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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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55

점, 선, 면 _ 모노노케 우중망령, 나카무라 켄지 감독

# 0. 차원을 뛰어넘어 메마른 마음에 닿기를        나카무라 켄지 감독,『모노노케 우중망령 :: モノノ怪 唐傘』입니다.     # 1. 일본식 전통 화지(和紙) 텍스쳐는 관객을 에도 시대 두루마리 속으로 초대한다. 동시에 적절한 CGI를 활용, 현대적인 개성을 함께 도모하고 있기도 하다. 축제 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미닫이가 닫혔다 열리는 건 대표적이다. 시퀀스를 구분하기 위함도 있겠으나, 극 안에서 밖으로 관객을 밀어냈다 넣었다를 반복해 운동성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이차원적인 작화와 삼차원적인 운동의 결합뿐 아니라 전통적인 질감과 현대적인 표현의 결합 역시 고유의 미감에 기여한다. 배경이 되는 오오쿠의 카리스마와, 오오쿠를 집어삼키는 모노노케의 카리스마, 모노노케를 퇴치하는 약장수의 카리스마, 작..

Film/Animation 2024.12.14

경이로운 순간 _ 와일드 로봇, 크리스 샌더스 감독

# 0. 올해 가장 경이로운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크리스 샌더스 감독,『와일드 로봇 :: The Wild Robot』입니다.     # 1. 언젠가부터 영화에 완벽이란 말을 붙이는 걸 꺼려함에도, 숨겨지지 않는 사랑과 재채기처럼 찬사를 가릴 도리가 없다. 올라가는 앤딩 크레디트를 보며 확신한다. 언제나처럼 좋은 영화를 많이 본 한 해지만 올해의 애니메이션은 이 작품, 와일드 로봇이다.  특별히 모자라거나 과한 바 없는 영화는 완벽이란 평가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다. 드림웍스 최고작이란 평가엔 이견의 여지조차 없고, 적당한 시간이 흘러 2020년대에는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졌는가 물었을 때 그 대답에 들어가더라도 부족함이 없다. 그때의 인류는 어떤 시점에서 어떤 생각과 어떤 고민 끝에..

Film/Animation 2024.11.06

죽음에 관하여 _ 피노키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0. 고르는 것과 남겨진 것으로 말하는 유한한 생명에 대하여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피노키오 :: Pinocchio』입니다.      # 1. 생동감 넘치는 애니메이션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관한 영화다. 다정한 부자의 이야기는 아들 카를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한다. 제페토의 소나무는 카를로의 죽음 위에 피어난 존재고, 피노키오는 다시 그 소나무를 베어 쓰러트린 죽음에서 태어난 존재다. 이후로도 누구와 만나 무슨 일을 겪는가와 별개로 단계마다 피노키오는 죽었다 살아나길 반복한다. 죽지 않는 피노키오가 그럼에도 죽음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제페토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인간이 됨은 돋아난 새살이 아닌 오직 '죽음'으로서 증명된다. 귀뚜라..

Film/Animation 2024.10.12

뚜찌빠찌뽀찌 _ 미니언즈, 카일 볼다 / 피에르 코팽 감독

# 0. 몰리카노~ 마케라로젠보~보케라도빠찌~~~~~~ 오페라도비~~마~~ 키~~~~~~        카일 볼다 / 피에르 코팽 감독,『미니언즈 :: Minions』입니다.     # 1. 자원과 기술이 흘러넘치는 시대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굳이, 억지로 일부러 아득바득 흑백 영화를 만든다면 만든 놈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미친놈일 가능성이 높다. 시간을 쓰는 사랑과 기다림의 의의, 죄책감과 남성성의 프로이트적 분석을 그린 영화를 두 편 연속 보고 나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쉬어갈 필요가 생긴다.  자크 드미와 로버트 에거스의 연타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선 적절한 처방이 필요했고, 그럴 때면 다 때려죽이는 액션 혹은 귀염뽀짝 애니메이션이 딱이다. 오늘의 알약은 D..

