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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소녀의 선택 _ 피그테일, 이타츠 요시미 감독

그냥_ 2021. 9. 2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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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오랜만에 옴니버스, 그것도 애니메이션이군요. <피그테일: 피그테일과 거미 소녀 그리고 레슬링>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이타츠 요시미' 감독,

『피그테일 :: Pigtails』입니다.

 

 

 

 

 

# 1.

 

푸른 들판 한가운데 놓인 외딴집입니다. [평온]과 [고립]이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시작부터 위화감을 조성합니다. 소녀는 빨래를 널고 있습니다. 빨래집게들이 다투는군요. 오래된 붉은 것들과 새로운 하얀 것들의 대립입니다. 오래된 것들로부터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읽힙니다. 새로운 것들은 낡은 것들을 존중 없이 배타합니다. 결국엔 서로를 파괴하는 단절로 이어집니다. 부서진 두 빨래집게를 맞대는 피그 테일의 소녀. 소녀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잇는 사람입니다.

 

칫솔입니다. 모가 상해버린 오래된 낡은 칫솔 두 개가 꽂힌 컵에 새로운 칫솔 하나가 더해집니다. 낡은 것들은 부모가 사용하던 칫솔, 새로운 것은 소녀가 사용할 칫솔입니다. 부모가 사용하던 칫솔은 낡은 칫솔이지만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자신이 사용하던 칫솔은 낡아지자 버려져 교체되었죠. 칫솔의 은유는 낡은 것들 속에서 다시 [의미 있게 낡은 것들][의미 없게 낡은 것들]을 구분합니다. 기준은 기억입니다. 기억 역시 연결입니다.

 

# 2.

 

사물의 의인화가 극 전반을 이끌어 나깁니다. 인물들은 tv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사물들만이 수다스럽게 말합니다. 사물과 사람 사이의 구분은 서서히 붕괴됩니다. 사물이 되어버린 사람의 이야기군요.

 

 

 

 

 

 

# 3.

 

소년은 삐져나온 쓰레기를 철창 너머 더미에 욱여넣는 모습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칫솔을 버리지 못하는 소녀와 대조적이죠. 소년에게 사물은 사물일 뿐입니다. 사용성이 떨어진 사물은 버려야 합니다. 소년은 사물들로부터 자신을 격리합니다. 그가 만지는 유일한 사물은 진실을 전해줄 수 있는, 아직 용도가 남은 tv 뿐이죠. 사물을 평가하는 건 사용성입니다. 소년은 스스로 사물이 될 수 없다 생각합니다.

 

소녀에게 사물은 그저 사물이 아닙니다. 사용성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연속성이 남아있다면 의미를 가집니다. 소녀는 사물과 함께 살아나갑니다. 그녀의 집 안에는 쿠션, 우산, 빨래집게, 칫솔, 인형 등 수많은 사물들이 함께 합니다. 사람과 사물은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소녀는 사물과 함께 살고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인격입니다.

 

# 4.

 

편지와 우체통입니다. 편지를 배달하는 소년은 소녀에게 수줍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소년은 쓰레기 더미 옆에 살고 있고 소녀는 푸른 들판 한가운데 살고 있지만 두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노래를 부르며 교감합니다. 감독은 두 견해를 대립하는 관계로 상정하지 않습니다. 상보적인 관계, 사랑하는 관계로 규정합니다.

 

소녀의 집에 조사관들이 방문합니다. 그들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해 듣게 될 [진실]을 방해합니다. 벽 너머 날아든 풍선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거합니다. 조사관은 진실을 숨기는 사람. 벽 너머 세상과 소녀를 분리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엄격한 조사관들조차 침대 아래 숨은 소년도,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도, 소녀의 침실에 숨어든 풍선도 완벽히 차단하지는 못합니다. 진실은 차단할 수 없습니다.

 

 

 

 

 

 

# 5.

 

풍선이 진실을 들려줍니다. 소녀가 있는 세상의 이름은 [목장]이었습니다. 신체 이식을 위해 건강하게 관리된 샘플들이 [사육]되는 공간입니다. 조사관은 [상품]의 품질 관리자인 셈입니다. 고객은 돈 많은 소수의 부자들입니다. 수요가 발생하면 담장 너머로 옮겨져 최후의 순간을 달래기 위한 성대한 파티를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상품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갈기갈기 분해되어 판매됩니다. 어찌나 알뜰한지 남는 부위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군요.

