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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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187

악녀를 보았다 ⅰ _ 레이디 맥베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 0. 뒷모습으로 소개되는 여자. 실루엣을 짓누르는 베일. 앳되고 가녀린 목소리와, 그를 제압하는 고압적인 저음의 성가. 소녀의 연약한 요구와, 그 요구를 거절보다 폭압적인 명령으로 제압하는 남자. 발가벗겨진 소녀를 덩그러니 세워둔 채 돌아 눕는 남편. 이를 담아내는 고전적이고 고정적인 오브제들과, 정제된 채도의 색감과, 이질적인 정도로 옆으로 길게 벌어진 화면. 통상의 긴 화면비는 개방감, 안정감, 수평적 운동성, 평등, 균일감 따위를 의미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는 '수평성의 강조'라기보다는 '수직성의 통제', 즉 위아래로 잘려나간 화면이 인물을 짓누르며 지배하고 있는 공간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명령'과 '규율'과 '제약'과 이를 둘러싼 '균열'과 '파괴'의 서사임을 유추..

Film/Drama 2020.04.01

명콤비의 커튼콜 _ 라디오 스타, 이준익 감독

# 0. 2006년에 소환된 1990년대 영화입니다.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 설계와, 무던하고 진중한 관계 설정, 상황을 풀어나가는 단단하고 온건한 방식, 보수적 가치 위에 세워진 관계 중심의 주제 의식과, 다소 연극적 색채가 묻어나는 표현 등 영화 전반에 걸쳐 , , 과 같은 90년대 명작 드라마 영화들의 분위기와 냄새가 짙게 묻어나기 때문이죠.        '이준익' 감독,『라디오 스타 :: Radio Star』입니다.     # 1. 공식적으로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기에 이를 존중해 리뷰의 카테고리 역시 드라마로 잡긴 했습니다만, 플롯만 보자면 버디무비라기보다는 로맨스에 더 가깝습니다. 삯바느질하는 조강지처(안성기)와 헛바람 든 철없는 남편(박중훈), 지고지순한 내조 끝에 남편이 성공한 후, 바람이 날..

Film/Drama 2020.03.30

느낌적인 느낌 _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

# 0. 눈. 일본. 달. 편지. 엄마. 딸. 사진. 여행. 고양이. 담배. 바텐더. 사랑. 이별. 처연하고 창백한 톤으로 서정성을 한껏 강조해 사랑이란 특별한 감정을 감성적이고 감각적이고 문학적인 묘사와 함께 관객과 교감하고 나누는 멜로드라마 영화. 코로나와 함께하는 차분하고 고요한 주말 오후의 오갱끼데쓰까군요. '임대형' 감독, 『윤희에게 :: Moonlit Winter』입니다. # 1. 보험을 깔고 갈까요. 영화 최고의 장점, 김희애가 나옵니다. 주연 배우가 다양한 상황에서의 구분된 정서를 섬세하게 다듬어 표현합니다. 막말로 티켓값은 배우 표정만으로도 거의 대부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김소혜, 성유빈의 싱그러움이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게 합니다. 역시 젊은 게 좋아요. 주제도 선합니다. 시대적 아..

Film/Drama 2020.03.22

캔디드 캔디드 샷 _ 캔디드 샷, 강민지 감독

# 0. 강렬한 영화입니다. 과감한 영화입니다. 비단 사진뿐 아니라 사회적인 무언가를 관찰하고 다루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필연적으로 거쳐갈 수밖에 없을, 자신과 창작물의 존재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일말의 은유 없이 직설적인 방법으로 다룹니다. 곧게 뻗어나가는 활시위처럼 감독은 과감하고 솔직하고 단호하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작품을 보는가. '강민지' 감독, 『캔디드 샷 :: Candid Shot』입니다. # 1. 캔디드 샷 [Candid Shot] 피사被寫의 인물이 포즈pose를 취하지 않거나 본인이 사진을 찍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한 사진. # 2. 이 영화는 사진작가가 피사체를 찍는 캔디드 샷이자, 캔디드 샷을 찍는 사진작가에 대한 캔디..

