판을 깔아놓고 정작 수확하는 것이 몇몇 장면의 말초적 눈뽕과, 어쨌든 웅장하기는 한 OST, 제니퍼 로랜스의 말도 안 되는 미모뿐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요. 모튼 틸덤 감독, <패신저스>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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