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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인형의 집은 정답이 아냐 _ 마루 밑 아리에티,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그냥_ 2021. 4.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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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토토로 받고! 아리에티 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마루 밑 아리에티 :: 借りぐらしの アリエッティ』입니다. 

 

 

 

 

 

# 1.

 

며칠 전 <이웃집 토토로>를 리뷰하며 <무서움>에 관한 영화라 말씀드렸습니다. 유년기에 경험할 수 있는 '무서운 경험들'을 소집한 후, 그 무서움을 한 발짝 넘어서게 만들었던 '용기'의 구체화로서 '토토로'와 교감하는 영화라고 말이죠. 같은 기준에서라면 이 영화는 <외로움>에 대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새삼 지브리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구체적이고 편안한 정서를 하나 딱 짚어 풍부한 상상력으로 감싸 안는 이야기를 참 맛깔나게 잘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파편화되어 있는 소위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부모가 일찍 이혼한 탓에 아버지는 거의 본 적도 없고 엄마마저 바빠 보기 힘든 소년 쇼, 자신의 가족 외엔 다른 소인족을 만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는 아리에티의 가족은 물론이구요. 심지어 밉상 하루 아줌마 마저 오래전 소인을 봤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외로운 사람이죠.

 

 

 

 

 

 

# 2.

 

흥미로운 점은 외로움에 대한 영화들 대부분 외로운 존재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귀결되는 데 반해, 이 영화는 잠시의 위로만 주고받을 뿐 자신의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입니다. 아리에티가 떠난 후 쇼는 여전히 혼자 남겨진 소년입니다. 아리에티의 앞날은 호화스러운 인형의 집에 비한다면 한없이 비루하고 위태로울 테죠. 쇼의 외할머니 사다코 역시 오래도록 소인을 만나고 싶었지만 끝내 작은 허브잎으로 만족해야 했구요. 타인의 외로움을 연민으로 대하거나, 타인을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인형의 집>은 끝내 소인족에게 좋은 답이 될 수 없었죠. 외로움을 부정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정]하는 영화인 셈입니다.

 

"외롭지 않아요. 모두 함께 모여 놀아요. 북적북적하고 풍요로우면 적당히 좋잖아요." 대신 "혼자인 당신도 썩 나쁘지 않아요. 외로운 사람들이 당신 말고도 많이 있어요. 멀리서나마 가끔 연락하고 마음으로 응원만 해도 좋아요. 도움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해요."

 

라는 메시지인 셈인데요. 90년대 전후에 만들어졌던 오래된 지브리의 작품들에 비한다면 약간은 더 회의주의적이기도 하고 방어적이기도 한 메시지군요. 아무래도 2010년대 저성장 시대의 시대정신이 일부 반영된 메시지 변화라 할 수 있겠죠.

 

 

 

 

 

 

# 3.

 

쇼의 심장수술이라는 설정은, 외할머니 집에 요양을 왔다는 배경과 아리에티의 엄마 호밀리를 구하는 시퀀스에서의 헐떡거림 정도를 제외하면, 서사상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데요. 이질적인 속성이 있음에도 이야기 속에서 기능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메시지를 위한 메타포일 가능성을 점검해 보는 게 합리적일 겁니다.

 

이를테면 앞서 말씀드린 <외로움>을 <심장이 아프다>라는 상태로 은유하고 있다 바라보는 것이죠. 홀로 어딘가 기대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외로운 소년이 누군가의 외로움을 위해 뛰는 순간 '약한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한다'는 대목이나, 마지막 "아리에티. 넌 이미 내 심장의 일부야. 잊지 않을게. 영원히." 라는 대사는 두 주인공 사이의 인격적 사랑뿐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정서에 대한 감독 나름의 해석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 4.

 

기본적으론 소소한 개인들의 영화입니다만 동시에 집단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합니다. 너희 종은 결국 멸종당하게 될 거라느니 하는 불꽃 패드립은, 이 영화를 쇼와 아리에티라는 개인 간의 영화가 아니라 인간 대 소인의 집단적 이미지로도 이해해달라 노골적으로 힌트를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죠.

 

이 해석에서는 소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관객 나름대로 떠올릴 소통할 여지가 열려 있으나 서로 마음을 닫고 있어 분리되어 있는 둘 이상의 집단이라면 어느 것이든 좋겠죠. 세대가 될 수도 있을 거구요. 국적이 될 수도 있을 테죠. 인종이나 계급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모두 썩 자연스럽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글을 읽어주실 여러분 각자의 상상에 남겨두는 편이 좋겠네요.

 

 

 

 

 

 

# 5.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르적인 면을 조금 이야기해 볼까요. 쇼와 아리에티의 각기 다른 두 스케일에 대한 과감한 시점 전환과, 평범한 아이템들이 낮은 곳에서 등장할 때의 이질적 감각을 묘사하는 솜씨는 설사 감독이 다르다 하더라도 과연 지브리의 결과물이라 할법합니다. 

 

아리에티가 첫 빌려오기를 하는 동안의 어드벤처나, 소인의 시선에서 느껴진 인간의 육중한 움직임에 대한 표현, 쇼의 어깨에 올라탄 아리에티를 표현하는 시퀀스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특히나 소인의 눈으로 본 인형의 집 부엌에 대한 묘사. 분명 작은 물건이지만 소인의 눈엔 평범하게 보여야 하는 실물처럼 크게 보이는 미니어처의 미묘한 크기 감각을 표현하는 능력은 과연 탁월합니다.

 

<천공의 섬 라뷰타>나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들을 수 있었던 특유의 맑으면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음악 대신 상대적으로 흐리고 서정적이며 하늘하늘한 세실 코벨의 음악이 이전까지의 지브리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이색적인 청각 경험을 제공합니다. 호불호를 탈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퀄리티만큼은 확실하니 한 번쯤 찾아들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 6.

 

언제나처럼 안정적인 완성도의 애니메이션입니다. 특유의 섬세한 시선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메시지는 매력적이고 또 효과적입니다. 3D의 디테일과 광원 이펙트로 승부를 보는 요즘 애니메이션 메타 가운데서도 고고하게 자기 가치를 증명합니다. 이러나저러나 믿고 보는 지브리죠.

 

다만 이야기를 펼치기 위한 환상적인 공간을 창조해내는 상상력과 자유로움은 여타 작품에 비해 조금 빈곤하다는 것까지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사이에서는 충분히 훌륭할 수작입니다만, 지브리들 가운데선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해야겠군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마루 밑 아리에티>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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