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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밤의 우유니 사막 ⅰ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그냥_ 2019. 12.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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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떠올렸습니다. 낮의 그것도 아닌 야경이 깊게 드리운 우유니 사막 말이죠. 수분이 메마른 건조하고 삭막한 사막과 같은 소년의 삶에 쏟아질 듯 슬픔의 비가 내리면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온 세상은 푸르른 달빛에 물들게 됩니다. 별이 빛나는 바다에 뒤덮인 사막 한가운데 외로이 서 있는 소년의 숨 막힐 듯한 고독감과 쓸쓸함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군요.

 

 

 

 

 

 

 

 

'배리 젠킨스' 감독,

『문라이트 :: Moonlight』입니다.

 

 

 

 

 

# 1.

 

영화는 세 파트의 옴니버스 구조를 가집니다. 각각 소년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와 성년기에 대응되죠. 파트의 제목은 '리틀', '샤이론', '블랙'입니다. 서사는 '리틀'로 불리던 소년 '샤이론'이 '블랙'으로 성장한 후 자신의 본질인 문라이트, 즉 '블루'로 나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블루'는 소년의 삶 밖에 있는 것을 새로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질적인 것이었다는 메시지는 곧 주제가 될 테구요. 따라서 이 영화의 대한 이해와 감상은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과 '블루'라는 상징에 숨은 함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의해 결정될 겁니다.

 

 

 

 

 

 

# 2.

 

첫 번째 파트 '리틀'입니다.

파트를 지배하는 관념은 '표류'입니다.

 

위태로운 소년은 거친 파도에 떠밀려 표류합니다. 마약 거래가 빈번한 다운타운에 발을 들인 것도 마약 딜러 후안의 창고에 숨어들어 주사기를 손에 쥐게 된 것도 그저 또래들의 폭력을 피하기 위함이었죠. 평생 의지하게 되는 대모代母 테레사를 만나게 된 것 역시 우연히 만나게 된 후안의 선택이었고, 편부모 가정과 학교 폭력이라는 내외부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도, 점차 마약에 빠져드는 엄마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모두 샤이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죠.

 

그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헤엄치지 못하는 리틀입니다. 학교의 아이들뿐 아니라 엄마의 요구와 타락,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돌보는 후안과 테레사 모두 샤이론에겐 감당할 수 없는 버거움입니다. 소년에게 자신을 둘러싼 시간도 환경도 사람도 관계도 심지어 존재와 정체성 모두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위협입니다. 리틀이란 이름은 폭력적인 아이들로부터 붙여진 별명뿐 아니라 거대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더욱 작아져버린 자존감을 의미합니다.

 

 

 

 

 

 

# 3.

 

후안의 손에 이끌려 찾은 바닷가에서 처음 수영을 배우는 순간을 샤이론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라 한다면, 파트의 마지막 후안과의 대화는 샤이론의 내면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습니다. 화면의 마지막엔 후안의 절망을 담지만 그 순간 가장 큰 절망감에 무너져 내리는 존재는 샤이론이라 봐야겠죠. 작음에 더욱 작음을 더해 강조하는 리틀이라는 별명이나, 후안의 절망을 보여줌으로써 더 깊을 샤이론의 절망을 은유하는 방식에는 유사한 부분이 있군요.

 

케빈을 만나 자신이 '리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지점은 샤이론이 떠다니는 곳이 단순한 불행과는 다름을 구분 짓습니다. 후안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내면에 숨은 '블루'에 대한 이야기 역시 샤이론의 표류와 방황은 가치중립적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샤이론의 삶을 둘러싼 내-외부적 요건들이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라면 샤이론의 삶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불행해져야만 합니다. 그래선 곤란하죠. 샤이론의 상황은 폭력에 의해 부서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남들보다 약간 더 거칠고 불친절한 풍파에 떠밀려 표류하고 있을 뿐이라 말합니다. 현실의 무게와 내면의 성장 간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인상적입니다. 감독이 인물을 그려내는 손길이 대단히 섬세하군요.

 

 

 

 

 

 

# 4.

 

두 번째 파트는 '샤이론'입니다.

파트의 주제는 '방황'입니다.

 

자신의 불확실성을 스스로의 힘으로 목격하는 시간입니다. 여전히 거친 파도 위에 몸을 맡기고 있지만 '리틀'이던 시간과 달리 지금의 소년에겐 스스로 헤엄칠 힘은 있습니다. 다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모를 뿐이죠.

 

다른 파트들, '리틀'이나 '블랙' 혹은 '문라이트'와는 달리 두 번째 파트만은 건조한 제목을 가집니다. 남이 결정해 주었든 (리틀), 스스로 결정했든 (블랙),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던지 (블루) 간에 올바름의 여하와 별개로 어쨌든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시기들과는 달리 이 순간의 샤이론은 그저 '샤이론'일 뿐입니다. 다만 여기서의 샤이론은 스스로를 찾았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찾지 못해 비어있음에 가깝죠.

 

이 시기의 샤이론은 주변을 조금 더 주도적으로 목격합니다. 터렐과 폴라와 테레사와 케빈과 그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자신의 감정과 시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의 정체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터렐의 극단적 괴롭힘의 정체를 샤이론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자와 섹스를 나누는 케빈이 자신의 꿈에 나오는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후안이라는 연결고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자신을 돌보는 테레사의 존재도, 그런 테레사에게 받은 용돈을 빼앗아 마약을 사면서도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엄마 폴라의 존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밤의 모래사장에서 케빈과 나눈 손길에 '샤이론'은 "미안하다" 말합니다. 이 순간의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에 대한 사과가 아닌 혼란스러운 상황에 화들짝 놀란 것에 가깝습니다.

 

 

 

 

 

 

# 5.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기까지는요.

 

어릴 적 케빈의 말이나 후안의 위로처럼 '샤이론'의 방황은 아직은 가치중립적입니다. 하지만 비극이 벌어집니다. 터렐에 의해 케빈이 샤이론을 폭행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직 케빈의 정체와 말과 자신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 펼쳐집니다. 곱게 빚어가던 조각상에 무자비한 망치질이 가해진 것과 같죠. 사건 이후 샤이론은 더 이상 이전의 리틀이 아니게 됩니다. 후안이 바랬던 자신 안의 블루를 찾지 못하고 맙니다. 그는 블랙이 되어버리지만 그 블랙이란 것은 케빈이 밤의 모래사장에서 말하는 블랙 역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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