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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단편 몰아보기 _ 기대 / 바빠서 / 한수탕 / 여름의 소리

그냥_ 2019. 9.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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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혹자는 예술의 이유를 '언어의 불완전성을 메우기 위해'라 하더군요. 절묘한 말입니다. 언어가 모든 정서나 개념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예술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난임 부부의 오래도록 기다렸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평생 해오던 일을 마무리 짓는 순간, 죽일 듯 미웠던 사람의 비참한 마지막을 지켜보는 순간, 시한부 판정을 받는 어떤 이의 하루. 우린 그런 순간들을 상상하고 서술해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의 특별한 정서들을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박은정' 감독,

『기대』입니다.

 

 

# 1.

 

국어사전은 '기대감'을 '어떤 일이나 대상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기다림'이라 정의합니다. 담백하고 정확한 것 같긴 합니다만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기대림이라는 정서가 오로지 '바라고 기다리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몰아보기의 첫 번째 단편은 『기대』입니다. '박은정' 감독은 기대감이라는 정서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풀어낼까요.

 

아이는 자기 몸만 한 택배 상자 하나를 끙끙대며 옮깁니다. 내용물과 상관없이 택배 상자를 발견하고서의 막연한 설레임,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놓았을 때의 엄마의 밝은 표정. 외출 중인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의 기다림과, 이후 아마도 받게 될 세상 달콤한 칭찬. 이 모든 것들에 충분히 들떠 있으면서, 동시에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없이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이가 흘리는 땀 위로 사소한 뿌듯함과 사소한 고양감과 사소한 진지함과 그보단 덜 사소한 허무함과 쓸쓸함이, 기다림이라는 정서의 이면에 숨어 있음을 감독은 포착합니다.

 

# 2.

 

주인공으로 아이를 활용한 것은 정서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좋은 설정으로 보입니다. 어떤 거창한 일을 시키는 대신, 고작 택배 상자를 하나 옮기게 한 것 역시 감독의 절제력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하루가 채 저물기도 전에 들떠서 쓴 그림일기와, 늦게 온 엄마를 맞으러 한걸음에 달려 나가는 아이의 모습을 충분히 감각적입니다. 화면을 집어삼킬 듯 크게 씌여진 제목은, 역설적으로 되려 이 상황을 작고 소박한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여러모로 습작으로서 나쁘지 않군요.

 

다만, 런타임이 고작 5분여밖에 안되는데 마지막 1분씩이나 되는 시간을 꼬라박아 만든 엔딩 크레딧과, 두 번이나 반복되는 제목에서 쓸데없이 거창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특히나 일상적 정서를 담담하고 담백하게 다루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생각할 땐 더더욱 말이죠. 관객들에게 기분 좋은 여운을 더 남겨줬어도 좋았을 텐데요. 살짝 아쉽군요.

 

 

 

 

 

 

'옥대훈' 감독,

『바빠서』입니다.

 

 

# 1.

 

바빠서라는 핑계로 아픈 부모를 찾아뵈는 대신 음성메시지를 남긴 자식들의 무심함을 이야기하는 단편입니다. 앞선 『기대』가 정서적인 영화라면 이 작품은 사회비판적인 영화라 할 수 있겠군요.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을 말하자면. 솔직히 간호사가 영화에 너무 개입을 하는 게 별롭니다. 관객이 느낄 지점들을 간호사가 먼저 선수 치는 느낌이 강합니다. 영화를 관객 스스로 보고 느끼는 게 아니라, 상황을 대신 보고 대신 판단하는 간호사를 다시 관객이 관람하는 것 같습니다. 불쾌해도 내가 불쾌해야지, 왜 간호사가 먼저 불쾌해하는 건가요. '좋은 병원'이라는 아들의 말에 이어 붙이는 '비싼 병원이겠죠.'라는 말들처럼, 뻔한 함의를 굳이 반복해 설명해주는 대목들은 사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주제의식 이전에, 영화라는 장르의 실패죠.

 

허울뿐인 변명들의 공허함과 다음 번을 기계적으로 내뱉는 핑계의 비루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연출은 최대한 그에 걸맞게 건조했어도 좋았을 겁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꽃 연출은 무신경하고 관습적이며, 번잡한 카메라 구도 역시 쓸데없이 어지럽군요. 이유 모를 발랄한 화면의 질감도 주제와 따로 논다는 인상입니다. 특히나 자식들의 변명이 '특별히' 나쁜 자식들의 '특별히'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일상적인 것이었다는 걸 감안할 때, 그런 일상성을 연출이 충분히 뒷받침해줬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특별하지는 않아도 가치 있는 것이란 점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들려주는 음성메시지를 선택했다는 것도 나름 참신합니다. 자녀 역을 맡은 두 배우의 대사 모두, 듣는 데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잘 매만져져 있습니다. 감독이 좋은 작가라는 생각은 듭니다. 다만, 분명한 건 관객들은 사회학자의 칼럼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싶은 거란 거죠. 아쉬운 건 아쉬운 겁니다. 