Film/Animation 2024.09.22

꿈과 광기의 세계 _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히라오 타카유키 감독

# 0. ようこそ。夢と狂気の世界へ。        히라오 타카유키 감독,『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 Pompo, The Cinephile』입니다.     # 1. 제목처럼 진솔한 영화는 말랑말랑한 표현과 달리 영화 제작의 세계를 진지하게 묘사한다. 우연히 기회를 얻은 젊은 영화인의 이야기 이면엔, 예술과 상업의 균형, 이상과 현실의 조율, 협업과 성장의 가치 등이 폭넓게 다뤄진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작품은 비단 영화뿐 아니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통용될 선량한 응원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작품이 정의하는 영화를 만들고 보는 행위의 의의로 환원된다. 폼포는 '날'리우드가 주목하는 천재 프로듀서다. 그녀는 예리한 직관과 산업에 대한 통찰을 가진 인물로, 진과 진의 눈을 빌린 관객들로 하여금 상업..

Film/Animation 2024.09.06

뮤-비 _ 스터질 심프슨의 사운드 & 퓨어리, 마이클 아리아스 감독 외

# 0. 가끔은 이런 류도 나쁘지 않지.        마이클 아리아스 감독 외,『스터질 심프슨의 사운드 & 퓨어리』입니다.     # 1. 스터질 심프슨(Sturgill Simpson)은 미국 켄터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할 수도 있지만 21세기 미국 컨트리 음악을 선도하는 뮤지션으로 평가되는 나름 월클이(라고 한)다.  2013년 데뷔 앨범 을 통해 세상에 등장한 후 두 번째 앨범 을 통해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입지를 넓혔다. 연이어 2016년에 발표된 세 번째 앨범 는 그레이 어워드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오른다. 과거 해군 시절 경험과 아버지와의 삶을 녹여낸 것으로 알려진 앨범은, 직전의 두 번째 앨범과 더불어 뮤지션의 최고작으로 평가된다. 아마도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

Film/Animation 2024.08.16

위대한 쇼타임 _ 파프리카, 곤 사토시 감독

# 0. It's the greatest show time!        곤 사토시 감독,『파프리카 :: Paprika』입니다.     # 1. 2010년의 무더웠던 여름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제법 친했던 녀석과 영화관을 찾았다. 걸작 를 통해 완전히 궤도에 오른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은, 둘이서 영화를 보는 쑥스러움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꿈과 무의식에 대한 독창적인 재해석, 플롯을 루빅스 큐브 가지고 놀듯 한다⁽¹⁾는 평을 들은 (2010)을 본 후, 홍조 띤 얼굴로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녀석에게 말했던 감상은 지금도 유효하다.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미 를 봤다." 파프리카는 작품을 만든 곤 사토시조차 모르겠다 말할 정도로 모..

Film/Animation 2024.06.08

오만의 반성문 _ 판타스틱 플래닛, 르네 랄루 감독

# 0. 역사의 단편으로 작성한 오만한 인류의 반성문        르네 랄루 감독,『판타스틱 플래닛 :: La Planete sauvage』입니다.     # 1. '1973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라는 소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기 충분하다. 은 멸망한 인류의 후손 옴(Om)이 거대한 파란색 외계인 드라그(Dragg)에게 억압당하는 이야기를 환상적인 미감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프랑스 SF 소설가 스테판 울이 1957년 발표한 소설 을 원작으로 한다. 체코의 이지 트릉카(Jiří Trnka) 스튜디오와, 프랑스 애니메이터 르네 랄루, 롤렌드 토포르의 협업은 그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다. 옴은 인간의 프랑스어 Homme에서 음가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옴의 과거를 기록한 슬라이드는 ..

Film/Animation 2024.05.14

다이브 _ 공각기동대, 오시이 마모루 감독

# 0. 숨 참고 필로소피 다이브 오시이 마모루 감독, 『공각기동대 :: 攻殻機動隊』입니다. # 1. 믿고 거른다는 꺼무위키지만 솔직히 씹덕의 영역만큼은 예외입니다. 공각기동대와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누군가의 포스팅을 빌릴 바에야 나무위키를 정독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죠. 토리야마 아키라 선생의 별세를 핑계로 묵은 만화책들을 몰아보다 흘러 흘러 공각기동대를 다시 볼 수 있었는데요. 오래전 감상에 새로운 감상을 조금 더 얹어 주절거리겠지만 어차피 그 감상조차 모조리 나무위키에 있을 게 뻔합니다. 마니아들처럼 시리즈를 전부 찾아볼 정도의 관심도 의리도 없는 제게 공각기동대란 1995년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과 스칼렛 요한슨이 쿠사나기로 열연한 2017년 실사판 정도가 전부라는 것 역시 감안하셔야겠네요...

