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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밤의 우유니 사막 ⅱ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그냥_ 2019. 12. 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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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우유니 사막 ⅰ _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

# 0.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떠올렸습니다. 낮의 그것도 아닌 야경이 깊게 드리운 우유니 사막 말이죠. 수분이 메마른 건조하고

morgosound.tistory.com

 

 

# 6.

 

세 번째 파트는 '블랙'입니다.

파트의 주제는 '순응'이죠.

 

수줍음이 많던 샤이론은 마약상이 되어 있지만 타락이나 절망감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성인이 된 샤이론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 보다 정확히는 '복무'하는 인간이 되어 있다는 데 더 가깝습니다.

 

터렐을 가격한 데 대한 처분을 받고 난 후 샤이론은 멘토 후안과 같은 건장한 남자가 되어 있습니다. 후안 대신 대모 테레사를 아들처럼 듬직하게 지키고 있죠. 엄마 폴라의 요구대로 풍족하게 돈을 벌며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며 살고 있고 안락한 보호소에 모시고 있습니다. 터렐과 같은 사람들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위압적인 체구를 갖췄고 케빈이 말하는 대로 더 이상 '리틀'하지 않은 '블랙'이 되었죠.

 

 

 

 

 

 

# 7.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이 바라는 바가 아녔습니다. 후안은 오히려 샤이론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며 스스로의 안에 내재된 '블루'를 찾길 원했죠. 테레사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닌 후안이 남긴 아이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폴라가 바랬던 것은 안락한 보호소가 아니라 아들의 행복과 자신의 삐뚤어진 사랑에 대한 진솔한 사과였고, 케빈이 말한 '리틀'을 벗어던진 '블랙'이란 것 역시 물리적인 강인함이 아닌 자신을 스스로 직시하면서도 의연할 수 있는 자존감이었죠.

 

겉보기엔 위압적인 근육질 마약상이지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모두에게 숨겨야 합니다. 여전히 자신 안의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얼음물에 머리를 담가야 합니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 나름의 고민에 기인한 희생을 하고 있지만 그게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는 잊어버린 듯합니다. 목적을 상실한 체 자신 안의 '블루'를 깊은 빙하처럼 깊고 차가운 얼음물 속에 가라앉힙니다.

 

그러던 중 케빈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식당에서 후안이 어린 샤이론에게 그랬던 것처럼 밥을 얻어먹고 대화를 나누게 되죠. 사실 샤이론과 케빈이 만나게 되는 이 지점은 가장 극적인 클라이막스이긴 합니다만, 이전과는 달리 대단히 직설적이고 친절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소 문학적이고 은유적으로 전개하던 이전의 문법과는 달리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대사로 풀어놓기 때문이죠. 대사 하나 하나 표정과 눈빛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대목이지 이전과는 달리 고찰이 요구되는 파트는 아닙니다. 후안의 말대로라면 달빛이 천천히 샤이론의 얼굴을 푸르게 드리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죠.

 

 

 

 

 

 

# 8.

 

블루

 

케빈과의 대화 이후 어린 샤이론이 드넓은 바다를 앞두고 그야말로 푸르게 물들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장면임에도 할애된 시간을 매우 짧습니다. 푸르름에 대한 이야기는 사족이기 때문이죠. 샤이론이 '리틀'이던 시절에도 '샤이론'이던 시절에도 '블랙'이던 시절에도 '블루'는 늘 '샤이론'의 곁에 있었으니까요. 그의 본질은 밖에 있던 것을 찾은 게 아니라 주변에 언제나 존재했었고, 아니 그의 세상 그 자체였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감성적인 위로군요.

 

 

 

 

 

 

# 9.

 

상당히 문학적인 특히나 소설이나 수필보다는

'시'적인 은유가 풍부한 작품입니다.

 

때문에 화면의 질감이나 구도나 색감 따위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기는 합니다. 낮과 밤의 활용과 낮에 만나는 사람과 밤에 만나는 사람의 차이라던가, 그 순간마다 드러나는 정체성의 이면이라던가, 인물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찍는 순간의 긴장감, 핸드헬드의 긴박감, 가감 없이 노출되는 플레어와 거칠게 날아가는 초점이 주는 깊은 날것의 현장감, 인물의 시야와 심장 박동에 호흡을 같이 하는 카메라 워크라던지, 아니면 내내 '샤이론'의 주변을 맴도는 푸른색과, 파트에 따라 흰색에서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샤이론의 옷, 푸른색과의 균형을 잡아줄 분홍색과 보라색의 미적 활용이라던지 하는 것들 말이죠.

 

 

 

 

 

 

# 10.

 

하지만 그런 것들이 중요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이를테면 회 밑에 깔린 천사채 같은 거랄까요. 위와 같은 영화적 기술적 요소들이 있어 주제가 더욱 빛난 것은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천사채를 주섬주섬 주워 먹느라 횟감의 맛을 혼탁하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다만 불필요한 이야기를 덜어내 영화를 담백하고 정갈하게 만드는 솜씨에 대해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유년기의 가혹한 환경에 대한 묘사나 관찰소에서 마약상이 되어가는 과정, 혹은 케빈과의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재회 따위를 훨씬 드라마틱하게 꾸밀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감독의 지독할 정도의 절제로 인한 비어있음으로 인해 인물의 서정성과 감수성이 바다와 같이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블루'로서의 샤이론을 화면에 담아내는 방식은 화룡점정이라 할만하겠네요.

 

 

 

 



# 11.

 

샤이론이 겪게 되는 상황이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흑인 게이'라는 퀴어에 종속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의 퀴어함은 내면의 '블루'를 아주 조금 더 희소한 것으로 이해하는 과정을 아주 조금 더 돌아가게 만들 뿐이죠. 퀴어는 성장의 과정을 보다 극적으로 만들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감독은 철저하게 내면의 보편성을 지켜나갑니다.

 

이전에 『차장님은 연애 중』을 리뷰하며 좋은 퀴어영화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감정의 보편성이 육체적, 정신적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을 아득히 극복한다는 것을 정서적으로 증명함으로써 막연한 선입견과 차별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라 말한 적이 있는데요. 이 영화는 퀴어 영화로서도 그 이전에 휴먼 드라마로서도 그 이전에 영화로서 모든 면에서 탁월합니다.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라라 랜드> 밀어낼만하죠. '배리 젠킨스' 감독, <문라이트>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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