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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보수주의자의 이민정책 _ 불편한 동거, 아우스틸두르 키아르탄스도티르 감독

그냥_ 2022. 8.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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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어쨌든 용기 있는 작품이라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우스틸두르 키아르탄스도티르 감독,

『불편한 동거 :: Tryggð입니다.

 

 

 

 

 

# 1.

 

이민에 대한 영화입니다.

 

노골적인 한국어 제목처럼 아이슬란드인 주인공이 이민자 가족을 세입자로 들여 '동거'하는 동안 생기는 '불편한' 갈등을 풀어낸 작품이죠. 원제는 보증 혹은 보증금 정도를 뜻하는 아이슬란드어 Tryggð인데요. 신용, 부채, 상환, 위계, 위력 따위의 개념이 복합적으로 녹아있음을 문학적으로 활용한 제목이라는 면에서 한국어 제목은 다소 아쉽다 해야 할 겁니다.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다소 부족한 나라의 영화들을 수입할 때 되지도 않은 부제를 덕지덕지 달거나 반대로 너무 단편적으로 네이밍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자신이 없으면 그냥 직역을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은 바람은 있습니다. <불편한 동거>는 너무 나태하잖아요.

 

여하튼 표면적으로는 개인들 간의 갈등 서사를 다룬 드라마처럼 보입니다만, 유사한 방법론을 공유하는 여타의 영화들처럼 작중 등장인물들은 각 계층을 직접적으로 대변합니다. 주인공 '지셀라'는 아이슬란드의 원주민, 세입자 '마리솔'과 '아베바'는 이민자 일반에 대응하는 식이죠. 

 

 

 

 

 

 

# 2.

 

'지셀라'의 기자라는 직업은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의 화이트 컬러 직군을 의미합니다. 할머니의 피아노와 할아버지의 서재 등으로 반복되는 조상에 대한 코드는 원주민으로서의 정통성을 상징합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화려한 저택은 아이슬란드의 상대적 풍요를 의미하지만 그래 봐야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과거의 유산에 불과합니다. 지금을 사는 지셀라는 부채에 시달리고 있고, 이는 거시적 의미에서의 아이슬란드 사회의 부채에 대응한다 볼 수 있겠죠.

 

실직을 다루는 방식들, 이를테면 실직하는 과정이나 자신의 자리를 냉큼 차지하는 친구라거나 비굴하게 원래 직장에서 일자리를 구걸하는 대목 따위는 실업난을 포함한 일자리 위기를 노골적으로 상징합니다. 중년에 접어드는 여성임에도 가정은커녕 사회적 관계를 폭넓게 이루는 데 실패했다는 설정은 파편적으로 분리된 개인주의적 사회를 의미하는 데요. 이 역시 이후 하나둘 집 안으로 불러들여지는 이민자들과 대조되죠. 어린아이 '루나'에 대한 모성과 연민 따위를 노출하는 것은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의 불안을 일부 투사하고 있다 이해하면 적당합니다.

 

# 3.

 

'아베바'는 이민자, 그중에서도 불법체류자 계급을 대변합니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자인 청소부로 일하며 딸을 한 명 키우고 있죠.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상당히 방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불만은 있지만 반값 보증금과 커피를 쏟으며 망가진 값비싼 카펫이 볼모가 됩니다. 능숙하게 피아노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본래 제법 부유한 환경에서 교육받은 인물임을 암시하지만, 그녀가 처한 입장이 자기실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본국을 벗어나 안전한 아이슬란드로 이민 와 살고 있지만 아이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고, 이는 다시 왜곡된 소유욕으로 표현됩니다.

 

물론 모든 이민자가 불법체류자인 것은 아닙니다. '마리솔'은 합법적으로 입국한 이민자를 대변합니다. 영주권을 당당히 얻었기에 약속과 권리에 대한 민감도가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이민의 배경은 과거일 뿐 스스로 오롯한 아이슬란드 시민이라 느끼고 있는 인물이죠. 체포되어 끌려가는 아베바와 달리 저택을 나서며 자신의 화분을 챙겨나가는 모습은 그녀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바가 있습니다.

 

 

 

 

 

 

# 4.

 

주요 인물 설정을 계층 특성에 하나하나 연결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작품 전반이 매우 기계적이고 또 노골적입니다.

 

인물을 만들기보다는 각각에 부여된 역할과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설정을 1:1로 매칭 시킵니다. 사회의 작동원리를 하나하나 증명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탓에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는 제법 빈곤합니다. 사회 구조적 문제에 천착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이야기로서의 가치는 거의 발견되지 않은 채, 그저 갈등이 증폭되는 방향을 향해 일정하게 흘러갈 뿐이라 밋밋하죠. 주인공 지셀라에 최대한 가까운 시점에서 풀어내는 친절한 연출과, 배우 '엘마 리사 군나르스도티르'의 스트레스에 대한 입체적 표현 등이 단점을 일부 상쇄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냉정히 역부족이라 해야 할 겁니다.