Film/Animation 2024.04.02

호수 위의 소년 _ 어웨이,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

# 0. 내 안의 용기와 마주하는 그곳,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 『어웨이 :: Away』입니다. # 1. 기본적으로는 비행기 사고로 인해 불시착한 소년이 미지의 섬에서 맞닥뜨린 거인을 피해 지도 끝에 위치한 마을에 도달하는 어드밴처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할 겁니다. 이 관점에서는 보이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것은 들리는 그대로 솔직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황량한 모래사장에 불시착한 사람의 불안과, 정체 모를 거인을 마주하는 순간의 공포와, 포근하고 평화로운 오아시스에서의 안도감을 만끽하면 좋습니다. 작고 사랑스러운 노란 새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 출발할 때의 용기와, 높고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는 순간의 긴장과, 거슬러 올라오는..

Film/Animation 2023.12.02

존재의 지평선 _ 썸머 고스트, 라운드로 감독

# 0. 추락하는 삶과 부유하는 죽음의 경계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라운드로 감독, 『썸머 고스트 :: サマーゴースト』입니다. # 1. 피아노 샤랄랄라, 석양 샤랄랄라 하는 짭카이 마코토류 갬성충만 일본 애니메이션입니다. 금수저 모범생, 번지점프 미수범, 금발의 정대만이 모여 여름 방학을 분신사바에 꼬라박습니다. 귀신이랑 4인팟 짜서 익스트림 레저 스포츠 즐기다 보물 찾기에 성공, 경품으로 목걸이를 득템 합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기 전에 정대만은 요단강을 건너고. 남은 둘이서 다시 분신사바에 매진하며 막을 내린다는, 고런 내용의 작품이죠. # 2. 네 명의 주요 캐릭터는 삶과 죽음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됩니다. 이를테면 토모야는 '살 이유가 없는 사람', 아오이는 '죽고 싶은 사람', 료..

Film/Animation 2023.10.22

어쩌면 그 이상 _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호아킴 도스 산토스 외 2인 감독

# 0. 스파이더맨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 어쩌면 그 이상. 호아킴 도스 산토스 / 켐프 파워스 / 저스틴 K. 톰슨 감독,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입니다. # 1. 스파이더맨하면 뭐가 떠오르실까요. 북미 만화 특유의 역동적인 그림체가 떠오르실 수 있겠죠. 코믹스에 대한 접근성이 높지 않은 한국 관객들은 실사 영화 시리즈들을 먼저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화풍으로 그려낸 작품들도 많거니와, 비단 작화가 아니더라도 레고 블록이나 동물, SD풍 데포르메 따위로 변주한 굿즈 상품들도 즐비하죠. 에피소다마다 아예 다른 설정으로 리뉴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나이도 성격도 능력도 각양각색인 경우도 많습니다. 멀티버스 메타가 성행한 이후론 진짜 막 나가는 모양새입니다. 빌런이..

Film/Animation 2023.08.20

착각의 늪 _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아론 호바스 / 마이클 젤레닉 감독

# 0. "자기감정에 속기도 하거든요." 아론 호바스 / 마이클 젤레닉 감독,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The Super Mario Bros. Movie』입니다. # 1. 이 영화를 리뷰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 2. 극장을 나서며 든 첫 번째 생각입니다. 이 작품은 마리오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영화라는 그릇을 빌린 [마리오]였기 때문이죠. 좋게 말하면 칼 같은 손익계산에 힘입은 영리한 초정밀 타게팅 상품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박하게 말한다면 팬심에 절대적으로 기대는 서비스 덩어리라 해도 무리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하다못해 마리오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마리오가 벌이는 '이 영화만의 특별한 모험'을 기대한 사람들을 위한 요소는 그냥 전무하다 해도 무방..

