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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소피의 반례 _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

그냥_ 2022. 4. 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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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제목에 교수 나오고 강의 나오면 대부분 철학과 교수의 인생 강의입니다. 다른 학과 교수님들은 반성하세요. 당신들이 강의를 안 해서 이렇게 관객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Anesthesia』입니다.

 

 

 

 

 

# 1.

 

현실에선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슈퍼 엘리트지만 영화에서만큼은 흔해 빠진 콜림비아 대학 교수, 월터입니다. 나오는 족족 인자한 표정으로 쓸데없이 어려운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다행스럽게도 짙은 눈썹이 개성적인 샘 워터스톤이 등장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개별적 사건들의 옴니버스로 시작해 이들이 점차 연결되는 과정으로 전개됩니다. 암에 걸린 까칠한 엄마를 둔 가족이 등장합니다. 대마와 섹스를 좋아하는 헛똑똑이 잼민이가 등장합니다. 가운데 손가락이 이쁜 알코올 중독자 엄마와 교육열에 시달리는 딸들, 중국 갔다 구라 치고 금발 미녀와 바람피우는 남편이 등장합니다. 약쟁이도 친구랍시고 우쭈쭈 하는 얼굴에 칼빵 난 변호사와, 우쭈쭈를 받으면서도 정신 못 차리는 약쟁이가 등장합니다. 그들 나름의 고충과 선택과 결과와 책임이 전개되는 가운데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였던 이들이 월터 교수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서 만나는 서사죠.

 

 

 

 

 

 

# 2.

 

일련의 인물관계에서 독립된 단 한 사람,

소피입니다.

 

잔뜩 인상 찌푸리고 있기만 해도 사연이 철철 흘러 넘 칠 것만 같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합니다. 그녀는 월터 교수 아래 수학하는 철학도인 데요. 사람들은 사고다운 사고를 하지 않은 채 가벼워져만 가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어 철학이란 것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만 같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체성 불안에 고통받는 인격이죠. 그녀가 월터 교수와 나누는 대화는 그녀가 받고 있는 고통의 성격과, 그녀의 캐릭터에 투영된 현대인에 대한 비판과 불안을 친절하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만 골몰해서 어떻게든 편하게 살려고 하죠. 어디서 뭘 먹을지, 뭘 살지, 무슨 영화를 볼지. 뭘 하든 그런 식이에요. 그러면 대체 뭐가 남아요?...(중략)... 게임 같은 거죠. 저는 규칙이 뭔지 못 들었어요. 설령 들었다 해도 규칙을 따르기엔 역부족이죠. 그래서 트집이나 잡는 거예요. 악의적이게 되는 거죠. 저도 형편없는 인간이에요. 제가 그들보다 더 형편없죠. 그런 제가 너무 싫어요. 정말 외로워 죽겠어요."

 

 

 

 

 

 

# 3.

 

옴니버스들과 소피가 의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면 개별 사건들의 공통점을 소피의 기준에서 진단하는 것이 썩 효과적일 텐데요. 제 대답은, 각 옴니버스들은 소피의 고뇌를 증명하는 사례에서 출발해 반례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모두는 어리석고 유치한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소피의 표현대로라면 '어디서 뭘 먹을지 뭘 살지 무슨 영화를 볼지와 같은 남는 게 없는 것에 인생을 허비하는 바보들'이죠. 하지만 영화가 흘러감에 따라 저마다의 녹록지 않은 고민과 불안과 욕망과 이를 통할하는 철학이 있음이 표현됩니다. 문자의 형태로 학문의 형태로 정제되지 않았을 뿐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사유하는 사람들이며, 적극적으로 소통하진 못하지만 적지 않은 부분에서 서로의 삶에 개입하며 인과를 주고받고 있죠.

 

 

 

 

 

 

# 4.

 

영화는 월터 교수 피습 사건으로 감싸져 있는데요. 도입에서 월터 교수가 피습당하는 장면은 소피가 이해하는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습격당해 길 한복판에서 죽임을 당하는 곳이죠. 세상은 어둡고 음습합니다. 사람들은 말초적이고 폭력적이고 무례합니다. 분리되어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어 목소리가 닿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리죠. 집 안의 소피는 집 밖의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고통받습니다. 집 밖의 소피는 괴한이 자신을 공격하고 죽임을 당할 거라 불안해합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당장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으니 별 수 있나요. 자해라도 하는 수밖에.