Film/Drama 2020.03.04

가여워라 _ 위로, 정유정 감독

# 0. 솔직히 유치합니다. 일반적인 영화가 아니라 저예산 독립영화의 기준으로 보려 해도 이 영화는 못 만들었습니다. 학생 작품이라는 걸 감안해 기준을 더욱 낮춘다 해도 못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유정' 감독, 『위로』입니다. # 1. 연출도 연기도 대사도 모두 손발이 오그라들게 합니다. 유독 항마력이 없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이구야' 하며 눈을 감게 되는 순간이 몇 분 되지 않는 런타임에도 쉴 새 없이 포진해 있습니다. 마지막에 깔리는 음악에서는 페이탈리티가 터집니다. '어후...' 하고 한숨을 푹 쉬게 만듭니다. 단 1초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만든 것만 같은 특유의 집착이 척추를 뒤틀리게 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너무 동떨어진 진지한 제목과, 포스터에 제목보다..

Film/Drama 2020.02.15

너무 어린 나이니까요 _ 손님, 윤가은 감독

# 0. 어른들의 사정이란 핑계로 간과되는 사람들의 긴장과 불안과 상처와 고통, 그 가운데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본질적인 순수성을 탁월한 감각으로 포착합니다. 과 에서 보여준 낮은 눈높이를 묘사하는 세심함은 이미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윤가은 감독,『손님 :: Guest』 입니다.     # 1. 6살 배기 여자 아이, 9살 배기 남자아이, 교복 입은 소녀 그리고 아빠입니다. 순수성의 기준에서 명확한 위계를 가지는 인물 간의 입장과 관점의 대조가 다각적으로 펼쳐지며 단편적 상황 안에서 최대한의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부한 긴장감은 장르의 기능적 목적 뿐 아니라 주제 의식에도 충실히 기여합니다. 화가 치민 소녀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와, 음료를 권하는 아이에게 꺼지라 말하며 잦..

Film/Drama 2020.01.10

고독의 書 _ 토니 타키타니, 이치카와 준 감독

# 0. 한 줌의 수분도 없는 모래장. 모래의 바다에서 태어난 배. 그 배를 홀로 만드는 아이. 아이를 스쳐 지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걸음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아들. 화사한 꽃들 가운데 꽃잎 한 장만 공들여 그려진 그림. 그 한 장을 바라보고 주목하고 관찰하는 아이. 의아한 그림에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과, 선생님이 자신을 왜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 늦은 저녁 홀로 타는 자전거, 쓰러질 듯 위태롭게 하지만 자유롭게 자전거를 모는 아이. ‘토니 타키타니’. ‘토니 타키타니’의 본명은 정말로 ‘토니 타키타니’입니다. '이치카와 준' 감독, 『토니 타키타니 :: トニー滝谷』입니다. # 1. 까슬한 책장을 조심스레 넘기는 것만 같은 영화입니다. 건조해 만지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찢어질 ..

Film/Drama 2020.01.08

빛과 노름 _ 수요 기도회, 김인선 감독

# 0. 기도회와 화투판과 마스크팩입니다. 화사한 햇살과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중년 여성과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앳된 얼굴의 엄마입니다.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고 도망가는 여자. 능청스럽게 말을 걸며 쫓아가는 남녀. 화장실 핑계로 숨어든 애기 엄마의 집과 신앙이 아니라 용돈벌이를 이유로 소개되는 기도회. 아! 이거 도박장이군요. '김인선' 감독, 『수요 기도회』입니다. # 1. 아무래도 도망가던 여자는 기도회로 가장 된 도박장을 운영하는 장주인 듯합니다. 홀로 가정을 꾸리는 처지가 딱한 애기 엄마를 업장의 일꾼으로 써 주려는 듯하군요. 쫓아가는 남녀는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경찰 정도로 보면 자연스러울 것 같구요. 우연한 계기로 도박장에 발을 들이게 된 순수한 애기 엄마가 도박에 점점 빠져들게 되고, ..