Film/Animation 2023.05.18

눈보라빛 향기 _ 플레이온, 고동환 / 송하연 / 강선우 감독

# 0. 그대 모습은 눈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고동환, 송하연, 강선우 감독, 『플레이온 :: PLAY ON』입니다. # 1. 최근 왓챠는 단편에 진심입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생존전략이긴 하겠지만요. 여하튼 매주 양질의 단편을 10여 편 이상 꾸준히 추가하고 있는데요. 참 잘했어요. 이번 주에는 10분 안쪽의 애니메이션이 왕창 올라왔네요. 30년 차 게임 폐인의 니즈를 자극하는 작품이 보이길래 즐거운 마음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 2. 균형이 돋보이는 말랑말랑 애니메이션입니다. 직관적인 인상은 라이엇의 롤과 블쟈의 하스, 슈퍼셀의 클래시 시리즈의 중간 어딘가의 느낌적인 느낌입니다. 실제 그런 게임들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겠으나, 한국과 일본 등 동양 애니메이터의 표현보다는 ..

Film/Animation 2022.07.0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_ 별의 목소리, 신카이 마코토 감독

# 0. 감독의 날것 그대로를 맛보고 싶다면 언제나 데뷔작 만한 게 없죠. '신카이 마코토' 감독, 『별의 목소리 :: ほしのこえ』입니다. # 1.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며 스펙트럼을 과시하는 감독들도 있습니다만,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하나의 브랜드처럼 만들어 반복적으로 가다듬고 심화시키는 감독들도 있습니다. 때론 지루하다거나 심지어 자기 복제 아니냐라는 가혹한 평을 듣기도 하지만 대신 필모그래피를 천천히 따라가는 동안 한 인간의 철학과 깊이 있게 소통하는 감동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죠. '신카이 마코토'는 대표적인 감독 중 하나라 할 법합니다. 그중에서도 데뷔작 는 작품 철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겠죠. 심각하게 못생긴 인물 작화 정도를 제외하면(...) 이후 반복적으로 발견하게 되..

Film/Animation 2022.01.29

12월 26일 _ 유령신부, 팀 버튼 감독

# 0. 박싱 데이(Boxing Day) 또는 성 스테파노의 날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12월 26일)을 가리키는 말로, 많은 영연방 국가에서 크리스마스와 함께 휴일로 정하여 성탄 연휴로 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공휴일로 정하고 있다. 독일, 스웨덴 등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라고 단순하게 부른다. - 위키백과 [박싱데이] 중에서 - '팀 버튼' 감독, 『유령신부 :: Corpse Bride』입니다. # 1. 헨리 셀릭의 을, 팀 버튼의 내면을 구성하는 다양한 자아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소개드린 바 있습니다. 행복(크리스마스)을 선사하는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었던 팀 버튼(잭 스캘링턴)이 사람들에게 선택받지 못하자 분노(우기부기)에 휩싸이지만, 결국 분노를 제압하고 내면 깊은 ..

Film/Animation 2022.01.15

우와... _ 킥-하트,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

# 0. 중 마지막 단편이자, 이 옴니버스의 존재 이유입니다.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 『킥-하트 :: キックハート』입니다. # 1. 감각을 극대화하는 표현들 간의 균형. 거친 팬 선으로 그려낸 과격한 묘사와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탁월한 미감. 노골적인 퇴폐 안에 담긴 지독한 솔직함과 솔직함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순간의 폭발력. 고아원을 돕는 가면 레슬러라는 무던한 클리셰와, 등장인물의 정서를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치환하는 도발적 해석을 병렬적으로 연결 짓는 발상. 단 한 컷도 낭비하지 않는 고밀도 전개와 단 1초도 낭비하지 않는 끈끈한 작풍과 사운드. 지저분하게 남기는 바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끝맛까지. 짧은 런타임이 무색할 만큼 인상적인 완성도의 작품입니다. 어렵고 난해한 길을 고유의 스타일로 ..

