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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일생 ⅰ _ 붉은 거북, 미카엘 뒤독 더 빗 감독

그냥_ 2021. 1.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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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고요하면서 웅장합니다. 섬세하면서 장엄합니다. 간결하면서 화려하고, 차분하면서 격렬합니다. 명료하지만 동시에 대단히 치밀하고, 단순하지만 더없이 디테일하기도 합니다.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편안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함의는 깊을 사색을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

 

 

 

 

 

 

 

 

'미카엘 뒤독 더 빗' 감독,

『붉은 거북 :: La tortue rouge』입니다.

 

 

 

 

 

# 1.

 

언어는 논리입니다. 체계입니다. 계산적일 수밖에 없으며, 정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무리 창의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약속된 어휘가 허락한 사고의 틀을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화에 음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없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언어가 품고 있는 가치 일체를 함께 걷어내겠다는 뜻을 포괄하고 있죠. 논리보다는 감각을 중심으로. 경험을 뛰어넘는 창의력으로. 구조의 통제를 벗어나는 자유로움으로. 치밀한 구체성보단 폭넓은 보편성으로. 냉철한 이성 대신 섬세한 감수성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작가의 대담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 2.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케스트 어웨이> 역시 홀로 표류한 인간을 이야기합니다만, 감독은 구태여 '윌슨'이라는 가상의 인격을 만들면서까지 관객과 '언어'로 소통하려 합니다. 해당 작품이 무인도에 표류한 '척 놀랜드'라는 구체적 개인의 멘탈리티와 생존기를 최대한 상세하게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 3.

 

반면, 이 영화에서는 언어는커녕 생존을 위한 분투마저 생략되거나 심지어 미화되어 있는데요. 이는 소재만 동일할 뿐 그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 <붉은 거북>의 스토리텔링을 마치 <캐스트 어웨이>를 감상하는 것 마냥 쫀쫀한 디테일을 따라가는 서사구조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썩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형이상학적 관념을 둘러싼 감각적 은유가 낳는 풍부한 감수성을 탐미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죠.

 

이런 류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습관처럼 달곤 하던 단서입니다만, 지금부터의 이야기들은 모두 제 멋대로의 상상에 불과함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 4.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한 남자와, 붉은 거북에서 태어난 여자 간의 사랑을 통해 삶의 전반을 은유합니다. 영화는 크게 여섯 개의 장(章, Chapter)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요. 첫 번째 장에 이름을 붙인다면 <탄생> 정도가 적절해 보이는군요.

 

 

 

 

 

 

# 5.

 

오프닝은, 격랑 속에 홀로 태어난 인간의 운명론적 외로움을 은유합니다. 섬에 도착한 남자의 당황은 갓 태어난 존재가 맞닥뜨리게 될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은유합니다. 쏟아져 내리는 비의 슬픔과, 텅 빈 바위산에서 내려다보는 수평선의 고독을 은유합니다.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금세 사그라드는 외침의 허무함을 은유합니다. 고압적인 절벽 아래 갇힌 것만 같은 두려움과, 너머를 알 수 없는 바닷속 동굴을 힘겹게 헤쳐 나오는 것만 같은 시련을 은유합니다.

 

감독에게 있어 드넓은 우주 어딘가 '창백한 푸른 점' 위에 태어난 우리는, 마치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딴섬에 표류한 것만 같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 6.

 

모래사장을 헤집고 나오는 작은 아기 거북들은 이 첫 번째 장의 주제가 <탄생> 임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대목입니다. 밤바다를 눈 앞에 두고 긴 그림자와 함께 홀로 선 남자의 모습은 '탄생'이 가진 본질적 외로움을 은유합니다. 나자마자 죽고만 아기 거북을 게가 끌고 가는 장면은, 갓 태어난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현실의 냉혹함을 은유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삶에 대한 중립적 '진단'일 뿐 염세주의적 '주장'은 아닙니다. 감독은 생명이 박동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웅장한 음악과 멀리서 드리우는 따스한 달빛을 통해, <탄생> 속에 외로움뿐 아니라 이를 압도하는 숭고함이 함께 담겨 있음을 명확히 합니다.

 

 

 

 

 

 

# 7.

 

남자는 배를 띄워 섬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섬은 <로빈슨 크루소>에서와 같은 '지리학적 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치열한 생존을 위해서라거나, 바다 건너 만남을 약속한 누군가를 위해 배를 만든 것은 아니니까요. 앞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존재의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겁니다.