 

# 5.

 

반면 영화를 건너 마지막의 피습 사건을 다시 보게 되면 처음과 달리 전혀 다른 맥락을 보게 됩니다. 꽃 가게에서의 사소한 대화에 담긴 이름이라는 것의 의미. 5달러의 선의와 50센트의 원칙. 그에 따른 잔혹한 결과와 희생.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아우구스티노를 미쳐 다 읽지 못한 마약 중독자의 구원을 말하는 유언 따위죠. 고데기를 놓은 소피가 앞으로 걸어가게 될 월터 교수가 걸어갔던 것과 같은 수십 년의 여정은 두 번째 피습의 본질을 깨닫는 것. 그래서 마지막 유언으로 몽테뉴를 인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6.

 

제목처럼 그 자체로 거대한 강의와 같습니다. 서두에 농담조로 쓸데없이 어렵다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월터는 만나는 사람마다 가슴에 깊이 남을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개중에서도 특별히 인상적은 것을 셋 정도 꼽을 수 있을 텐데요. 하나는 강단에서의 강의입니다. 학자나 지식인으로 표현된 지성인에게 전하는 강의죠. "여러분 마음의 빗장을 여세요. 서로 타인이 되지 맙시다. 서로에게 배운 것을 모른 척하지도 맙시다." 라는 말은 편의적이기도 하고 때론 비겁하기도 한 염세적 진단에 대한 경종처럼 들립니다.

 

둘은 배웅을 마치며 소피에게서 고데기를 빼앗는 모습입니다. 전반적으로 인자하고 침착한 캐릭터와 대비되는 행동이죠. 평소와 달리 말이 아닌 행동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단호한 맛이 있다 해야 할 겁니다. 내내 인자하게 다름을 존중하던 교수는 자해와 같은 방식은 틀렸다 말합니다.

 

셋은 역시나 아내에게 남기는 몽테뉴의 인용입니다.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날 찾아오길 바란다. 죽음에 무심한 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때."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자 목표여야 한다는 미셸 드 몽테뉴의 인생관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 유언마저 절반만 남겼다는 측면에서 학문적인 것을 넘어 스스로 실천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은유한다 볼 수 있을 겁니다.

 

 

 

 

 

 

# 7.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고 난 후 특별히 흥미로웠던 것은 교수를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교수를 죽이는 편이 감독의 입장에서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죠. 적당히 날씨 좋은 날 교수의 묘비 앞에 있는 가족들을 보여준 후, 그들의 뒷모습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슬픔이 묻어나긴 하지만 한결 정돈된 표정의 소피가 조용히 지켜보며 마무리되는 그림은 썩 자연스러우니까요. 하지만 팀 블레이크 넬슨을 굳이 교수를 살리고 심지어 호스를 달고 병원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영화를 정돈합니다. 감독은 이 의도적인 결말을 통해 어떤 뉘앙스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를 여운으로 곱씹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애초에 철학적인 드라마라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답답한 작품이긴 합니다. 뭐 어쩌자는 거야? 싶은 관객들도 적지 않았을 듯한데요.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영화의 원제는 Anesthesia. 치유가 아닌 마취, 구원이 아닌 무감각이니까요. 원인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최선을 찾자는 방어적인 메시지의 작품이기 때문이죠.

 

# 8.

 

적당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지면 연출이 시나리오를 충분히 살리지는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소피와 옴니버스를 분리하는 데 실패합니다. 소피와 교수의 대화를 볼 때와 각각의 옴니버스를 볼 때의 관객과의 거리가 다른 작품일 텐데요. 단호하게 분리했어야 할 플롯의 시나리오입니다만 그러지 못하다 보니 감상이 모호해지고 말았네요. 각 옴니버스를 마지막에 모아내는 응집력도 썩 빈곤합니다. 후반부로 전개되면서 작품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다는 인상이 들어야 정상입니다만 그 역시 희미합니다.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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