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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고독의 書 _ 토니 타키타니, 이치카와 준 감독

그냥_ 2020. 1.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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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한 줌의 수분도 없는 모래장. 모래의 바다에서 태어난 배. 그 배를 홀로 만드는 아이. 아이를 스쳐 지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걸음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아들. 화사한 꽃들 가운데 꽃잎 한 장만 공들여 그려진 그림. 그 한 장을 바라보고 주목하고 관찰하는 아이. 의아한 그림에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과, 선생님이 자신을 왜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 늦은 저녁 홀로 타는 자전거, 쓰러질 듯 위태롭게 하지만 자유롭게 자전거를 모는 아이.

 

‘토니 타키타니’.

 

‘토니 타키타니’의 본명은 정말로 ‘토니 타키타니’입니다.

 

 

 

 

 

 

 

'이치카와 준' 감독,

『토니 타키타니 :: トニー滝谷』입니다.

 

 

 

 

 

# 1.

 

까슬한 책장을 조심스레 넘기는 것만 같은 영화입니다. 건조해 만지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찢어질 것 같은 영화입니다. 담담히 옆으로 천천히 옆으로 영화는 흘러갑니다. 깊게 천천히 내쉬는 듯한 호흡으로 고독이 내면화된 한 인간이 상실이라는 파괴로부터 고뇌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재즈 뮤지선 ‘쇼자부로’는 역사의 풍랑에 떠밀려 온기를 잃었고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는 언제나 고독합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랬기에 괴롭지는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감정은 논리적이지 못한 것, 미성숙한 것일 뿐이니까요. 고독과 고립과 허무와 같은 정서는 적어도 소년 '토니'에게 괴로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토니'는 이와 같은 부정적 정서 한가운데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늦은 밤 따뜻한 목욕물에 깊숙이 몸을 담그는 것처럼 말이죠.

 

# 2.

 

여러 차례 분절되는 '선'이 등장합니다 모래로 배를 만드는 순간 토니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철심이라거나, 목욕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 달을 가로지르는 전선이라거나, 식빵을 자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토니'의 눈 앞에 놓인 톱날이라거나, 영화의 11분여를 큼지막하게 가로지르는 타이틀이라는 틈 따위 말이죠. 무언가를 가로지르는 선은 분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닫혀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이죠. 토니는 기본적으로 닫혀 있는 사람입니다. 고독에 닫혀 있는 토니는 불완전하지만, 적어도 불안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틈은 아내 '에이코'로 인해 벌어지게 됩니다. 에이코를 처음 만나는 순간 토니는 닫힌 문을 아주 조금 열고서 그녀의 존재를 바라본 후 나오게 되는데요. 이 모습은 그의 굳게 닫힌 마음이 에이코로 인해 조금씩 열리고 있음을 은유하는 장면입니다.

 

다섯 번의 만남 후 토니는 에이코에게 청혼합니다.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면서부터 어느샌가 토니의 뒤로 닫힌 틈이 아니라 열린 창과 열린 문들이 등장하죠. 그의 내면 역시 배경의 문들처럼 서서히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틈이 열리는 것이 곧 고독의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겨우 문이 열리기만 했을 뿐 아직 채워놓은 것은 없습니다.

 

 

 

 

 

 

# 3.

 

토니는 에이코로 인해 무언가를 기대하는 자의 충만됨을 느낍니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헐벗은 여자의 몸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화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티비를 꺼버리는 차가운 손길. 기계를 사랑하는 일러스트레이터는 '닫힌 고독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에이코는 짙은 흙빛의 토니 타키타니에게 밝고 건강한 희망을 알려준 첫 사람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 역시 온전하지 못합니다. '옷'에 집착하고 있죠.

 

토니의 착각과는 달리 그는 아내로 인해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잠시 다른 무언가로 고독감을 가려둔 것에 불과합니다. 에이코 역시 남편에게 있어 밝고 건강한 희망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무언가에 매몰되고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죠. 두 사람 모두 스스로 온전하지 못합니다. 토니는 아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고, 에이코 역시 내면의 공허함을 값비싼 옷으로 채우려 하지만 채워지지 않죠. 

 

# 4.

 

사치나 낭비라기보다는 집착. 공백. 허무. 그리고 잠식되어가는 고독과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과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중독에 가깝습니다. 토니의 부탁에 옷을 사지 않겠노라 말하는 에이코. 새로 산 옷을 환불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 지점은 우연에 기댄 서사적 비극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군요. 옷으로 간신히 메우며 버티고 있던 에이코의 삶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말입니다.

