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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가장 낮은 층의 붕괴 _ 비상선언, 한재림 감독

그냥_ 2022. 8. 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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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뒤집어진 건 영화였구요.

 

 

 

 

 

 

 

 

한재림 감독,

『비상선언 :: Emergency Declaration』입니다.

 

 

 

 

 

# 1.

 

씨발, ㅈ됐다. 어떡하냐.

 

# 2.

 

천박하게 말하자면 재난 영화는 위의 두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의 '씨발, ㅈ됐다'는 재난의 심각성을 의미할 테구요, '어떡하냐'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의미한다 할 수 있겠죠. 영화는 전후반 극명하게 갈리는 평가를 받는 양상인데요. 전반부는 씨발 ㅈ됐다를 열심히 잘 만들어 칭찬받고 있는 것이고, 후반부는 어떡하지를 기만하면서 욕먹고 있는 것이라 이해하면 무난할 겁니다.

 

끝맺음으로 논란에 놓인 작품을 이야기하는 중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긴 합니다만, 재난 영화의 결말은 생각보다 자유롭습니다. 어찌어찌 노력한 끝에 다 살아도 좋습니다. 일부는 죽고 일부만 사는 결말도 정석적이죠. 까짓 거 분전했지만 다 죽고 말았다는 암울한 이야기여도 문제 될 건 없구요, 적당히 살았는데 더 큰 재난이 오네?라는 열린 결말도 흔합니다.

 

하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모든 인물들은 죽기 싫어한다라는 합의는 끝까지 유지되어야 합니다. 굳이 죽여야겠다면 하나뿐인 2세의 목숨과 같은 죽기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죽음을 감수할 법한 압도적인 명분이라도 제공되어야 합니다. 별 이유도 없이 다 같이 죽자가 되어버리면 좋은 영화냐 나쁜 영화냐 이전에 재난 영화의 정체성 자체가 붕괴됩니다.

 

상황에 직면한 캐릭터는 늘 관객보다 한 발자국 더 진지하고 절실해야 합니다. 재난을 직면한 인물들이 다 죽자는 결론을 내려버리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소중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관객)는 바보가 되어버린다라는 건 논리도 뭣도 아닌 직관의 영역입니다. 남의 고민에 진지하게 조언하고 있는 데 당사자가 딴짓하면 '이 새끼가?' 소리 나오는 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 3.

 

피학적 전체주의의 위험성 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주의적 결말로 인해 '장르가 무너져 내렸다'는 점입니다. 

 

전체주의로 대표되는 문제적 메시지의 심각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듯합니다만, 본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영화의 문제는 사상이 아니라,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집단 자살을 선택함으로 인해 재난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낮은 층의 기반이 통째로 붕괴된 것에 기인합니다. 심각한 상황이라길래 열심히 따라갔더니 나 혼자 심각해하고 있는 개같이 뻘쭘한 상황. 나를 조롱하는 듯한 등장인물 놈들이 지들끼리 숭고하다며 박수치는 걸 모욕적으로 지켜보는 상황. 관객이 영화로부터 따돌림 당해 벙찐 상황이랄까요.

 

지협적일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한 비판들은, 장르 붕괴라는 참사에 희생된 관객들이 분풀이를 하고 있는 면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후 관계가 뒤바뀐 것이죠. 이를테면 반일이니 반미니 하는 코드들. 민족주의 감정을 건드리는 듯한 짜증 나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그 자체로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었냐 하면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감독 스스로의 말처럼 (아주 편의적이고 나태한 방식의) 영화적 장치 중 하나였을 뿐일 수도 있죠.

 

작금의 상황은 반일이나 반미라 망한 것이 아니라, 보고 나서 기분이 개 같은 영화라 반일이든 반미든 이유를 찾고 싶어하는 형국에 훨씬 가깝습니다. 막말로 극 안에 있는 사람들만 끝까지 재난 상황에 치열했더라면, 그래서 몰입한 관객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결말만 제시되었더라면, 자위대의 카미카제가 아니라 김우빈이 우주선 타고 나타나 여객기에 레이저 갈기고 고려시대로 워프 했어도 지금처럼 논란이 커지진 않았을 겁니다.

 

 

 

 

 

 

# 4.

 

미성년자가 스스로 희생하겠다 말하는 영화가 정상이냐!!!

 

라는 류의 이야기도 있는 듯한데요. 마찬가지입니다. 호불호와 별개로 영화에 윤리를 가져다 붙이는 건 솔직히 황당합니다. 트뤼포는 '메시지를 원한다면 우체국에서 전보를 쳐라' 말했다는 데요. 빗대자면 '윤리를 원한다면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라' 말할 수 있겠죠. 간단히 예를 들어 볼까요. <킥 애스>의 힛걸이 어찌어찌하다 큰 위기 상황에서 콘스탄틴 마냥 존나 멋있고 숭고하게 죽으며 희생하는 영화가 나왔다 칩시다. 그래도 문제가 되었을까요? 걔도 미성년자인 건 매한가지인데요. 자살하는 거 똑같은데요.

 

모르긴 몰라도 재미만 있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겁나 귀여운 클로이 모레츠 굿즈만 불티나게 팔려 나갔겠죠. 사람으로 햄버거 패티를 만드는 영화도 나오는 마당에 어차피 픽션인데 애가 죽겠다 말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구요. 핵심은 윤리가 아닙니다. 재난 영화라기엔 애 입에서 스스로 죽겠다는 말을 꺼내는 동안의 '과정'과 '이유'라는 것이 너무 하찮고 허무맹랑하다는 것이 본질이죠.