Film/Drama 2020.01.06

해부학 실험실 _ 비브르 사 비, 장 뤽 고다르 감독

# 0. 실험적이고 과감한 기법이 영화 전반을 지배합니다. 자유를 사랑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 무기력하게 몰락해가는 여인 ‘나나’의 삶이라는 핵심 서사보다 감독의 철학과 색체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뭐랄까요. 이를테면 영화적 기법들을 전시해 놓은 듯한 인상이랄까요. 지금의 기준에선 다소 작위적이고 촌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현대 영화들의 체계적으로 훈련된 표현들의 유려함에 비하면 당시의 기법이란 아직 제시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명하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장 뤽 고다르’ 감독, 『비브르 사 비 :: Vivre sa vie』입니다. # 1.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기법과 효과가 1 대 1로 매칭 되며 그 작용 관계에 대해 진중하게 고찰합니다. 마치 영화..

Film/Drama 2020.01.04

신발 튀김 _ 콩나물, 윤가은 감독

# 0. 화면은 정갈하니 좋습니다만 이야기의 완성도는 글쎄요. 솔직히 별로입니다. 아이의 모험에 자연스러움이라곤 없습니다. 발로 뛰어 아이들의 하루를 취재하고 관찰한 것을 엮었다기보다는, 어른인 감독이 테이블에 앉아 상상한 후 무신경하게 이어 놓은 느낌에 훨씬 가깝습니다. 인과는 완전히 박살 나있고 모든 상황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가며 감독의 의도에 편리하게 복무하고 있죠. 앞뒤가 맞는 대목이 없다 보니 인물의 설득력 역시 망가집니다. 관객은 아이를 보고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아이의 하루를 상상한 어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요. '윤가은' 감독, 『콩나물 :: Sprout』 입니다. # 1. 영화가 시작되기 위해 아이는 심부름을 나섭니다. 모험 같아 보이기 위해 오토바이가 한대 지나갑..

Film/Drama 2019.12.08

밤의 우유니 사막 ⅱ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밤의 우유니 사막 ⅰ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 0.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떠올렸습니다. 낮의 그것도 아닌 야경이 깊게 드리운 우유니 사막 말이죠. 수분이 메마른 건조하고 morgosound.tistory.com # 6. 세 번째 파트는 '블랙'입니다. 파트의 주제는 '순응'이죠. 수줍음이 많던 샤이론은 마약상이 되어 있지만 타락이나 절망감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성인이 된 샤이론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 보다 정확히는 '복무'하는 인간이 되어 있다는 데 더 가깝습니다. 터렐을 가격한 데 대한 처분을 받고 난 후 샤이론은 멘토 후안과 같은 건장한 남자가 되어 있습니다. 후안 대신 대모 테레사를 아들처럼 듬직하게 지키고 있죠. 엄마 폴..

Film/Drama 2019.12.02

밤의 우유니 사막 ⅰ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 0.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떠올렸습니다. 낮의 그것도 아닌 야경이 깊게 드리운 우유니 사막 말이죠. 수분이 메마른 건조하고 삭막한 사막과 같은 소년의 삶에 쏟아질 듯 슬픔의 비가 내리면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온 세상은 푸르른 달빛에 물들게 됩니다. 별이 빛나는 바다에 뒤덮인 사막 한가운데 외로이 서 있는 소년의 숨 막힐 듯한 고독감과 쓸쓸함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군요. '배리 젠킨스' 감독, 『문라이트 :: Moonlight』입니다. # 1. 영화는 세 파트의 옴니버스 구조를 가집니다. 각각 소년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와 성년기에 대응되죠. 파트의 제목은 '리틀', '샤이론', '블랙'입니다. 서사는 '리틀'로 불리던 소년 '샤이론'이..

Film/Drama 2019.12.01

천재감독이 빙의물을 만들면 _ 퍼스트맨, 데미안 샤젤 감독

# 1. 좋아하는 영화감독 있으신가요? 없으시다구요? 저런.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가뭄에 콩 나듯 영화 얘기를 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 배우가 아니라 감독, 그것도 외국 감독 이름을 몇 개 얘기하면 아는 게 없어도 뭔가 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이름 몇 개 붕권마냥 질러두고 이후엔 다 안다는 듯이 팔짱 끼고 고개만 끄떡이면 지식인의 완성이죠. 메모해 두세요. '존 도'라는 희대의 또라이를 만든 '데이빗 핀처'나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해서 목소리만 뽑아 쓰고 버린 her의 '스파이크 존즈', 주드로, 메이슨 총리, 레아 세두, 볼드모트, 에드워드 노턴 같은 배우들을 불러다 단역으로 쓰면서 주연은 웬 처음 보는 과테말라계 미국 배우에게 맡긴 '웨스 앤더슨', 사람 못 죽여서 안달 난 '쿠엔틴 ..