Film/Animation 2021.10.01

핑퐁 _ 거미 소녀, 카이야 토시히사 감독

# 0. 중 두 번째 단편입니다. '카이야 토시히사' 감독, 『거미 소녀 :: わすれなぐも』입니다. # 1. 앞선 에 비하면 훨씬 말랑말랑한 작품입니다. 옴니버스 중간에 낀 작품 종특이죠. 흔히 제페니메이션하면 크게 세 부류를 떠올리실 텐데요. 허무주의적인 건조한 메시지와 절제된 감정 표현 중심의 작품들이 있을 테구요. 사이버 펑크나 스팀 펑크스러운 세계관 위에 특유의 꿈도 희망도 없는 음울한 밀레니엄 감성을 끼얹은 작품들을 꼽을 수도 있겠죠. 그치만 대부분은 짧은 호흡의 상업적 공식에 충실한 점프식 소년만화들의 애니메이션을 떠올리실 겁니다. 지금의 이 작품 역시 세 번째 범주를 충실히 따라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 2. 익숙한 일본풍 요괴 전설을 삽화 형식으로 소개한 후 현대 배경의 두 주인공..

Film/Animation 2021.09.29

소녀의 선택 _ 피그테일, 이타츠 요시미 감독

# 0. 오랜만에 옴니버스, 그것도 애니메이션이군요.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이타츠 요시미' 감독, 『피그테일 :: Pigtails』입니다. # 1. 푸른 들판 한가운데 놓인 외딴집입니다. [평온]과 [고립]이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시작부터 위화감을 조성합니다. 소녀는 빨래를 널고 있습니다. 빨래집게들이 다투는군요. 오래된 붉은 것들과 새로운 하얀 것들의 대립입니다. 오래된 것들로부터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읽힙니다. 새로운 것들은 낡은 것들을 존중 없이 배타합니다. 결국엔 서로를 파괴하는 단절로 이어집니다. 부서진 두 빨래집게를 맞대는 피그 테일의 소녀. 소녀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잇는 사람입니다. 칫솔입니다. 모가 상해버린 오래된 낡은 칫솔 두 개가 꽂힌 컵에 새로운 칫솔 하나가 더해집니다..

Film/Animation 2021.09.25

세상이 창조되던 순간까지 _ 키리쿠와 마녀, 미셸 오슬로 감독

# 0. 벨기에 영화인데 배경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입니다. 감독이 유년기를 아프리카에서 보냈다는 말이 있던데 정확한지는 모르겠군요. 그 덕분인지 인종차별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벨기에 답지 않게 차별적 - 단정적 시선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참 잘했어요. '미셸 오슬로' 감독, 『키리쿠와 마녀 :: Kirikou et la Sorciere』입니다. # 1. 애니메이션 동화입니다. 다양한 세부 장르들 가운데서도 특히 고전적이고 토속적인 톤의 작품입니다. 문학적 은유나 기하학적 구도의 표현이 풍부한 현대 작가주의적 영화들과는 달리 고전 영화들의 그것처럼 메시지는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되어 있습니다. 선입견 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흔히 아프리카 토속 문화 예술하면 떠올릴 법한 특유의 분위기가 매우 잘..

Film/Animation 2021.07.03

음란마귀 테스트 _ 아, 이성환 감독

# 0. (삐슝빠슝) 충격!! 무섭고 야한 레고 영화가 있다?!?!?! '이성환' 감독, 『아 :: Ah』입니다. # 1.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입니다. 5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꼬꼬마들이 좋아할 법한 서른 개 남짓의 레고 블록이 이리저리 조합됩니다만, 그 속엔 섹스와 범죄와 폭력과 총기와 전쟁과 사고와 SF 등의 과격한 표현이 난무합니다. 분명 블록들은 그저 특정한 좌표 위에 배치되어 있을 뿐입니다. 각기 다른 색깔의 레고 블록들은 상호 교류하는 바 없이 자신의 공간만을 중립적으로 점유하고 있죠. 실제 영화를 프레임 단위로 멈춰 보면, 의 오마주인 듯한 노골적 형상의 기계 로봇 정도를 제외하면 의미를 읽을 수 없는 표현이 다분합니다. 스스로 과격함을 만들지 않고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라는 등급으로 완성..