 

그는 그저 외로움만이 가득한 이 섬으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두 번째 장, <사랑>은 그렇게 남자의 뗏목과 함께 시작됩니다. 

 

 

 

 

 

 

# 8.

 

알 수 없는 이유로 대나무 뗏목이 수차례 부서집니다. 알고 봤더니 웬 붉은 거북 한마리가 뗏목을 부숴 남자가 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군요. 뗏목을 뒤따르는 붉은 거북의 등장 씬은, 영화에서 가장 웅장하고 압도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감독은 거북을 최대한의 박력으로 묘사합니다만, 두려움이나 압박감보다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이해되도록 표현합니다.

 

 

 

 

 

 

# 9. 

 

거북은 분명 남자가 섬을 벗어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움츠러든 남자를 가만히 지켜본 후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볼 때, 그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듯하죠. 이후 펼쳐지게 될 붉은 거북의 변화와 행동까지 보노라면. 거북은 남자에 대한 자애로움을 가지고 있는 헌신적인 신화적 존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텐데요. 만약 앞선 단락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섬'을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대변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거북의 행동은, 뗏목을 타고 떠난 바닷길 앞에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초월적 존재가, 배를 부수는 방식으로 그를 구원했다고 보는 편이 맥락상 더 자연스러울 겁니다. 

 

 

 

 

 

 

# 10.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자는 거북의 행동과 그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합니다. 섬(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남자는 절망합니다. 절망은 곧 분노로 이어지죠. 남자는 짙은 노을보다 더 붉게 물든 분노에 휩싸여 거북의 머리를 잔인하게 내려칩니다. 뒤집어엎고 올라타 모욕합니다. 남자는 '외로움'의 푸른 바다 대신 '분노'의 붉은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아직까지 남자가 가진 정서는 외로움과 절망, 그리고 분노뿐입니다.

 

 

 

 

 

 

# 11.

 

서서히 죽어가는 거북을 보며 남자에게 새로운 변화가 싹틉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감정인 '죄책감'과 '연민'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남자는 바닷물을 퍼다 나르고 그늘을 만들어가며 거북을 보살핍니다. 어느 날 등껍질이 갈라지고 거북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되어 있습니다. 아직 여자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남자는 계속해 여자를 보살핍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자가 된 이후에 보살피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거북일 때부터 바닷물을 떠 먹였다는 점입니다. 같은 인간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돌보았다면 이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만, 거북일 때부터 돌보았기에 비로소 '죽어가는 존재에 대한 이타적인 연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련의 과정은 홀로 태어난 남자에게 비로소 관계가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남자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과 자애심을 깨우쳐 나가기 시작합니다.

 

 

 

 

 

 

# 12.

 

서먹서먹하던 두 남녀는 이내 바다로 떠나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갈라진 등껍질>과 <만들다 만 뗏목>을 바다에 흘려보냅니다. 둘은 섬에 함께 정착하기로 합니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섬을 사랑으로 채워나갑니다. 

 

'외로움'의 푸른 바다에 둘러 쌓여 있던 남자는, '분노'의 붉은 바닷속에 헤엄치던 남자는, 비로소 '사랑'의 하늘빛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교감합니다. 홀로 올려다볼 땐 '외로운 달'만이 떠 있던 밤하늘엔, 어느샌가 '수많은 별'이 가득합니다. 자신의 분노에 죄책감을 느끼는 남자를 여자는 용서합니다. 둘은 그렇게 부부가 됩니다.

 

 

 

 

 

 

# 13.

 

사실, 이 두 번째 장 <사랑>의 서사 전반에 걸쳐 익숙한 레퍼런스가 하나 느껴지긴 합니다. "신화적 존재가 자신을 희생해 인간을 구원하지만, 자애로움의 수혜를 받은 인간은 되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북의 머리를 내려친다. 이내 죽음을 맞이한 거북은 며칠 후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해 자신에게 죄를 지은 인간을 용서하고 품는다." 네, 어째 기독교 세계관의 색채가 물씬 느껴지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종교 영화>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을 특정한 범주에 폭압적으로 귀속시켜버리는 것은 썩 권장할만한 감상법은 아니죠. 그냥 이 부분은 이런 느낌적인 느낌이 있네? 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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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첫 번째, 두 번째 장까지의 영화 전반부는 문학적 - 미학적인 파트였다 한다면, 지금부터의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직설적이며 서사적입니다. 심미적인시퀀스의 퀄리티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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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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