Film/Drama 2019.10.03

꼭. 이렇게. 어려워야만. 속이 후련했냐! _ 아니마,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 0. 미술관에 갈 때가 있습니다. 친구 없는 찐따가 혼자 다니면서 쪽팔리지 않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죠. 쥐뿔 아는 게 없더라도 온 바닥청소 다하고 다닐 것만 같은 롱코트와 와인색 스웨터에 뿔테 안경을 끼고 한 손엔 스마트폰, 한 손엔 전시 브로셔를 든 채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으면 손쉽게 지적인 느낌의 쿨한 인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꿀팁이니 메모해 두세요. 요즘엔 워낙 갤러리도 많고 양질의 전시도 많다 보니 사진전이나 고전 미술, 조형예술, 행위예술 등 다양한 전시들이 걸리긴 합니다만, 그래도 역시나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건 만만한 현대미술입니다. 현대미술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2/3 지점 즈음 후미진 곳에 영상을 무한 반복해둔 암실 같은 게 곧잘 있는데요. 그런 모퉁이진 곳..

Film/Drama 2019.09.24

삶이란 무겁고 허무한 것 _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감독

# 0. '소영'은 박카스 할머니입니다. 박카스이면서 할머니죠. 곤궁하고 비굴하고 비참한 창부로서의 정체성과, 넘치는 나이가 되어버린 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중첩된 사람입니다. 각 정체성이 분리되어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겹쳐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죠. 소영이 민호의 고사리 손을 잡고 자신을 사줄 노인들을 찾는 장면. 손님과 일을 치르기 전 아이를 여관 프런트에 맡기는 장면은 이 인물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마냥 냉소적일 것만 같은 세간의 선입견과는 달리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복잡 미묘한 내면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도덕성이라는 기준만으로 진단하고 결정지은 후 방치한 삶들 안에도 일반과 다르지 않은 나름의 깊이가 있었음을 상기하게 합니다. 감독은 박카..

Film/Drama 2019.09.18

단편 몰아보기 _ 기대 / 바빠서 / 한수탕 / 여름의 소리

# 0. 혹자는 예술의 이유를 '언어의 불완전성을 메우기 위해'라 하더군요. 절묘한 말입니다. 언어가 모든 정서나 개념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예술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난임 부부의 오래도록 기다렸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평생 해오던 일을 마무리 짓는 순간, 죽일 듯 미웠던 사람의 비참한 마지막을 지켜보는 순간, 시한부 판정을 받는 어떤 이의 하루. 우린 그런 순간들을 상상하고 서술해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의 특별한 정서들을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박은정' 감독, 『기대』입니다. # 1. 국어사전은 '기대감'을 '어떤 일이나 대상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기다림'이라 정의합니다. 담백하고 정확한 것 같긴 합니다만 우리가 통상 이해..

Film/Drama 2019.09.16

팔자 좋네 _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

# 0. 팔자 좋은 영화입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건지 요리사를 준비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늙은이 '혜원'이나, 수틀린다고 회사 때려치우고 고향 내려가 번듯한 과수원 사장님이 된 '재하'나, 지 승질 못 이기고 부장 머리에 탬버린을 내려쳐도 별 탈 없는 '은숙' 모두 팔자가 좋습니다. 하나뿐인 자식 내팽개치고 훌쩍 집 나가 버린 엄마도, 반찬 몇 개 던져주고 농사일에 조카를 부려먹는 고모도 모두 팔자 좋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팔자가 좋은 사람은 감독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은 감독이거든요. 임순례 감독, 『리틀 포레스트 :: Little Forest』 입니다. # 1. 살다보면 몸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지갑이 빈곤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야윌 수도 시간에 쫓길 수도 있습니..

