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Drama

날개 없이 추락하는 자들을 위한 _ 레퀴엠,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그냥_ 2020. 7. 14. 06:30
728x90

 

 

# 0.

 

레퀴엠 [ requiem]

 

위령 미사 때 드리는 음악. 정식명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지만 가사의 첫마디가 "requiem (안식을...)"으로 시작하는 데서 이와 같이 부르게 된 것이다. 진혼곡, 장송 또는 진혼미사곡 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레퀴엠 [requiem] (두산백과)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레퀴엠 :: Requiem for a Dream』입니다.

 

 

 

 

 

# 1.

 

고차원적인 철학적 사유나, 다양한 층위에서의 감정적 낙차, 치밀하게 조립된 서사를 즐기는 영화는 아닙니다. 충격적인 연출에 힘입은 전율이 일 정도의 육중한 감수성입니다. 글의 제목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계곡 아래로 날개 없이 추락하는 자들의 비장한 마지막을 달래는 진혼곡입니다.

 

서사의 완성도를 짚는 건 부질없는 짓입니다. 엄마 '사라 골드팝'은 그저 꿈에 그리던 방송 출연을 앞두고 다이어트를 위해 접하게 된 약물에 중독된 불쌍한 여인에 불과합니다. 아들 '해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를 이루지 못하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마약에 빠져든 인물에 불과합니다. 애인 '마리온' 역시 마약을 얻기 위해 성적으로 타락한 인생에 불과하고, 친구 '타이론' 또한 마약 팔아서 팔자 고쳐보려다 실패한 인물에 불과합니다. 하나 같이 밀도 있고 매력적인 서사는 아니죠.

 

 

 

 

 

 

# 2.

 

디테일과 설득력을 점검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라'가 탐닉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의 구성과, 방청객이 연호하는 주스의 의미, 거짓 우편의 정체를 고민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허무합니다. '해리'가 팔아버리는 티브이와 옥상에서 날리는 종이비행기의 은유와 썩어 들어가는 팔과 절단 속에 담긴 의미를 고찰하는 것 역시 허망합니다. '마리온'이 꿈꾸고 그린 디자인들의 함의와, '타이론'의 비즈니스 모델의 현실성을 진단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죠.

 

그저 마약에 중독된 인간의 뿌리 깊은 불안감, 허무함, 고독감, 그리고 절망감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감독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아니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장면 마다마다 인물들이 객체를 대하는 시각과 시야와 인식과 호흡만을 연출합니다.

 

 

 

 

 

 

# 3.

 

네 명의 주인공은 각자 전혀 연관성이 없는 독립된 배경과 독립된 동기를 가진 독립된 인격입니다만,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쳐 타락해 갑니다.

 

1. 소박하지만 안락한 현실이 있습니다.

2. 간절히 소유하고 싶은 허구적 이상이 존재합니다.

3.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4. 그 괴리를 단숨에 돌파할 수단으로써 마약을 선택합니다.

5. 마약의 (그것이 심리적이든, 경제적이든, 생물학적이든) 파괴력에 취해 이상에 다가가는 듯한 착각에 중독되어 가다가,

6. 결국 이상은커녕 현실과도 점점 멀어져 자기 자신의 삶 마저 잃게 됩니다.

 

감독은 각 인물들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평범한 옴니버스물의 그것처럼 인물 중심의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 프로세스를 단계별로 해체해 교차 편집으로 재구성합니다. 1 단계에 놓인 '사라'와 '해리'와 '마리온'과 '타이론'을 보여준 후 2단계에 놓인 '사라'와 '해리'와 '마리온'과 '타이론'을 보여주는 식이라는 거죠.

 

 

 

 

 

 

# 4.

 

해체하고 재조립된 이야기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감정이입을 적절히 차단하면서 정신적 경험만을 최대한 확대하고 과장하고 중첩되게 합니다. 특수한 감수성을 남의 이야기에 실어 간접적으로 전달한다기보다는 타인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어 감수성만을 추출해 전달하는 접근법이라 할 수 있겠죠.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를 보고 나면 네 명의 주인공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지워집니다. 영화는 자연인으로서의 네 주인공의 드라마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이 타락해 가는 과정과 그동안의 절망감이라는 <정서>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올라가는 앤딩 크레디트 위로 특정한 캐릭터의 삶에 대한 연민 및 가치판단보다, 관객 자신 안에 내재된 불안과 공포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건 감독의 의도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 5.

 

마약은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만, 역설적이게도 마약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약'은 현실의 장벽을 편법적으로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써 편의적으로 선택된 설정에 불과합니다. 마약이 아닌 폭력이나, 위선, 거짓, 혹은 도박이 된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죠.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이 <추락한 인간의 처참한 말로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의 한가운데 내던져진 인격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소집될 뿐, <마약을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공익광고 캠페인 식으로 결론 나지 않는 건 감독이 마약이라는 아이템을 활용함에 있어 주제의식과는 분리해 기능적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6. 

 

네 명의 주인공과 마약을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만 보고 나면 네 명의 주인공과 마약이 모조리 휘발되고 관객 자신의 내면만이 남아 있게 되는 신기한 영화입니다. 결말에서의 강렬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순리에 따르는 삶>이라는 주제의식으로 귀결되게 한다는 점 역시 가히 걸작이라 할법하죠.

 

대단히 고통스러운 영화임에 분명합니다. 대단히 공포스러운 영화이기도 합니다. 대단히 허무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서글픈 영화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공포와 허무와 슬픔. 삶의 비극적인 단면을 관통하는 정서의 총합을 감독은 파괴적인 표현으로 담아냅니다. 만,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이면에 왜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졌을까 라는 점 만큼은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레퀴엠』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