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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선함을 충전하고 싶을 때 _ 브루스 올마이티, 톰 새디악 감독

그냥_ 2019. 3. 1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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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최종 집계 17만 57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희대의 망작 <자전차왕 엄복동>의 광풍에 휩쓸린 관객의 수죠. 이렇게 빨리 VOD로 넘어갈 줄 알았더라면 영화관에 가서 보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드는군요. 보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상이 심각합니다. 영화를 보며 얻은 내상, 리뷰하며 곱씹어 보느라 다시 얻은 내상, 그렇게 쓴 엄복동 리뷰가 제 모든 포스팅 중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거뒀다는 사실이 준 내상이라는 개노답 3형제의 크리티컬 한 다단 히트의 여파는 쉬이 가시질 않습니다. 하... 저는 지금껏 무때문에 영화들을 리뷰를 했던 걸까요.

 

엄복동의 억지 눈웃음과 정석원의 탄탄한 엉덩이에 가위가 눌리는 나날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구가 평평하다 믿는 멍청이들의 다큐멘터리와, 이세계 로맨스물 팝콘무비, 여배우 둘이서 팬티 들고 뽀뽀하는 단편을 한편 봤습니다만 정상 텐션으로 돌아오는 건 요원하기만 합니다. 어쩔 수가 없네요. 최후의 수단으로 신에게 구원의 기도를 올려야겠습니다.

 

 

 

 

 

 

 

 

'톰 새디악' 감독,

『브루스 올마이티 :: Bruce Almighty』 입니다.

 

 

 

 

 

# 1.

 

소시민 '브루스 놀런'이 하는 일마다 꼬인답시고 하늘에 펀치 라인 가득 담은 삿대질을 하다가, 빡친 '모건 프리먼'의 유령회사 취업사기에 속아 신의 권능과 환청을 강매당하고, 여기저기 하고 싶은 데로 막 살면서 여친과의 침대 액션과 라이벌과의 구강 액션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하다가, 경리직원도 하지 않을 엑셀 일괄 입력을 저지르는 대형사고를 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연예인을 부업으로 하는 성매매 알선 포주가 운영하는 모 클럽 부럽지 않은 호화 파티를 열었다가 여자 친구 앞에서 NTR을 시전 하면서 차이고, 내가 이러려고 능력을 얻었나 하는 자괴감에 후회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돌아가신 조상님과 하이파이브하려는 찰나 혼자 치사하게 휴가 다녀온 흰옷 입은 흑인 할아버지에게 찌찌뽕을 연달아 당하면서 되살아나 헌혈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 2.

 

2000년대 감성이 가득합니다. 이젠 고전이 되어버린 말장난들과 여자 친구와의 따뜻한 사랑, 요즘은 찾아보기조차 쉽지 않은 사진 앨범, 세상 순하지만 말은 잘 안 듣는 강아지 등이 등장합니다. 이런 류의 영화엔 항상 나오는 보육원을 하는 헌신적이고 착한 약혼녀와, 얄밉고 뺀질뺀질한 직장동료가 라이벌로 등장하고, 반복적으로 읊어대는"B~E~A~Utiful~~"과 같은 어색한 유행어도 쏟아지죠. 

 

적지 않은 코미디들이 지금의 기준으로 상투적인 클리셰가 되어버린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당대 최고의 코미디 배우 '짐 캐리'는 지금 봐도 충분히 재미있는 코미디를 성공시킵니다. 신이 하필 흑인이라는 설정은 지금의 기준에서도 충분히 유쾌합니다. 노숙자를 괴롭히는 불량배들에게 엄한 소리를 했다가 얻어터지는 몸개그 역시 유효하죠. 엉덩이를 뚫고 나오는 원숭이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원숭이 개그는합니다. 동네 식당 토마토 수프를 앞에서 모세의 기적을 패러디하는 장면이나, <마스크>에서도 본 듯한 화려한 턴 동작과 다채로운 표정연기들, 에반의 방송을 망치는 순간 모두 하나하나 명장면이라기에 부족함이 없죠.