Film/Drama 2019.09.05

엄마의 이야기 _ 당신의 부탁, 이동은 감독

# 0. 운영 중인 학원은 접었습니다. 사별한 남편은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평생 잔소리를 쏟아내던 엄마에게 가슴 아픈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런 '효진'이 죽은 남편의 하나뿐인 혈육을 거두기로 합니다. 그녀는 16살 아들 '종욱'을 빌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뭔가를 선택하는 건 포기하는 거야. 그리고 포기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야. 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느 한쪽은 반드시 포기해야 해." '이동은' 감독, 『당신의 부탁 :: Mothers』입니다. # 1. 살다 보면 아프지만 일을 해야만 하는 날들이 더러 있죠. 현실은 마음 같지 않고 숨만 쉬어도 지치고 세상에 홀로 남은 듯 버겁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그런 날. 영화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

Film/Drama 2019.08.28

소년의 앞날에 축복을 _ 창 너머 춤을, 랄프 마치오 감독

# 0. 할머니 손에 맡겨진 아이는 창 너머의 댄서를 봅니다. 댄서의 유려한 자태를 동경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움직임을 사랑합니다. 보지 못하는 날이면 슬픔에 잠깁니다. 슬퍼할 때면 함께 가슴 아파합니다.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눈빛을 보고 싶어 합니다. 댄서와의 춤을 꿈꾸며 좁은 방 음악도 없이 홀로 춤을 춥니다. 댄서를 보고 난 후 아이는 그 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랑과 동경과 질투와 슬픔과 분노와 호기심과 꿈. 이 모든 정서들의 총합을 한마디로 정의하라 한다면 '성장'이라 할 수 있겠죠. 네. 이 영화는 부모의 그늘에서 보살핌 받던 아이가 소년으로 성장하는 영화입니다. '랄프 마치오' 감독, 『창 너머 춤을 :: Across Grace Alley』 입니다. # 1. 곁눈질로 엿볼..

Film/Drama 2019.08.17

무지개는 이미 아이의 손에 _ 레인보우, 나게쉬 꾸꾸누르 감독

# 0. 너의 성지엔 언제나 네 개의 등이 빛나네. 이제 내가 다섯 번째 등으로 모습을 드러냈도다. 다섯 번째 등을 밝히러 내가 왔도다. 빨간 가운의 신이여. 신이시여, 신드와 세환의 친구이자 왕이여. 내 안에 숨 쉬는 신이시여, 영광 받으소서. '나게쉬 꾸꾸누르' 감독, 『레인보우 :: Rainbow, Dhanak』입니다. # 1. 가난으로 눈을 잃은 소년과, 동생의 눈을 뜨게 해 주고픈 누나가 무지개를 찾아 나서는 영화입니다. 런타임 내내 화면 너머 기분 좋은 순풍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에 빠져듭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와 같은 여유롭고 시원한 순풍이 아니라, 추운 겨울 마음까지 녹여줄 것만 같은 따뜻한 훈풍 말이죠. 기존의 인도하면 떠오를 법한 불편하고 지저분하고 비루한 이미지가 아니라 여..

Film/Drama 2019.07.10

미소를 잃은 사람들 ⅱ _ 소공녀, 전고운 감독

미소를 잃은 사람들 ⅰ _ 소공녀, 전고운 감독 # 0. 화려한 싱글라이프와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의 등장입니다. 배우 이솜의 신비로운 마스크와 앳된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끗희끗한 흰머리와 전동 드릴에 걸린 진한 분홍색 청소솔이 morgosound.tistory.com # 8. 힘든 사람들만을 조명하게 되면 자칫 경쟁에서 패배한 개인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인물들을 과장된 문법으로 표현함으로써 어떤 군상의 표상처럼 다루고자 하는 작품의 기조를 생각할 때 곤란한 일이죠. 감독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전직 기타리스트, '정미'의 집으로 보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디 부자는 늘 행복할 수 있는지 지켜보자는 거죠. 정미와의 첫 대화에서부터..

Film/Drama 2019.05.20

미소를 잃은 사람들 ⅰ _ 소공녀, 전고운 감독

# 0. 화려한 싱글라이프와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의 등장입니다. 배우 이솜의 신비로운 마스크와 앳된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끗희끗한 흰머리와 전동 드릴에 걸린 진한 분홍색 청소솔이 도드라지는군요. 이목을 끄는 인상적인 오프닝입니다. 미소가 청소하는 곳은 친구의 집이었네요. 커피 한잔 하자는 말을 냉정하게 거절당하면서도 천연덕스레 쌀을 빌려달라 말하는 미소. 한심한 듯 쳐다보는 친구의 시선과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의 곤란함으로 전혀 인지하지 않는 미소의 대사와 표정에서 굉장한 캐릭터성을 읽게 됩니다. 친구에게 빌린 (이라 쓰고 동냥받은 이라 읽을) 쌀을 허술하게 비둘기에게 모이로 주고서 별 수 없다는 듯 고즈넉한 바에서 담배에 위스키를 즐기는 여기까지 3분. 감독은 독특하고 독보적인 캐릭터를 멋지게..