 

의자 쿠션과 우산은 놀라는 눈치지만, 이음새가 터지기 직전의 곰인형만큼은 이 사육 시스템을 긍정합니다. 곰인형의 말은 썩 합리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어차피 터지면 사라질 봉제인형 속 솜은 솜이 부족한 멀쩡한 인형의 속을 채우는 편이 낫습니다. 아직 터지지 않은 남은 천으로 새로운 인형을 만들 수 있다면 좋습니다. 하나의 인형을 알뜰히 써 여러 개의 인형을 살릴 수 있다면 경제적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곰인형에게라면 말이죠.

 

# 6.

 

진실을 알게 된 소년은 탈출을 감행합니다. 탈출에 성공한 소년은 소녀를 찾아갑니다. 벽 너머의 세상으로 달아나자 말하는 소년. 그 순간 소녀의 집에 있던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소녀에게 "도망가"라 말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앞서의 곰인형이 가장 먼저 도망가라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성의 상실을 긍정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되려 인간성의 상실에 자조하는 작품 쪽에 가깝다 할 수 있죠.

 

무수히 많은 쓰레기들이 그녀에게 도망가라 말합니다. 사다리를 오르려는 찰나 낡은 전등이 깨집니다. 전등은 부서진 자신을 신경 쓰지 마라 말합니다. 사물의 주검 위에 소년은 올라서고, 소녀는 추락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끝내 알 수 없습니다. 영화의 제목 역시 그녀의 모습을 대표하는 단어, 피그테일이죠. 그녀는 사람과 사물의 중간자적 인격입니다.

 

 

 

 

 

 

# 7.

 

"무엇이 소녀를 집으로 돌아오게 만들었을까"

 

 

라는 질문 하나를 위해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차분하게 침전되는 분위기의, 쓰레기 더미 위로 소녀가 스스로 추락하기 직전까지의 전개는 모두 이 질문 하나를 위한 이미지 쌓기라 할 수 있죠. 영화의 모든 동력을 마지막 소녀의 선택에 집중한 영화이니만큼 여기서 어떤 답을 가져갈 수 있느냐에 따라 감상평이 극단적으로 갈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만약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바본가? 죽어도 좋다는 건가?' 라는 정도의 심드렁한 관객이라면 상당히 지루한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겠네요.

 

# 8.

 

개인적으로 다각적 이해를 시도해 볼 여지는 충분해 보입니다. 소녀의 순수성과 수동성을 중심으로 자조적인 뉘앙스를 읽어 천민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로 재구성해 볼 수도 있을 테구요. 오프닝의 환경과 조사관들의 차림새 따위에서 읽을 수 있을 후쿠시마를 연상케 할 재난 코드에 집중해 이를 극복하는 방식에 대한 건조한 메시지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테죠.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기 전까지 소녀는 사물이었을까 사람이었을까. 혹은 스스로 목장에 남기로 선택한 순간 그녀는 비로소 사람이 된 걸까. 혹은 그 이전에 사람과 사물을 구분케 하는 건 무엇인가. 라는 질문 따위를 중심으로 인간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고찰을 전개해볼 수도 있어 보이는군요. 여러모로 해석이 열려있으니 만큼 관객 나름대로의 감상을 가져갈 수 있다면 좋을 듯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이타츠 요시미' 감독, <피그테일>이었습니다.

 

# +9. 모르긴 몰라도 적잖은 분들이 <아일랜드>라는 희대의 걸작(...)이 떠오르지 않으셨을까 싶긴 합니다. 물론 마거장님이었다면 마지막 담장 위에 서서 외딴집을 폭탄으로 터트린 후 헬리콥터를 불러다 커플을 탈출시키며 농염한 키스신으로 마무리하셨겠지만요. 매번 느끼지만 여러모로 참 대단한 감독입니다.

# +10. "계속 살아가야 해요. 당신이 어렸을 때 약속했듯이 달콤한 과자의 유혹에 단단한 껍질을 깨고 말았어요. 파스텔 드레스를 입고 마음의 주름이 나부끼네요. 어딘가 누군가는 이 길을 보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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