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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그대가 원하면 _ 언어의 정원, 신카이 마코토 감독

그냥_ 2021. 6. 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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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なるかみの すこしとよみて さしくもり あめもふらぬか きみをとどめむ

なるかみの すこしとよみて ふらずとも わはとどまらむ いもしとどめば

 

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니 드리운 구름에 비라도 오려나. 당신을 붙드네.

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고 비님이 안 와도 이 몸은 있겠네. 그대가 원하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

『언어의 정원 :: 言の葉の庭』입니다.

 

 

 

 

 

# 1.

 

스타일이나 장르와 무관하게 일정 궤도 이상에 오른 감독 대부분은 상당한 수준의 치밀함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때론 중2병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감성적인 작품을 하는 신카이 마코토 역시 예외는 아니죠. <언어의 정원>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논리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감히, 엄격한 형식논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분법적 구조라 정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이야기는 작중에서도 주요하게 다뤄지는 만요슈(萬葉集)의 두 구절로 요약됩니다. 전반부는 유키노가 읊은 구절의 구체화입니다. 몇 날 며칠에 걸쳐 장맛비가 내리는 정원에서 비에 붙들린 당신과 나누는 교감이죠. 후반부는 아키즈키가 답으로 찾은 구절입니다. 장마가 끝난 후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음에도 당신이 원하면 이 몸은 기꺼이 곁에 있겠노라는 의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증명하는 서사라 할 수 있습니다. 비를 기다리던 두 사람이 비를 찾아가는 이야기인 셈이랄까요.

 

 

 

 

 

 

# 2.

 

영화는 몇몇의 논리적 메타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걸음과 구두. 맥주와 초콜릿. 비와 정원 등이죠.

 

'걸음을 걷지 못한다'는 것은 미숙함을 뜻합니다. 갓난아기들이 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유키노는 사회적으로나 또 정서적으로나 자립하는 걸 버거워하는 미숙한 인격입니다. 그녀는 학교에서 겪은 이지메의 트라우마로 인해 미각장애를 앓고 있는데요. 간신히 맛을 볼 수 있는 게 하필 맥주와 초콜릿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맥주는 정장을 입은 성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 등의 외면을 뜻합니다. 초콜릿은 몸만 커버린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내면을 상징합니다. 첫 만남에서 아키즈키는 처음 보는 그녀의 식성에 위화감을 느끼는데요. 이는 표면적인 괴식뿐 아니라 그녀의 미성숙함이 만들어낸 내-외면 사이의 괴리감을 발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보다 합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역시 괴리감에 고통받는 인격이기 때문이죠.

 

구두는 걸음을 내딛게 될 발을 감싸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기성화가 아니라 수제화를 직접 만들고 싶어 한다는 설정은 아키즈키가 추구하고자 한 보호의 이미지를 보다 강화합니다. 누구도 신어주지 않는 구두는 쓸모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줄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말하는 대목이라거나 스스로의 스케치를 부끄러워하는 장면은 그 역시 그가 가진 보호의 의지와 별개로 미숙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키즈키가 구두를 만드는 공간을 쓸쓸하고 어둡게 묘사한다거나 구두를 대하는 동안은 시종일관 뒷모습으로만 묘사되는 건 미숙함을 증명하는 미장센들이라 할 수 있겠죠.

 

그는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과 보호받아야 하는 처지가 결합된 인물입니다. 동시에 누군가를 보호하는 구두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의 이면에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 주었으면 하는 갈증이 역으로 투사되어 있는 자기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하죠. 고백을 거절당한 후 실망한 아키즈키가 마음에도 없는 험한 말을 토해내는 결말은 이 인물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3.

 

두 주인공이 공유하는 정서는 미숙함과, 미숙한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빠지게 될 고독감입니다. 영화는 고독한 존재들이 서로의 고독을 발견하고 구원하는 동안의 사랑인 것이죠. 중반부, 비와 언어의 정원에서 아키즈키는 구두를 만들기 위해 유키노의 발을 재는데요. 이는 각자가 가진 미숙함이 상대의 미숙함을 채우는 교감으로 승화되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가장 강하게 투영된 핵심적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아름다운 곡선의 발에서 사춘기 소년의 이성에 대한 순수한 욕망 또한 일부 투사되긴 하지만요.

 

감정적 표현에 주저함이 없는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맥스에서 철없는 키스신 따위 없이 오열만으로 묘사된다는 것 역시 인상적입니다. 감독은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이란 이성애적 사랑이 아니라 미숙한 인격들 간의 깊은 공감과 연민에 닿아있는 사랑이라 정의합니다. 유키노는 아키즈키가 자신을 구원해 주었노라 소리쳐 말하지만 아키즈키가 만든 구두가 완성되어 유키노의 발을 감싸 안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미숙함은 자신의 힘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감독의 단호한 의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하긴 하지만 구두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씬이 하나 있는데요. 형 쇼우타의 애인 리카가 나중에 자신도 구두를 하나 만들어달라 해야겠다 말하는 장면입니다. 만약 이 장면의 의미를 모든 사람들은 구두가 필요한 사람,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로 이해한다면 감독은 어쩌면 이 신을 통해 영화의 서사를 특별히 미숙한 존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미숙한 존재들을 위한 이야기로 승화시키고자 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네요.

 

 

 

 

 

 

# 4.

 

영화 속 비는 중의적 의미로 활용됩니다. 기본적으론 '슬픔과 우울함 따위의 부정적 정서'를 의미하구요. 한 방향으로 쏟아져 내리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죠. 비가 오는 동안에만 만날 수 있는 '희망에 대한 역설'과,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보는 동안의 '시원하고 후련한 해방감'이 읽히기도 합니다. 적당히 조합하면 우리 모두 필연적으로 미숙하게 태어난 존재들이며 그런 미숙한 존재들에게 있어 고독감이란 쏟아져 내리는 비처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외로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나눌 수 있는 서로를 만나 힘껏 다가갈 수 있다면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서로에게 닿게 될 것이라는 작품의 핵심 메시지로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겠네요.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고독을 없애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고독한 존재들이지만 더 이상 하늘에 천둥이 여리게 울리고 비님이 안 옴에도 마음이 닿아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대가 원하면 충분하기 때문이죠. 절규하는 아키즈키에게 맨발의 유키노는 계단을 '내려'옵니다. 영화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필연성을 의미합니다. 감독은 고독한 존재들에게 당신의 고독을 채워줄 사람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리라 응원합니다.

 

 

 

 

 

 

# 5.

 

관객 경험의 측면에서 언제나처럼 시각적 표현이 탁월한 작품입니다만 그럼에도 청각적 만족감이 더욱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쏟아져 내리는 비의 소리와 피아노 선율이 관객의 내면에 숨겨진 미숙함과 외로움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로맨스나 멜로의 아이템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만 괴리된 존재들의 고독과 구원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로서 해석될 여지가 더 풍부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멍청한 얼굴로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고 있을 고독하고 미숙한 당신에게, 언젠가 언어의 정원에서 비를 함께 맞아줄 운명을 만나게 되리라는 따뜻한 위로 말이죠. '신카이 마코토' 감독, <언어의 정원>이었습니다.

 

# +10. 두번째 문단의 만엽집 시구 번역은 왓챠의 자막에서 가져왔습니다. 직접적이고 정확한 번역이 아닌 줄은 압니다만,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는 다른 번역에 비해 3-3 운율을 맞추려 노력한 맛이 더 좋았기 때문이죠. 따라서, 태클 ㄴㄴ :)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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