Film/Drama 2019.05.13

청주대... 영화학과... 메모... _ 어떤 하루, 정가영/전선호/최진혁 감독

# 0.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녀 '영주', 떠나가 버린 젊은 날을 동경하는 중년의 소녀 '로라', 처절한 현실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가장 '연희'가 그들 나름의 어떤 하루를 보냅니다. 청주대학교 영화학과에서 만들어낸 풋풋하고 생동감 넘치는 단편 옴니버스 영화라. 5월을 시작하기에 딱이군요. '정가영', '전선호', '최진혁' 감독, 『어떤 하루』 입니다. 가을. 그리고 단기. 그리고 방학. [가을 단기 방학. 정가영 감독] # 1.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녀. '영주'의 이야기입니다. 소녀의 하루는 특별히 비극적이거나 특별히 위험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괴롭히는 건 그저 '무심함'이죠. 친구들은 연주가 엄마와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모릅니다. 절친한 친구도 연주가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고 있다는 건 ..

Film/Drama 2019.05.03

선함을 충전하고 싶을 때 _ 브루스 올마이티, 톰 새디악 감독

# 0. 최종 집계 17만 57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희대의 망작 의 광풍에 휩쓸린 관객의 수죠. 이렇게 빨리 VOD로 넘어갈 줄 알았더라면 영화관에 가서 보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드는군요. 보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상이 심각합니다. 영화를 보며 얻은 내상, 리뷰하며 곱씹어 보느라 다시 얻은 내상, 그렇게 쓴 엄복동 리뷰가 제 모든 포스팅 중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거뒀다는 사실이 준 내상이라는 개노답 3형제의 크리티컬 한 다단 히트의 여파는 쉬이 가시질 않습니다. 하... 저는 지금껏 무엇 때문에 영화들을 리뷰를 했던 걸까요. 엄복동의 억지 눈웃음과 정석원의 탄탄한 엉덩이에 가위가 눌리는 나날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구가 평평하다 믿는 멍청이들의 다큐멘터리와, 이세계 로맨스물 팝콘무비,..

Film/Drama 2019.03.18

돈과 시간을 아끼세요. ⅰ _ 자전차왕 엄복동, 김유성 감독

# 0. 추위 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 겨울철이면 평소만큼 영화관을 자주 찾지 않습니다만 이 영화만큼은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습니다. 올해는 요놈이네요. 스크린 쿼터제가 필요한 것일까라는 비판에 대한 강력한 근거. 여신 김러브 최악의 흑역사 『누가 그녀와 잤을까』 감독 연출. 제대로 된 필모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월드 스타 주연배우. 불순한 의도가 가득한 개봉 타이밍. 애저녁에 뒤져버린 개연성과 폭력적 국뽕과 억지 신파의 환장하는 콜라보. 공중분해된 투자자들의 멘탈과 관객의 어처구니. 이 모든 것들이 총 동원된 매년 분기마다 꼬박꼬박 등장하는 한국영화의 '똥'들. '김유성' 감독, 『자전차왕 엄복동 :: Race to Freedom : Um Bok Dong』 입니다. # 1. 사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Film/Drama 2019.03.01

단편영화를 권하는 이유 _ 민우씨 오는 날, 강제규 감독

# 0. 아직도 나는 당신의 모습 보지 못하고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내 집 문 앞을 지나시는 당신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강제규' 감독, 『민우씨 오는 날 :: Awaiting』 입니다. # 1. 쉽지 않네요. 리뷰마다 없는 글재주 짜내느라 나름의 고충이 있습니다만, 이 작품은 평소의 그것보다 조금 더 힘든 느낌입니다. 단편영화들은 아무래도 간결한 이야기 속에 선명한 메시지를 담는 작품들이 많은데요. 생각나는 얘기를 함부로 했다가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과 이 이야기에 얽힌 삶을 사시는 분들께 폐가 될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죠.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가급적 글을 읽지 마시고 영화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이 영화는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보아도 아깝지 않은 완..