 

 

 

 

 

 

# 3.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었을 컴퓨터 그래픽의 코미디 아이디어가 쏟아집니다. 포스트잇으로 집을 뒤엎고, 달을 밧줄에 매달아 당겨오고, 손가락을 7개로 만들죠. 물 위를 걷게 하고, 에베레스트를 합성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소환하구요. 신을 시험하는 장면에서 간디의 식음을 전폐했다는 드립을 통해 비폭력 단식투쟁을 엮는 대사나, 신의 기도를 들어주는 게시판의 이름이 'Yahoo'를 패러디한 'Yahwee'라는 것 역시 재밌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있는 안개처녀 호의 156주년 기념 취재를 하기 직전. 자신에게 돌아올 줄만 알았던 앵커자리가 라이벌 에반에게 넘어갔음을 알고 폭주할 때의 연기는, '짐 캐리'가 단순한 코미디 연기에 국한된 연기자가 아니란 건 잘 보여줍니다. 초중반까지 그의 원맨쇼에 가까운 코미디로 점철되던 영화가 후반부 섬세한 종교철학적인 메시지로 확장될 수 있었던 건, 주연 '짐 캐리'가 진정성 있는 감정 연기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죠. 물론 그의 정극 연기 능력은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긴 합니다.

 

 

 

 

 

 

# 4.

 

신의 권능을 얻게 된 브루스의 왁자지껄 코미디 한마당으로 영화가 끝나면 그저 방구석 루저들의 망상딸을 위한 양판소식 먼치킨물이 되어버리겠죠. 다행히도 영화가 개봉한 2003년은 스필버그식의 90년대 감성의 여운이 충만히 남아있는 시기였기에 한겨울 전기장판마냥 따뜻하고 훈훈한 교훈극 마무리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코미디로서 충분히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줬다면 중반 이후부터 슬슬 주제의식을 전달하며 완성도를 확보해 나가야 합니다. '잘 안 풀리던 인생이 신의 권능으로 인해 모든 게 해결되었다'라고 끝나버리면, 흙수저의 인생은 그런 로또 없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해버리고 말 테니까요. '짐 캐리'라는 슈퍼스타와 무려 '신'을 거론한 영화가 그렇게 끝나버리는 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관객들에게 '스스로 노력하지는 않고 기도나 하면서 징징대지 마'라고 가르치려 들어서도 안됩니다. <신과 함께>와 같은 신파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그런 무식한 방법들은 결과적으로 관객이랑 싸우자는 얘기밖엔 안될뿐더러, 그런 강압적인 태도는 영화라는 장르의 의의에도 맞지 않고, 서양 기독교의 '신'의 박애주의에도 반하니까요. 그래서 감독은 살짝 부드럽게 메시지를 다듬습니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세상이라도 더 좋을 건 없을지도 몰라

 

 

 

 

 

 

# 5.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은 거 아니야? 바라는 게 이루어지는 건 좋은 거 맞잖아?'라는 나이브한 생각의 '브루스'는 버팔로의 사람들이 비는 소원 모두를 이루어지게 합니다. 세상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고 사랑하는 '그레이스'와의 관계도 소원해지게 되죠. '그레이스'가 떠나버릴 위기에 처한 '브루스'의 “어떻게 해야 자유의지로 그 사람(그레이스)이 날 사랑하게 할까요?”라는 질문에 “나도 모르지. 알게 되면 알려주게”라는 신의 대답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지전능이 단순히 투명 드래곤처럼 짱짱이라 아무거나 맘먹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식의 1차원적인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위 대화를 곱씹으며 '모건 프리먼'의 첫 등장을 떠올려보면 기독교 철학에서의 '신'과 '자유의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유추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의 공간은 맑은 하얀색으로 뒤덮인 넓고 성스러운 공간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어 고작 존재하는 것이라곤 세상을 지탱할 올곧은 기둥과 신을 찾은 사람(브루스)의 걱정과 고민뿐이죠. 신은 그곳을 온갖 성스러운 것으로 메우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찾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닦고, 또 닦는 존재입니다. 그레이스와의 갈등 이후 고심에 빠져 자신을 찾은 브루스에게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프를 가른 건 기적이 아니고 그냥 마술이야. 밤낮없이 일하는 싱글맘이 아이를 축구 수업에 보내려고 없는 시간을 짜내는 것이 기적이야. 10대가 마약 대신 학업에 열중하면 그게 기적이야.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킬 능력을 갖고서도 그걸 잊고 나한테 소원을 빌어. 기적을 보고 싶나? 자네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봐.”

