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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악녀를 보았다 ⅰ _ 레이디 맥베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그냥_ 2020. 4.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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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뒷모습으로 소개되는 여자. 실루엣을 짓누르는 베일. 앳되고 가녀린 목소리와, 그를 제압하는 고압적인 저음의 성가. 소녀의 연약한 요구와, 그 요구를 거절보다 폭압적인 명령으로 제압하는 남자. 발가벗겨진 소녀를 덩그러니 세워둔 채 돌아 눕는 남편. 이를 담아내는 고전적이고 고정적인 오브제들과, 정제된 채도의 색감과, 이질적인 정도로 옆으로 길게 벌어진 화면.

 

통상의 긴 화면비는 개방감, 안정감, 수평적 운동성, 평등, 균일감 따위를 의미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는 '수평성의 강조'라기보다는 '수직성의 통제', 즉 위아래로 잘려나간 화면이 인물을 짓누르며 지배하고 있는 공간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명령'과 '규율'과 '제약'과 이를 둘러싼 '균열'과 '파괴'의 서사임을 유추하게 하는 오프닝입니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오프닝 시퀀스는 관객을 이 고압적인 통제 속으로 불러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레이디 맥베스 :: Lady Macbeth』입니다. 

 

 

 

 

 

# 1.

 

텅 빈 공간을 걷는 발걸음과 나무 창문 비틀리는 소리가 넓은 홀 안을 맴돌며 허무하게 공명합니다. 하녀 '애나'가 졸라매는 코르셋과 풍성한 머리를 조아 맨 헤어스타일이 내면의 답답함을 은유합니다. 감각적이고 미학적인 영화적 연출 위로 통제와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주인공 캐서린과 그녀를 둘러싼 서사적 상황을 몇몇의 특정한 풍경으로 정의합니다. 오프닝을 상징하는 공간은 옆으로 끝없이 뻗은 '수평선의 들판'입니다. 두 번째 공간은 곧고 빽빽하게 들어선 '가시나무의 숲'이죠. 수평선의 들판은 캐서린이 원래 가지고 있던 평화로움과 가지고 싶어 했던 자유로움을 은유합니다. 가시나무의 숲은 화면을 떠받치다 못해 뚫고 나오려는 듯한 저항적인 나무들처럼 그녀 역시 규율과 통제를 벗어나기 위한 파격의 서사를 걷게 될 것이라는 선언적 암시라 할 수 있습니다.

 

서사를 관통하는 풍경을 표현한 후 이전과 달리 시아버지 '보리스'에게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주장하는 캐서린의 변화는 추측에 확신을 더합니다. 집을 비우게 된 보리스가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캐서린은 무채색의 세계와는 대조적인 붉고 선명한 체리를 깨어 물죠.

 

 

 

 

 

 

# 2.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이전의 정적인 구도와 달리 카메라 역시 헨드헬드로 팔로우합니다. 물리적인 개방감과, 규율의 해방이 주는 통쾌함과, 그럼에도를 걱정하게 만드는 불안감이 뒤엉켜 음습하게 스며듭니다. 주인공이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으로서의 서사를 걷게 되리라는 것과, 그를 향해 폭발적으로 내달리는 동안의 에너지와, 매 단계마다의 다각적 정서의 총합이 이 영화의 의의라는 걸 추측하게 하죠.

 

'열린 창문'의 자유로움. '고양이'의 의외성. 코르셋을 매던 일상과 대조된 '맨발로 오른 소파'의 파격과, 밤에도 함부로 할 수 없던 잠을 채우는 '낮잠'의 상쾌함이 문학적으로 은유됩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보리스' 부자의 부재라는 상황적 허술함이 허락한 만큼의 자유로움일 뿐 제약 그 너머의 자유로움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 3.

 

하인들의 거처를 향하며 그녀는 허락되던 '보리스'의 며느리이자 '알렉산더'의 아내가 아닌, 저택의 주인으로서 처음 역할하게 됩니다. 규율의 위계가 한 단계 낮춰지자 캐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시아버지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합니다. 자신이 당하던 피지배 행동을 하인들에게 지시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녀의 존재가 '보리스' 부자에게 있어 무수히 많은 하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과, 그녀 역시 하인들에게 있어 폭압적인 규율을 언제고 제시할 수 있는 폭력적 내면을 가진 존재라는 걸 중의적으로 엿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리스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애나'를 능욕하며 암퇘지의 무게를 잰다 말하는 '세바스찬'에게 자신의 무게는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물음으로서 이 인물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에는 본능적인 충동과 말초적인 욕구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후의 행보가 제약과의 대결을 통한 당위로서의 해방을 넘어, 자기 파괴적 타락에까지 닿을 것임을 관능적으로 묘사합니다.

 

일탈과 도발과 타락의 맛을 처음 느낀 후 다시 나오는 산책. 이 순간을 기점으로 규율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캐서린'과, 순종으로서 '애나'가 분화되게 되는데요. 이후의 '애나'와 '캐서린'의 갈등과 대립과 대조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상당 부분 담당할 것이라는 걸 생각할 때 '애나'는 실제 부여받는 분량과 무관하게 이 영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 4.

 

수평선의 언덕에 비가 내립니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언덕에 비가 내리는 것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알렉산더'의 아내 '캐서린'에게도 곧 '세바스찬'이라는 '비'가 내릴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그리고 역시. '캐서린'은 안방으로 찾아든 '세바스찬'과 사랑을 나눕니다. 정말이지 친절한 영화죠.

 

첫 불륜은 이상하리만치 짧게 묘사되는데요.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정서의 성격이나 풀어내는 수위에 있어 조심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영화임을 감안한다면, 이 짧은 베드신은 의식적으로 절제된 것이라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겁니다. 감독은 이 장면이 카타르시스로 느껴져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밑 빠진 독에 들이붓는 물처럼. '세바스찬'이라는 남자의 존재가 '캐서린'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모든 것이 되어선 곤란하다 생각합니다. 섹시한 인물이지만 섹시한 상황이어선 안됩니다. 흥분된 상황이지만 흥분되게 만들어선 안됩니다. 설령 흥분된다 하더라도 그 흥분은 섹슈얼리티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규율의 파괴로서의 일탈 때문이어야 합니다.

 

 

 

 

 

 

# 5.

 

숲의 다리 밑에서 버섯을 캐는 '애나'와 묶여 있던 개를 끌고 나온 '세바스찬'입니다. 버섯은 음습하고 수동적입니다. 개는 본능적이고 파괴적입니다. 감독은 강박적일 정도로 집요하게 이미지를 인물에게 자연스레, 또 친절하게 연결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눈치채셨다시피 감독은 영화 내내 일관된 구조를 연출합니다. 관념을 은유하고 서사로 설명하고 다시 관념을 은유하고 다시 서사로 설명하는 것이죠. 인물의 관계와 관념과 정서 등을 특정한 오브제에 구체화한 후, 그 오브제들과 인물들을 계획된 구도 위에 얹어 때론 문학적으로 때론 미술적으로 묘사한 후, 이를 풍부한 대사를 곁들인 서사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관된 구성을 가집니다. 퐁당퐁당. 이 독특한 연출 방식은 영화에 서사와는 별개의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수학적 균형이 뛰어난 소설을 읽어나가듯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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