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Drama

양털 깎기 _ 램스, 그리무르 하코나르손 감독

그냥_ 2022. 1. 26. 06:30
728x90

 

 

# 0.

 

"형, 도와줘."

"괜찮아질 거다. 동생아."

 

 

 

 

 

 

 

 

'그리무르 하코나르손' 감독,

『램스 :: Hrútar』입니다.

 

 

 

 

 

# 1.

 

40년 동안 삐진 양치기 노년 형제가 파산 위기를 맞아 극적 화해하고,

눈 내리는 산에 양 풀러 갔다가 이글루 안에서 홀딱 벗고 끌어안는 영화입니다.

 

# 2.

 

모두가 양을 치는 아이슬란드의 어느 시골 마을에 스크래피(Scrapie), 우리 말로는 진전병이라 불리는 치명적인 동물 전염병이 돌게 됩니다. 방제를 위해선 인근의 모든 양을 도축하고 시설과 도구까지 모조리 폐기해야 합니다. 축사를 다시 꾸리려면 최소 2년 여의 시간이 소요될 텐데요. 보상금으론 그동안의 생활을 담보할 수 없고, 방제가 끝난다 하더라도 전염병이 다시 돌지 말라는 보장 역시 어디에도 없습니다.

 

평생 양을 키워온 형제 '키디'와 '구미'입니다. 멋들어진 흰 수염이 풍성한 노인이지만 두 사람 모두 속은 그리 넓지는 못합니다. 형제는 나무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무슨 이유에선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하죠. 어쨌든 형제 역시 전염병 관리 지침에 따라 양을 도축해야 합니다만, 둘 모두 가족과 같은 양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형 '키디'는 검역관에 항의 하지만 결국 모든 양을 잃습니다. 동생 '구미'는 일부의 양들을 스스로 희생시키는 대신 몇 마리를 지하실에 숨기게 되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형과 검역관에게 발각되고 맙니다. 양을 잃을 위기에 놓인 동생은 형에게 찾아가 도와달라 말합니다. 형은 동생과 함께 양 떼를 이끌고 눈이 쏟아지는 산으로 향합니다.

 

 

 

 

 

 

# 3.

 

작품의 제목은 <RAMS>입니다. '숫양'이죠.

 

남성성이 강조되는 지점이 없음에도 감독은 Sheep이 아니라 Ram을 제목으로 선택하는데요. 아무래도 두 주인공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 보는 편이 타당할 겁니다. 동생이 큰 가위를 들고 발톱을 깎는 장면은 노골적이죠. 영화는 '키디'와 '구미'라는 이름을 가진 두 숫양의 이야기. 양 떼 안에 숨어있는 숫양의 이야기입니다.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을 닮은 두 형제 역시 겁이 많은 인물이죠. 40년이라는 긴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긴 시간 동안 말하지 않게 된 사연이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후반부 목장 소유권과 관련한 배경이 일부 공개되지만 갈등의 이유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죠. 갈등을 긴 시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두려움을 숨겨줄 양 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크래피는 40년간 털갈이하지 않은 이 두터운 양털을 강제로 벗기게 만드는 폭력적 계기에 불과합니다.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오래 묵은 사연과 갈등 해소의 드라마가 아닙니다. 40년씩이나 척을 지게 만드는 두려움을 직시하는 동안의 우화죠.

 

두 형제의 구분이 고작 나무 울타리라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40년의 간극에 비해 너무 느슨하거든요. 얼마든지 그 너머를 지켜볼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넘을 수 있을 만큼 연약하니까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두려움의 성격을 상징하는 아이템입니다.

 

# 4.

 

주인공 '키디'와 '구미'는 똑 닮은 모습입니다. 물론 닮았다는 말을 들으면 제게 샷건을 겨눌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만요. 조금 더 다혈질적인 형과 냉정한 동생 정도를 제외하면, 감독은 의식적으로 두 인물을 비슷하게 묘사합니다. 양에 대한 애정이라거나 양을 키우는 실력, 하얀 수염의 외모나, 욕조에 들어앉은 모습, 벌거벗은 모습 따위입니다. 전염병에 의해 양 떼를 모두 잃자 형은 평정을 잃고 추위에 떨게 되는데요. 결말에서 동생 역시 지하실에 숨겨뒀던 양 떼를 잃자 얼어붙습니다.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잘잘못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어쨌든 똑같은 숫양,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 5.