 

로우 템포의 차갑고 건조한 톤이 감상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 뿐 아니라 연출자의 시선은 그보다 더 냉소적이라 작품은 더 깊이 침전됩니다. 딱딱한 주객 관계와 플랫 한 전개, 누구나 예측 가능한 결말까지 무난히 흘러가노라면 빈말로라도 드라마로서의 재미가 뛰어난 작품이라 말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겠죠.

 

# 5.

 

그래요. 여기까지였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구나 하고 지나갔을 텐데요. 흥미로웠던 것은 감독 스스로 주인공 '지셀라'를 위선자라 질타하는 동시에, 시간이 흐름에 따른 그녀의 이기적인 변화를 독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영화의 내용이란 아베바와 마리솔의 이탈처럼 보이지만, 보다 정확히는 지셀라가 자신의 실패를 자백하는 과정이자 그녀의 위선이 붕괴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영화 내내 지셀라는 상당히 태만하고 편의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세입자로 부주의하게 덜컥 들입니다. 친구의 우려는 가볍게 무시합니다. 나의 집처럼 지내라는 둥, 옷을 마음대로 빌려도 좋다는 둥 지키지 못할 호의를 약속합니다. 세비를 받아 지갑을 충당하거나 기사 취재거리를 삼는 등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애써 숨기며 짐짓 당위의 선택인 듯 자위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 앞에 위선은 폭로됩니다. 그녀가 제안하는 자율이란 집주인인 자신을 불편하지 않게 알아서 비위를 맞추는 한도 내에서의 자율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소란이란 와인을 마시는 동안 들을 능숙한 피아노 연주 정도를 의미하지, 취향에 맞지 않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파티 소음을 허락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제안하는 프라이버시란 자신이 불안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프라이버시에 불과합니다. 일하러 나간 아베바의 서랍을 마구잡이로 뒤지면서도 자신의 앞에서 귓속말 하나 하지 못하게 제재하는 대목은 상당히 폭압적이죠. 옷을 마음대로 빌려 입어도 좋다는 말은 '딱히 비싸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지도 않아 없어도 별 상관없지만 허락을 받은 후 네가 고맙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한다는 전제 하에서'라는 말을 숨기고 있습니다. 친구를 집에 불러도 좋다는 말은 친구를 불러도 좋다는 호의를 베푸는 자신을 소비하기 위한 빈말일 뿐 '에이... 그럴 수야 있나요.'라는 염치를 일방적으로 전제합니다.

 

지셀라는 규칙을 세울 권리를 독점합니다. 직전까지 같은 중국 요리를 나눠 먹던 세 사람임에도 규칙을 세우는 순간 두 이민자의 반대는 가볍게 압도됩니다. 규칙을 어길 경우 벌금이나 세비를 올려 받는 식의 상당히 강경한 경제적 제재가 적용됩니다. 자신이 세운 규칙이 이행되지 않자 경고를 지나 온수를 끊는다거나 심지어 내쫓겠노라 으름장을 놓는 지경까지 나아갑니다. 일련의 상황에서도 "이민자들은 집주인을 무시하고 규칙을 어긴다." 라 스스로 써 내려가는 기사는 그녀의 일방적 권력과 편협성을 동시에 상징한다 할 수 있겠죠.

 

물론 지셀라가 느끼고 있는 불안의 실체가 없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녀도 사람이니까요. 신체적으로 압도적인 외간 남자가 자신의 집 거실을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불안은 솔직한 것입니다. 파티를 가득 채운 수많은 이민자들에 의해 쫓겨나는 친구의 모습을 쓸쓸하게 내려다보는 것을 지나, 자신마저 집 밖으로 달아나 친구 집 소파에서 잠을 자는 대목은 그녀의 공포감을 지지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와 같은 이기적인 변화를 영화가 '독려'하고 있기도 하다 말씀드린 이유죠.

 

 

 

 

 

 

# 6.

 

영화 내내 쪼들리던 지셀라의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는 후반부에서 메시지는 크게 도약합니다. 부채의 이유였던 투자가 큰 수익을 거두게 되면서 경제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흔히 이민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반대편의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을 거부한다 생각합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어버린 이후의 지셀라는 다시 원래의 여유롭고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텐데요. 되려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자 적극적이고 단호하게 이민자들을 몰아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도 제법 그럴싸한 설득력으로 말이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류의 생각과 현실의 괴리를 과감하게, 때론 과격하게 전개합니다. 감독은 이민문제를 최소한의 보증금조차 담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세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냉정하게 질문합니다.

 

# 7.

 

상당히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이민자 문제를 바라보는 영화

라는 것에 이 작품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진보적 견해가 '다양한 견해 중 하나'가 아닌 '절대선'인 것처럼 합의되어버린 듯한 문화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 이런 톤의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제법 놀랍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영화 산업 지형이 어떤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동의 여하와 별개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영화 밖 현실과 어우러져 고유의 희소한 영역을 점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아우스틸두르 키아르탄스도티르 감독, <불편한 동거>였습니다.

 

# +8. 저는 이 작품을 왓챠에서 봤습니다. 적당히 담담하게 영화를 따라가고 있었는데요. 담배를 입에 물면 모자이크가 생기고, 입에서 떼면 모자이크가 사라지는 장면에서 맥이 풀려 한숨을 내쉬고 말았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네요.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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