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팔자 좋은 영화입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건지 요리사를 준비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늙은이 '혜원'이나, 수틀린다고 회사 때려치우고 고향 내려가 번듯한 과수원 사장님이 된 '재하'나, 지 승질 못 이기고 부장 머리에 탬버린을 내려쳐도 별 탈 없는 '은숙' 모두 팔자가 좋습니다. 하나뿐인 자식 내팽개치고 훌쩍 집 나가 버린 엄마도, 반찬 몇 개 던져주고 농사일에 조카를 부려먹는 고모도 모두 팔자 좋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팔자가 좋은 사람은 감독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은 감독이거든요.
임순례 감독,
『리틀 포레스트 :: Little Forest』 입니다.
# 1.
살다보면 몸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지갑이 빈곤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야윌 수도 시간에 쫓길 수도 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사람에게 건강한 음식은 큰 힘이 될 겁니다. 빈곤한 사람에겐 소박하더라도 든든한 음식이, 마음이 아픈 사람에겐 화려하고 풍성한 음식이, 조급한 사람에겐 잠깐의 티타임이 도움이 될 수 있겠죠.
혜원의 상경 생활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임용고시 실패로 설명됩니다. 그녀의 귀향은 영화가 어떤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가와 무관하게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도망치듯 선택한 것이죠. 영화의 서사는 '삶의 버거움과 상처를 음식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로부터 치유받는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요. 작품의 문제는 혜원이 차려내는 밥상이 화려해도 너무 화려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인물로 승부를 보는 영화가 인물 해석에 실패했다는 뜻이거든요.
영화 내내 온갖 향신료를 곁들여가며 국제적인 음식들을 뚝딱 만들어 먹습니다. 말도 안 되죠. 주제 의식에도 캐릭터 설정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직접 떡을 찌고 팥을 쑤는 건 소박한 게 아니라 '사치스러운' 거니까요. 사람들이 돈이 썩어 나서 내 입맛에 맞지 않는 공장제 떡을 사 먹는 게 아니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 2.
혜원의 아빠는 딸이 네살배기일 때 병으로 돌아가셨답니다. 엄마랑 단 둘이서 깡시골에 살았다는 건데요. 그럼 먹고자는 생활비들은 다 어디서 나온 걸까요. 어디 마늘밭에 돈이라도 묻어 뒀던 걸까요? 한참만에 내려온 집은 청소도 안 해도 되는 건가요? 관리해주는 집사라도 쓰고 있었나 보죠? 집안일 솜씨가 이렇게나 좋은 혜원이 직접 살고 있는 자취방 냉장고 속 재료들은 죄다 썩어 나는 데, 버려지다시피 한 폐가에 남아있던 식재료들은 멀쩡히 살아있다구요? 그림을 이 따위로 그려놓고 관객더러 몰입을 하라구요?
물론 설득력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설득의 과정을 게을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죠. 스릴러나 미스터리처럼 개연성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개연성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 3.
차라리 현실성을 거세해버렸다면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실성을 배제하자고 제안했다면 까짓거 합의할 수도 있습니다. 오기가미 나오코와 같은 힐링 영화를 주로 찍는 감독들이 그냥 비현실적인 동화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니 임용 고시니 회사 상사의 갑질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저지른 귀향이 이 모양 이 꼬라지면 이건 힐링이 아닙니다. 돈지랄이죠.
인생의 해답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재하는 고향에 대궐만 한 과수원이 있답니다. 씨발... 이건 진짜 너무합니다. 무신경한 것도 정도가 있고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대체 얼마나 선민의식에 찌들어 있어야 이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걸까요. 이건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자 피땀 흘려 고생하시는 농부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요즘 애들 왜 아등바등 고생하면서 살아가지? 도시에서 경쟁에 치여 그렇게 살 바에야 시골 가서 쉽게 쉽게 농사나 지으면 되는 거 아냐?" 라 말하는 감독에게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 말하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으신가요.
사계절의 음식과 풍경을 보여주는 걸 알파이자 오메가로 삼는 영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억지로나마 1년어치만큼의 시간을 굴려줄 수단이 필요하죠. 나태한 감독들이 이럴 때 척수 반사처럼 꺼내 쓰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신파입니다만 엄마가 안 나오니 신파는 어렵겠군요. 그럼 남은 건 로맨스 연애질이죠. 온갖 등장인물들이 너나없이 주제와 하등 상관도 없어 보이는 치정질을 주고받는 건, 서사를 굴려 시간을 벌려는 얄팍한 속셈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4.
