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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nimation

세상이 창조되던 순간까지 _ 키리쿠와 마녀, 미셸 오슬로 감독

그냥_ 2021. 7. 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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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벨기에 영화인데 배경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입니다. 감독이 유년기를 아프리카에서 보냈다는 말이 있던데 정확한지는 모르겠군요. 그 덕분인지 인종차별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벨기에 답지 않게 차별적 - 단정적 시선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참 잘했어요.

 

 

 

 

 

 

 

 

'미셸 오슬로' 감독,

키리쿠와 마녀 :: Kirikou et la Sorciere』입니다.

 

 

 

 

 

# 1.

 

애니메이션 동화입니다. 다양한 세부 장르들 가운데서도 특히 고전적이고 토속적인 톤의 작품입니다. 문학적 은유나 기하학적 구도의 표현이 풍부한 현대 작가주의적 영화들과는 달리 고전 영화들의 그것처럼 메시지는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되어 있습니다. 선입견 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흔히 아프리카 토속 문화 예술하면 떠올릴 법한 특유의 분위기가 매우 잘 묘사되어 있군요.

 

화풍, 그중에서도 색감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평면적 구도의 적극적 활용이 마치 현지의 미술을 따다가 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한 것만 같은 느낌마저 줍니다. 짧은 런타임을 알차게 채우는 합창이 작품 전반의 온화한 분위기를 한층 북돋습니다.

 

 

 

 

 

 

# 2.

 

서두에 동화라 말씀드린 것처럼 이야기는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고 박하게 말하면 심심합니다. 비범하게 태어난 '키리쿠'가 어찌어찌 마을의 문제를 몽땅 해결했다는 식의 <영웅 서사>죠. 나름의 특색이라 할법한 요소들, 이를테면 유독 작게 태어난 영웅의 디자인이나, 무지성 초고속 축지법, 화염방사기와 제트스키와 cctv 등이 탑제된 4차 산업혁명식 요술과, 귀염뽀짝한 동물들 등이 차별점을 확보합니다.

 

꼬꼬마의 꼬추나 장성한 여성의 젖가슴 등이 대놓고 묘사되긴 합니다만, 아프리카 토속 문화 배경이라는 걸 감안하면 위화감은 없습니다. 괜히 전체관람가가 나온게 아니죠. 되려 이런 풍의 영화를 보면서 야하다 느껴진다면 관객 스스로 야동을 너무 많인 본건 아닌가 반성해 보는 편이 좋을 겁니다.

 

 

 

 

 

 

# 3.

 

자칫 고리타분한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는 <민담>이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가 오래도록 합의해 온 통시적 윤리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일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 민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표 윤리관이라 한다면 <권선징악>을 들 수 있겠죠.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결말은 어쨌든 못된 호랑이가 낙사한다였구요. <선녀와 나무꾼> 역시 선녀 마누라가 승천하면서 도둑놈 출신 나무꾼만 홀아비가 되는 결말이었죠. <콩쥐팥쥐> 속 불쌍한 콩쥐를 괴롭힌 못돼 먹은 팥쥐는 맛있는 젓갈이 되구요, 네임드 판소리인 <수궁전>,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모두 어찌저찌 해서 착한 누군가는 상을 받고 나쁜 누군가가 벌을 받았답니다! 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권선징악으로 귀결됩니다.

 

 

 

 

 

 

# 4.

 

만약 우리 기준에서라면 <키리쿠와 마녀>는 영웅 '키리쿠'가 마녀를 처단하거나, 설령 순화한다 치더라도 마녀가 싹싹 빌고서 도망간다는 식의 결말이였어야 자연스러울 텐데요. 이 영화는 마을의 영웅 '키리쿠'가 마녀 '카라바'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확실히 이질적이죠.

 

흔히 무신경함이나 나태함으로 오해되는 아프리카 문화권 특유의 결과론적 낙관주의와, 공동체의 안녕을 최우선 하는 관용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윤리관을 옅보게 하는 결말입니다. 특히나 '키리쿠'가 할아버지와 나누는 문답은 작품의 철학적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키리쿠'에게 할아버지는 말하죠.

 

 

"그 이유를 다 말하려면

세상이 창조되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단다."

 

 

# 5.

 

잘잘못을 따지고 들면 세상이 창조되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마녀의 등에 박힌 가시와 아픔을 보듬지 않으면, 어쨌든 마을 남자들이 살아 돌아왔음에 만족하지 않으면, 처음 보는 장성한 남자를 보고 자기 아들이라 말하는 '키리쿠' 엄마 말을 믿지 않으면, 마을을 구한 '키리쿠'의 의지를 인정해 '카라바'를 수용하지 않으면 부족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죠. 하나하나 문제를 삼아 심판하고 배척하지 않는 건 그들이 나이브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 6.

 

'키리쿠'가 사람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 역시 이와 같은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각자는 마을 공동체의 부속입니다. 몸집이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자기 역할을 하면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유용한 칼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에 의해 유용하게 쓰이는 게 중요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얻는 게 있으면 모두 함께 웃고 춤춥니다. 잃는 게 있으면 모두 함께 웁니다. 마을의 생존을 위해 금붙이를 모으는 와중에 몰래 목걸이를 숨긴 배신자의 집은 불에 태워 사라지게 됩니다. 정확히는 사라져 마땅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미셸 오슬로' 감독, <키리쿠와 마녀>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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