 

영화 속 야훼의 말에 따르면 '기적'은 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루는 것이고 그걸 위한 자유의지(free will)를 부여한 신성이 숭고하고 전지전능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신의 전지전능함은 문자 그대로의 '신'이란 존재의 권능이라기보단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셈입니다. '기도'는 수동적으로 신에게 내 소원을 이루어달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내 자유의지로 실현할 수 있도록 보살피고 응원해 달라는 부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네요. 감독은 영화를 통해 '소원과 기적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고, 그걸 스스로 이룰 수 있도록 할 자유의지를 부여한 '신'은 언제나 은혜롭게 당신의 기도를 듣고 응원하고 있다'라는 서양 기독교 철학의 선량한 본질을 유쾌한 웃음과 함께 전합니다.

 

 

 

 

 

 

# 6.

 

의도하지 않았는데 얻어걸리는 건 없습니다. 수년에 걸쳐 집필한 글들뿐 아니라 낙서 하나를 써봐도 내가 의도해서 말하지 않은 글은 단 한 글자도 생기지 않음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감독은 왜 하필 '헌혈'이라는 코드를 활용했을까요. 마지막에 굳이 '브루스'를 교통사고에 당하게 만들고, AB형 혈액을 수혈하게 하고, 그런 AB형 혈액을 평소에 헌혈하던 사람이 하필 '그레이스'였다 설정했을까요. 런타임 내내 화려한 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던 영화의 마지막이 세상 소박한 '헌혈' 행사로 끝난 다는 건 우연이라 할 수 없을 겁니다.

 

헌혈은 보험이고 나눔입니다. 당장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당장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내놓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도, 물질과 같은 나에게서 떨어진 잉여물로서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내 생명력을 은유하는 '피'를 나누는 행위입니다. 나눔의 의미를 불신하던 '브루스'가 신과의 만남 이후에 나눔의 가치를 믿게 되는 건 상당히 공동체적이면서 동시에 상당히 종교적인 서사라 할 수 있겠네요. 영화를 보며 가난한 자, 병자, 장애인을 초청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눠 먹고 마시던 성만찬이 함께 연상되었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헌혈' 코드를 인지하고서 생각하면 '그레이스'가 밤새 들인 기도가 '브루스'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주는 울림이 있습니다. '신'의 말대로라면 '브루스'가 자동차를 바꾸고, 토마토 수프를 가르고, 운석을 떨어트린 건 그저 한낱 마법에 불과합니다. 그의 성공은 '브루스'의 권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하는 약혼자를 위해 진심으로 빌어준 '그레이스'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란 거죠. 신에게 올리는 진심을 다한 '그레이스'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기도만큼이나 성스럽습니다.

 

 

 

 

 

 

# 7.

 

이 영화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의 '자유의지'의 의미와 더불어 그런 자유로운 인간들이 모여 구성한 이타적 공동체의 가치를 동시에 역설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신', '자유의지', '기도', '권능'과 같은 다소간 종교적인 듯 해 보이는 아이템들이 사실은 종교를 벗어난 인류 보편에 적용될 수 있는 범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멋지게 증명합니다. 마치 쏟아져내리는 듯한 짐 캐리의 '웃음'처럼 말이죠. 가끔 무턱대고 웃긴 코미디를 보고 싶을 때, 2000년대식 뜨끈뜨끈한 감성이 그리울 때, 혹은 삭막한 세상에 지쳐 건조해진 마음에 선량함을 충전하고 싶을 때. 이 영화를 권합니다. '톰 새디악' 감독, <브루스 올마이티> 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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