<리얼>은 다방면에서 비판받는 쓰레기입니다만 그중에는 캐릭터의 활용 문제도 있었습니다. 여성 캐릭터들을 편협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원해 도구적으로 소모하고 비참하게 내팽개치기 때문이었죠.
이 영화는 역으로 남성 캐릭터를 그렇게 취급합니다. 이 영화의 남성 캐릭터들은 여성 캐릭터들을 돋우기 위해 동원된 쓰레기들 뿐입니다. 혜원의 아빠는 자의는 아닙니다만 어쨋든 모녀만을 남겨둔 채 떠난 사람이구요, 혜원의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가 열심히 싸준 도시락에 험담을 하는 나쁜 놈이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혜원 앞에 나타나 진상짓을 하는 사람도, 재하에게 시대착오적인 폭언을 내뱉는 사람도, 은숙에 의해 뚝배기가 깨지는 부장도 모두 4~50대 남성 아저씨인 게 진심 우연이라구요? 영화 속 남성 캐릭터 중에서 쓰레기가 아닌 사람은 혜원이 필요할 때면 짜잔 하고 나타나는 키다리 아저씨 재하뿐이죠.
하... 다 늙어서 졸렬하게 청춘 드라마의 탈을 쓰고 이게 뭔가요.
# 5.
엄마 캐릭터는 엽기적입니다.
엽기적으로 후집니다.
무슨 스님도 아니고 한마디 한마디가 죄다 선문답입니다. 대학 가는 딸 내팽개치고 집 나가는 게 무슨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현명한 선택인 양 그립니다만 이건 그냥 비겁한 거죠. 어른이라면 특히나 상대가 자신의 가족 그중에서도 하나뿐인 딸이라면 동의를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직접 설명하고 설득하는 정도의 책임은 져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캐릭터라면 최소한 도덕적 비난은 감수했어야 하죠. 모녀 가정이 아니라 부녀 가정이었다 생각해보세요. 아빠가 편지 한 장 남기고 딸 내팽개쳐 놓고 집 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감독이 이렇게 따뜻한 톤으로 그렸을까요?
특히나 그 비겁함에 면죄부를 주는 방식이라는 게 딸의 입을 빌어 억지로 용서 하게 만든다는 점이 더더욱 역겹습니다. <변산>의 이준익도 젊은 여자 캐릭터 뒤에 숨더니 어째 꼰대들은 다 이 모양 이 꼴인 건가요. 엄마 캐릭터는 영화 내에서 괴기할 정도로 많은 변호와 비호를 받는데요. 저는 이 캐릭터를 비슷한 연령대의 감독이 자신을 투사해 살아온 동안의 비겁함을 변호하기 위한 배역으로 읽습니다.
# 6.
그나마 혼자 미쳐서 떠드는 촌스러운 대사들이 없다는 건 다행입니다. 화면을 먹고 소리를 마시는 영화답게 표현에는 나름 공을 들였습니다. 삶의 본질을 관조하게 하는 소담한 주제의식과 구체적인 음식들을 연결하는 방식도 좋습니다만 이건 원작의 공이지 이 영화의 공은 아닙니다.
배우 셋의 매력은 몇 안 되는 영화의 장점입니다. 감독의 이야기가 개판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의 단편적인 집중은 그래도 배우들이 붙잡아 냅니다. 류준열이 연기한 재하의 진중함과, 진기주가 연기한 은숙의 생동감과, 김태리가 연기한 혜원의 감성이 조화롭습니다. 맛있는 면요리처럼 큰 노력 없이도 화면이 술술 넘어가는 건 어디까지나 배우들의 공입니다.
일본 원작의 스타일만 현지화했을 뿐 그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보다보면 '이럴 거면 굳이 원작이 아니라 이걸 봐야 할 이유가 있나?'라는 회의감마저 들게 되죠. 초반부 분위기를 진중하게 잡으며 관객에게 위로를 전하던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염장을 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스믈스믈 기어오릅니다. "얼씨구? 팔자 좋네. 지랄 났다 아주." 싶은 거죠. 에효. 이래서 아무리 원작이 좋고 배우가 좋아도 영화는 감독 놀음인가 봅니다. 임순례 감독, 『리틀 포레스트』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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