Film/Animation 2021.06.07

그대가 원하면 _ 언어의 정원, 신카이 마코토 감독

# 0.  なるかみの すこしとよみて さしくもり あめもふらぬか きみをとどめむなるかみの すこしとよみて ふらずとも わはとどまらむ いもしとどめば 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니 드리운 구름에 비라도 오려나. 당신을 붙드네.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고 비님이 안 와도 이 몸은 있겠네. 그대가 원하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언어의 정원 :: 言の葉の庭』입니다.     # 1.  스타일이나 장르와 무관하게 일정 궤도 이상에 오른 감독 대부분은 상당한 수준의 치밀함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때론 중2병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감성적인 작품을 하는 신카이 마코토 역시 예외는 아니죠. 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논리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감히, 엄격한 형식논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분법적..

Film/Animation 2021.06.05

습작의 정석 _ 쇼트피스, 모리모토 코지 감독 외 4인

# 0. 한 마디로 깔끔하게 소개할 수 있을 작품입니다. 그림 즐기는 영화. 며칠 전 에서 메시지고 나발이고 연기를 즐기시라 말씀드렸는데요. 이 작품은 메시지고 나발이고 영상미를 즐기시라 말씀드려야겠네요. '모리모토 코지' 감독 외 4인, 『쇼트피스 :: ショート・ピース』입니다. # 1. '모리모토 코지' 감독 특유의 아방가르드한 오프닝입니다. 신사 앞에 엎드린 소녀가 토깽이 따라가더니 신시사이저 음악에 맞춰 옷 갈아입습니다. 언제나처럼 뭔 의미인지는 쥐뿔 모르겠습니다만 언제나처럼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거겠죠. 특유의 가슴 뛰게 하는 분위기와 이미지, 그거면 충분합니다. 이어 '모리타 슈헤이' 감독의 ,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 '안도 히로아키' 감독의 , '카토키 하지메' 감독의 의 네 ..

Film/Animation 2021.05.06

Like a Frame _ 수브니어 애니메이션, 강민지 감독

# 0. like a flame~ you got music and the rhythm burning in my mind~ can't let go, you pull me deeper~ (i'm) dropping like the melting snow. you want it all~ don't wanna fall~ you got me just the same. all i know, your passion burns me like a flame~ '강민지' 감독, 『수브니어 애니메이션 :: Souvenir Animation』입니다. # 1. 수학에서는 을, 두 점 사이를 최단거리로 잇는 점들의 집합이라 정의합니다. 같은 기준에서 은, 특정한 두 시점을 잇는 '순간'들의 집합이라 말할 수 있겠죠. 과거와 현재,..

Film/Animation 2021.04.27

인형의 집은 정답이 아냐 _ 마루 밑 아리에티,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 0.  토토로 받고! 아리에티 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마루 밑 아리에티 :: 借りぐらしの アリエッティ』입니다.      # 1.  며칠 전 를 리뷰하며 '무서움'에 관한 영화라 말씀드렸습니다. 유년기에 경험할 수 있는 무서운 경험들을 소집한 후, 그 무서움을 한 발짝 넘어서게 만들었던 용기의 구체화로서 토토로와 교감하는 영화라고 말이죠. 같은 기준에서라면 이 영화는 '외로움'에 대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새삼 지브리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구체적이고 편안한 정서를 하나 딱 짚어 풍부한 상상력으로 감싸 안는 이야기를 참 맛깔나게 잘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파편화되어 있는 소위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부모가 일찍 이혼한 탓에 아버지는 거의 본 적..