Film/Drama 2019.02.08

렌타~ 네코! _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 0. 렌타~~~~~~~ 네코! 렌타~~~~~~~ 네코! 네코, 네코! 외로운→ 사람에게↗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렌타~~~~~~~ 네코! 렌타~~~~~~~ 네코! 네코, 네코! 외로운→ 사람에게↗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 レンタネコ』 입니다. # 1. 벌써 1월도 다 지나고 음력설이 찾아왔네요. 글을 쓰는 지금은 연휴의 시작인 토요일입니다만, 올라가는 월요일이 되면 연휴도 반환점을 넘어 지나가겠군요. 언제나처럼 한 것 없이 시간은 참 빠릅니다. 후다닥 첫 달이 지나기 무섭게 티비에선 특선영화 광고를 하고 예능에선 조카들에게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겠죠. 커뮤니티에선 불편한 자리에 대한 취준생들의 투덜거림과 모처럼만..

Film/Drama 2019.02.04

20% 부족할 때 _ 아메리카 타운, 전수일 감독

# 0. 미군부대 근처에 만들어진 기지촌, 그곳에서 자의 반 타의 반의 성매매를 했던 소위 '양공주'들과 그런 양공주에게 첫사랑을 느낀 사진관 소년의 비극입니다. 오프닝의 콘돔이 버려진 차갑고 건조한 벌판, 그 위를 가르는 찢어질 듯한 비행기 소리처럼 일관되게 삭막하고 투박합니다. 모든 순간에 온기도 정서도 없습니다. 다들 나름의 절실함을 살지만 그들 모두는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만 알았던 시대,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만 알았던 공간을 다룹니다. 아이템은 매력적이죠. 아이템만 매력적이란 게 문제지만요. 전수일 감독, 『아메리카 타운 :: America Town』 입니다. # 1. 냉정히 만족스러운 점수를 주진 못할 것 같습니다.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배우들의 억양이나 대사처리에..

Film/Drama 2018.12.18

언젠가 4월이었을 당신에게 _ 4월 이야기, 이와이 슌지 감독

# 0. 일본 영화 좋아하시나요?        이와이 슌지 감독,『4월 이야기 :: 四月物語』 입니다.     # 1. 일본 영화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뇨, 애니메 말구요. 아뇨, 특촬물 말구요. 이나 나 혹은 나 나 같은 영화들 말이죠. 글쎄요, 저는 말보다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약간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슬쩍 사선으로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사람. 피식 웃는 입꼬리는 한쪽만 가볍게 올라가고, 마음속 깊이 쌓인 무언가를 숨에 담아 긴 호흡에 내보내는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 언제든 자리를 뜰 수 있다는 듯 어설피 걸터앉은 엉덩이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한가로운 오후 하늘을 올려다보며 떠나가 버렸지만 남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한 추억들을 담담히 곱씹는 이의 모습. 그런..

Film/Drama 2018.12.13

역설로 빚은 잔혹동화 _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감독

# 0. 빈방이 있습니다. 각진 빈방을 노려보던 감독은 창문과 문이 거꾸로 매달리게끔 방을 뒤집습니다. 침대를 거꾸로 천장에 붙입니다. 협탁과 수납장 역시 천장에 뒤집어 붙입니다. 책상도 의자도 붙입니다. 이불과 배게, 카펫, 거울, 그 외 사소한 장식 모두 빠짐없이 거꾸로 매답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앨리스를 방에 들여보냅니다. 눈 앞에 모든 것이 뒤집힌 세상이 보입니다. 어지럽네요. 다행히 감독의 생각을 이해한 성실한 주인공은 스스로의 몸도 천장에 거꾸로 매답니다. 그랬더니 어머나. 모든 것이 뒤집힌 세상이 잔인하리만치 똑바르게 보이지 뭐예요. '안국진' 감독,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 Alice In Earnestland』 입니다. # 1. 모든 것을 뒤집어 세상을 적나라하게 비추려 드는 ..

Film/Drama 2018.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