 

토니에게 있어 아내를 잃는다는 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의미의 상실이자 존재의 상실이자 관계의 상실이자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고독은 익숙하지만 상실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없고 가족이 없던 원래의 토니 타키타니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죠. 껍데기를 집착적으로 모으던 아내와 아내가 남긴 껍데기를 채워줄 여자를 다시 집착적으로 구하는 토니의 역설이 무겁습니다. 고독이란 정서의 결정론적인 비극성을 엿보게 된달까요.

 

 

 

 

 

 

# 5.

 

토니는 발버둥 칩니다. 원래 비어 있던 곳이 아니라 아내가 들어차 있다 비워져 버린 공간을 메우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그녀 대신 옷을 입고 움직여 줄 사람 히사코를 고용해보지만 고통은 해갈되지 않습니다. 미친 듯이 자전거를 내달려보지만 소용은 없습니다. 헌 옷 장수를 불러 아내의 옷들을 모두 들어내 보아도, 기억들을 하나하나 잊으려 애써보아도, 아버지 '쇼자부로'의 유품들로 빈 틈을 채워보아도, 빈 방 한가운데 스스로의 몸을 뉘어보아도, 마치 사형수였던 아버지처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합니다. 절망적이죠.

 

그리고 문득 옷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눈물 흘려준 여자 '히사코'를 떠올리게 됩니다. 에이코와 신체 사이즈가 똑같은 대용품으로서의 히사코가 아니라, 에이코를 기억해 줄 사람, 그녀의 공허함을 어루만지려던 사람, 자신과 같은 눈물을 흘렸던 사람으로서의 히사코를 말이죠. 토니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 6.

 

영화의 결말은 꼭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와 같습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 속 '길'이 자신이 꿈꾸는 황금시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체념한 후 그 절망감을 함께 위로할 사람을 만나며 영화가 마무리되듯, 이 영화의 '토니' 역시 결코 '토니 타키타니'의 고독감과 '에이코'의 상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체념한 가운데 그의 본질적인 슬픔을 위로할 사람으로서 '히사코'를 찾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죠.

 

 

 

 

 

 

# 7.

 

한 인간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풀어놓는 드라마이기도 합니다만 특정한 정서를 물리적으로 형상화해 정성껏 빚어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상 아래로 짙게 깔리는 위태로운 피아노의 선율과, 흘러가며 사라지는 시간처럼 옆으로 옆으로 쓸려나가는 화면. 정갈하고 담담하지만 동시에 대단히 강렬한 내레이션과, 육중하게 침전시키는 낮은 채도의 색감과, 위태로움과 정적을 동시에 묘사하는 화면 모두 각기 다른 층위의 <고독>을 구현하는 것에 충실히 복무합니다. 프레임 안에 피사체를 가두고 강하게 움켜쥐는 듯한 일본 영화 특유의 연출법과, 깊은 호흡을 두어 번 내뱉은 후에야 전환되는 영상의 편집은 포착한 정서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합니다.

 

힘을 실어 말하는 순간 내레이션을 넘어 화면 속의 주인공이 대사를 건넵니다. 대화도 아니고, 독백도 아니고, 설명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딘가. 고독의 영역에 인물의 목소리를 놓고 오는 듯한 감각이 서늘합니다. 관객과의 대화가 아니라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에 담아낸 메시지를 화면 앞에 내려놓는다. 놓아두고 돌아선다. 라는 것만 같죠.

 

물리적인 화면을 결부시켜 복잡한 정서를 수월하게 전달하는 연출도 인상적입니다. 삭막한 삶으로 회귀하는 순간 푸른 샐러드를 먹고, 정서적으로 힘들 때면 경사진 자전거를 오르고, 무언가 혹은 어떤 기억을 흘려보내려고 할 때면 흐르는 물을 보여주는 식이죠. 관념적인 것들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또 역으로 물리적인 상황을 보며 관념적 고찰을 이끌어내는 것이 마치 철학적 포토그래퍼의 사진전을 보는 듯한 맛도 있군요.

 

# 8.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고 난 후 상당한 위로를 받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고독하지 않아!"보다, "고독해도 괜찮아!"보다, "고독하지 않을 수 있어!"보다, "고독한 다른 사람들도 많아!"보다 "당신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독함과 상실감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있어." 라는 메시지가 그 자체로 대단한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달까요. 음... 앉은자리에서 3번을 연달아 본 영화는 오랜만이군요. 제 안에 숨은 외로움이 빼꼼 고개를 내민 걸까요. '이치카와 준' 감독, 『토니 타키타니』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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