Film/Animation 2021.04.20

무섭지 않아 _ 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0.  감독의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심지어 이 영화를 인생 영화로 꼽으시는 분들도 적지 않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웃집 토토로 :: となりの トトロ』입니다.     # 1.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을 안정적인 소재, 뛰어난 완성도의 작품입니다만 의외로 "무슨 이야기의 영화야?"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음... 아빠랑 딸 둘이 시골집에 이사 가서... 토토로라는 다람쥔지 뭔지 모를 푹신한 애를 만나는 데... 아니, 엄마 있어, 근데 아파서 병원에 있지. 어쨌든, 음... 나중에 고양이 모양 버스도 나오고... 아니, 그냥 니가 직접 봐! 진짜 재밌어!" 라는 식으로 얼버무려 본 분들 제법 있으실 테죠.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Film/Animation 2021.04.15

안경을 흘러내리는 그림자 _ 할아버지 할머니의 봄, 박재인 감독

# 0.  살찐 고양이입니다. 선풍기에 발이라도 넣었던 듯 붕대가 메여 있네요. 초여름의 기분 좋은 족욕입니다. 쓰다듬 듯 커튼을 흔드는 바람입니다. 빵 종이의 바스락 거림입니다. 화분을 어루만지는 햇살입니다. 녹아내려 달그락 흔들리는 설탕입니다. 안경을 흘러내리는 그림자입니다.         '박재인' 감독,『할아버지 할머니의 봄 :: Our Spring』입니다.     # 1.  문득 올려다보는 가을의 높은 하늘입니다. 책장에서 삐져나오는 낙엽입니다. 소담하게 나누는 차 한잔입니다. 겨울의 바게트와 수프. 오늘의 저녁거리는 고구마 대신 단호박입니다. 매일같이 산책하던 길에 걸터앉아 즐기는 가을의 낙엽. 한점 한점 나눠 먹는 샤부샤부. 눈사람의 코가 되어버린 당근입니다. 남겨진 발자국입니다. 신중하게 ..

Film/Animation 2021.04.13

일생 ⅱ _ 붉은 거북, 미카엘 뒤독 더 빗 감독

이전글 : 일생 ⅰ _ 붉은 거북, 미카엘 뒤독 더 빗 감독 # 0. 고요하면서 웅장합니다. 섬세하면서 장엄합니다. 간결하면서 화려하고, 차분하면서 격렬합니다. 명료하지만 동시에 대단히 치밀하고, 단순하지만 더없이 디테일하기도 합니다. 누구도 아무 morgosound.tistory.com # 14. 첫 번째, 두 번째 장까지의 영화 전반부는 문학적 - 미학적인 파트였다 한다면, 지금부터의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직설적이며 서사적입니다. 심미적인 시퀀스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전반부와 같은 구성이 영화 끝까지 계속 이어졌다면 제법 피곤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관객 경험을 고려한 영리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군요. 세 번째 장은 입니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는 섬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 외로움의 ..

Film/Animation 2021.01.22

일생 ⅰ _ 붉은 거북, 미카엘 뒤독 더 빗 감독

# 0. 고요하면서 웅장합니다. 섬세하면서 장엄합니다. 간결하면서 화려하고, 차분하면서 격렬합니다. 명료하지만 동시에 대단히 치밀하고, 단순하지만 더없이 디테일하기도 합니다.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편안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함의는 깊을 사색을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 '미카엘 뒤독 더 빗' 감독, 『붉은 거북 :: La tortue rouge』입니다. # 1. 언어는 논리입니다. 체계입니다. 계산적일 수밖에 없으며, 정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무리 창의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약속된 어휘가 허락한 사고의 틀을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화에 음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없다는 것은, 단순히 는 것 ..

Film/Animation 2021.01.20

'거의' 완벽한 단편 _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윌 맥코맥 감독

# 0. "굉장히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영화인데... 다들 아실 거라 믿어요... 너무 크~은 단점을 갖고 있어요. 그 큰~ 단점이 장점들을 다 먹어요(?)" '윌 맥코맥', '마이클 고비어' 감독,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입니다. # 1. 거의 완벽한 단편입니다. 감수성을 자극하는 펜선의 질감이 인상적입니다. 화풍은 특별히 과장되지도 특별히 빈곤하지도 않아 정서와 서사에 편안하게 안착하도록 돕습니다. 물리적인 움직임과 이면에 담긴 심정을 표현한 그림자가 분리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지는 연출은 능숙합니다. 현실의 공간과, 기억 속 공간과, 심리적 공간을 문학적으로 넘나들고 교차하고 어우러지는 모습이 유려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분노와 스..

Film/Animation 2020.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