 

 

 

 

 

 

'박상균' 감독,

『한수탕』입니다.

 

 

# 1.

 

소담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멋스러운 단편입니다. 낡고 오래된 목욕탕의 습하면서 텅 빈 듯한 특유의 공간감과 창백한 백열등이 주는 서정적인 느낌이 좋습니다. 배경을 보는 순간부터 이후에 어지간히 엉망만 아니라면 이 공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싶은 화면입니다.

 

늦은 밤 문 닫기 직전의 목욕탕. 젊은 세신사에게 한 노신사가 손님으로 찾아옵니다. 두 배우의 대화에 자연스러운 맛이 없습니다. 마지막 손님은 무슨 마사지를 해준다느니, 공짜로 받는다느니 하는 억지스러운 말들에 이물감이 심하게 듭니다. 그리고 그런 세신사의 작위적인 대사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노인의 태도도 납득하기 힘들죠. 뭐지? 뭐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아!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감독은 짧은 런타임과 제작 환경 안에서 더없이 효과적인 서사를 풀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직전까지의 누적된 이물감은 세신사의 전화 한 통으로 모두 해갈됩니다. 두 배우가 얼마나 난해한 연기를 해야 했던 건지 이해하게 됩니다. 내막을 들은 후 두 인물의 대화를 곱씹어가는 과정에서 영화의 볼륨은 곱절로 부풀어 오릅니다. 주인공의 처지를 특별히 슬프거나 비극적인 것으로 그리기보단 지극히 한국적인 느낌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인상적입니다. 조심스러운 주제를 오래 묵은 청국장처럼 가정적인 따뜻한 분위기로 담아낼 생각을 했다는 게 대단합니다. 이 정서를 대학생이 포착했다구요? 감독은 인생 2회 차인 걸까요?

 

 

 

 

 

 

'김현정' 감독,

『여름의 소리』 입니다.

 

 

# 1.

 

여름이란 이런 거라는 걸 보여주는 듯한 분위기와 정취가 인상적입니다. 장소를 고르는 눈과 공간을 어떤 구도로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센스가 돋보입니다. 주경과 야경의 차이를 이해하고 각자 차별화된 방식으로 담아내는 것도 좋습니다. 만, 이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데. 어쩌지? 아, 그냥 대충 '두 어린 학생들이 교감하고 소통하는 과정' 정도로 풀면 되겠어? 여름, 청춘 좋잖아? 라는 식의 나이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서사와 분위기가 서로를 돕고 있다는 인상보다는 서사가 분위기에 지배된 채 복무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남자 애가 벙어린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소리를 낼 수 있는 데 말을 하는 게 힘든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말도 할 수 있는 데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로 말을 아예 안 한다는 걸 나더러 믿으라구요? 교복 입은 아이들이 밑도 끝도 없이 길 한복판에 방치되어 있다는 걸 나더러 믿으라구요? 학교 선생의 통솔에서 벗어나 방치된 아이들이 무턱대고 걸어간다구요? 그래요, 초등학생 꼬꼬마들도 아니고 걸어갈 수야 있다 치죠. 근데 중천에 떠있던 해가 떨어져 새까맣게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선생이 찾으러도 안 왔다는 걸 나더러 믿으라구요? 뭐? 밤이 어두워서 무섭다는 애가 한다는 행동이 왔던 길을 '혼자' 되돌아가는 거라고? 야, 그게 더 무섭지 않겠냐??

 

영화가 묘사하는 여름은 싱그럽고 풋풋하고 좋습니다. 건강하고 뭐 밝고 그런 느낌적인 느낌은 충만합니다. 다만, 그래서 뭘 어쩌라고?라는 질문에 영화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글쎄요. 서사없이 여름의 느낌만 느낄 거였다면 저라면 영화를 보는 대신 사진전을 찾았을 것 같은데요.

 

 

 

 

 

 

# 99.

 

단편 영화 최고의 장점은 '가성비가 좋다'는 점입니다. 소위, 보다가 별로인 영화는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기껏해야 런타임도 몇 분 안돼서 시간을 크게 낭비받았다는 생각을 안 드는 데, 또 간혹 있는 좋은 작품들은 여느 장편 못지않은 풍부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대체로 아직 만개하지 않은 초보 감독들이 만드는 영화가 많아서 풋풋하고 맑고 도전적이라는 것도 장점이죠.

 

이번에 본 네 작품 역시 각자 좋은 점들도 아쉬운 점들도 있습니다만, 네 편 모조리 합해봐야 채 30분도 되지 않습니다. 시간 대 성능비를 따진다면 충분히 혜자죠. 장편 상업 영화를 보기엔 묘하게 지치거나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을 때. 가끔씩은 단편 영화 어떠신가요. 여기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의 영화들이 여러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은정' 감독의 『기대』, '옥대훈' 감독의 『바빠서』, '박상균' 감독의 『한수탕』, '김현정' 감독의 『여름의 소리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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