 

 

 

 

 

 

# 5.

 

프로덕션의 성취에 대한 평가도 일부 있는 듯합니다만, 글쎄요. 고생해서 멋들어지게 잘 만들었다는 것에는 십분 동의하나 결말까지 보고 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락 영화로서 최소한의 가치가 성립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기술적 성과를 논하는 것은 허망합니다. 음식 평론가가 돈가스를 먹더니 '식중독에 걸리긴 했지만 데코레이션은 훌륭하니까 평점 7점' 뭐 이딴 개소리를 하는 것 밖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음식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식중독에 걸린 순간, 이전의 다른 성취는 제한적으로 평가되거나 무시되는 것이 상식적이죠.

 

마찬가지로 재난 영화로서의 정체성이 결말에서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상황이라면 이전의 미술적 성취 역시 허망하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돈가스의 화려한 데코레이션은 되려 식중독에 걸린 고객을 기만하는 단점이 되듯, 비상선언의 미술적 성취 역시 결말에서 느낄 배신감의 낙폭을 더 크게 만드는 단점으로서만 기능할 뿐입니다.

 

 

 

 

 

 

# 6.

 

적당히 감상을 정돈한 후 논란의 파이아키아도 찾아봤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주장하는 피학적 전체주의를 포함한 메시지 해석에는 상당 부분 동감합니다만, 이를 '위험하다' 말하는 인식만큼은 다소 의아합니다. 현실에 벌어지면 '위험한' 이야기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대충 떠오르는 토드 필립스의 <조커>만 하더라도 건실한 토크쇼 진행자 뚝배기에 총알 박아 넣는 정신병자를 설득하다 못해 매력적이라 꼬시는 이야기인데 이건 그럼 안전한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만 하더라도 유부남이랑 불륜하다가 엄마, 전 남편, 전전 남편 줄초상 내고 비겁하게 자살하는 유부녀를 가슴 시리게 사랑하게끔 만드는 이야기인데 이건 그럼 안전한가요.

 

어느 누가 영화 쪼가리 하나 보고 전체주의가 좋은 거구나 생각할까요. 어느 누가 영화 쪼가리 하나 보고 위험해진다는 걸까요. 물론 해당 영상의 전반적인 맥락을 보면 감동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강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한 어휘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전문가라면 언어를 조심해서 사용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영향력이 큰 이동진 평론가의 이례적으로 격앙된 반응은, 의도와 무관하게 그를 좋아하고 신뢰하는 수많은 팬들로 하여금 '감독을 단죄할 자격을 얻은 도덕 선생님'에 빙의하게 만들고 말았군요.

 

예전에 박훈정 감독의 <V.I.P.>를 이야기하며 영화적 선택이 감독의 자연인으로서의 도덕성과 연결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말씀드렸는데요. 마찬가지 이유로 이 영화를 근거로 한재림 감독을 전체주의자라느니 미성년자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사고방식의 괴물이라느니 매도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입니다.

 

감독도 관객과 똑같은 평범한 시민일 뿐 악당이 아닙니다. 그저 영화를 ㅈ같이 못 만들었을 뿐이죠.

 

 

 

 

 

 

# 7.

 

차라리 얀 드 봉의 <스피드>처럼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끝으로 '재난 영화'와 '사회 드라마'를 한 작품 안에 담고 싶었다면 아싸리 페이즈를 가르는 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전반부 차량 액션과 후반부 지하철 인질극으로 갈랐던 <스피드>처럼 말이죠.

 

임시완으로 대표되는 흥미진진 항공 재난을 펼쳐놓고, 영화의 제목처럼 메이데이를 선언한 후 아슬아슬하지만 무사히 착륙하는 상황까지로 첫 번째 페이즈를 채웁니다. 그렇게 항공 재난을 '완벽히 종료'시킨 후. 안전하게 착륙한 상황에서 생화학 테러에 노출된 생존자들의 배타적 사회를 향한 두 번째 비상착륙으로 새로운 페이즈를 꾸렸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것이죠. 하늘에서의 이야기와 땅에서의 이야기 간의 구조와 온도를 적절히 대비시켜 고찰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더라면 관객의 평가는 크게 달랐지 않았을까 싶은 상상입니다.

 

역으로 비상선언의 방법론을 <스피드>에 적용한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키아누 리부스가 2시간 동안 버스 몰더니 결말에서 '아 빡세네. 다른 경찰들에게 민폐 그만 끼치고 자폭 앤딩 수고요.' 라면서 급브레이크 밟고 산드라 블록과 '숭고하게' 승천하는 꼴이 되었을 테죠. 만약 스피드가 그런 영화였다면, 거기에는 전체주의도 반일도 반미도 고증 문제도 미성년자 윤리도 뭣도 없지만 관객은 비상선언과 똑같은 종류의 ㅈ같음을 느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래요. 누차 말씀드리는대로 메시지는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냥 재난 영화를 개같이 못 만들었다는 것이 본질입니다. 한재림 감독, <비상선언>이었습니다.

 

# +8. 'ㅈ됐다'로 시작한 영화가 'ㅈ같다'로 끝나는 데 그 영화가 잘 되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요.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 건 황당한데 말이죠. 흠...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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