 

양 떼는 거대한 양털과 같습니다.

두 숫양의 두려움이라는 속살을 감춰주는 꺼풀이죠.

 

양 떼를 잃는다는 것은 양털이 벗겨지는 것이고 이는 곧 두려움이 폭로되는 것을 뜻합니다. 작중 가장 폭력적인 묘사는 잠자는 구미의 집 창문에 키디가 총을 갈기는 장면일 텐데요. 두 숫양에게 있어 양털을 벗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상징하는 씬이라 할 수 있겠죠. 양이 나오는 영화들은 클리셰처럼 양털 깎는 모습이나 양 스테이크 써는 모습이 나오기 마련입니다만, 이 작품에서는 연출되지 않습니다. 양 떼의 존재는 그 자체로 양털과 같으니까요. 깎을 수가 없는 것이죠.

 

형제에게 양은 재화가 아닙니다. 양을 숨긴 공간이 한스 란다를 피해 쇼사나가 숨어있던 것과 같은 지하실이라거나, 숫양을 구해 번식을 도모한다거나, 산에 풀어놓으면 살 수 있을 거라 말하는 대목 등은 교감을 넘어선 사랑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정서는 원래 가족과 나눠야 할 것을 잠시 맡겨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따뜻하다 하더라도 털이 살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허무하게 깎여나간 양털 앞에 연약한 속살을 노출하고 마는 두 숫양이 결국 서로 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서사입니다.

 

 

 

 

 

 

# 6.

 

영화의 전개는 무수히 많은 어쩔 수 없는 선택들로 귀결됩니다. 두터운 벽을 쌓는 대신 허술한 울타리를 남겨 뒀던 것도, 질투하는 와중에 형의 양을 살펴봤던 것도, 전염병이 돌지만 모든 양을 죽일 수 없었던 것도, 추위에 얼어붙은 형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도, 40년 만에 스스로 도와달라 말하는 동생의 말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도, 쓰러진 동생을 위해 옷을 벗고 껴안았던 것도 모두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양심에 따른 필연적 선택의 끝에 형제간의 화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작품의 선량한 메시지로 승화됩니다.

 

결말에서 형이 파헤친 눈발의 모습은 마치 깎아 놓은 양털처럼 보입니다. 영화 내내 따뜻하게 묘사되던 양털과 대조적이죠. 전염병에 의해 강제로 벗겨지게 된 '가짜 양털'과 달리, 결말에야 비로소 얼음으로 된 '진짜 양털'을 스스로 깎는 두 마리 숫양입니다. 

 

인간 사회의 갈등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상대에 대한 미움만큼이나, 그 미움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이라 지적합니다. 관객 각자마다 가지고 있을 두려움으로부터 회피하게 만드는 양털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양털을 벗어 놓으면 추울 테지만, 그제야 미움을 극복하고 체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양과 같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람은 양이 아니라는 희망을 함께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 7.

 

북극과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인 아이슬란드의 영화답게 멋들어진 초원과 한겨울 설원이 매력적입니다. 일련의 환경이 만드는 수평선과 평행선, 고립의 이미지 등이 인물 간의 정서와 관계와 대립을 은은하게 표현합니다. 북유럽 특유의 차분하고 심심한 분위기의 드라마입니다만, 그 속에 숨겨둔 깨알 스릴러와 코미디 역시 나름 쏠쏠합니다. 양으로 낚아 검역관의 뚝배기를 날리는 헤드샷이나, 얼어붙은 형제를 트랙터로 들어 올려 병원 앞에 던지고 가는 씬은 기대 이상으로 유쾌합니다. '그리무르 하코나르손' 감독, <램스>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