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Film/Horror

용두사미 _ 높은 풀 속에서, 빈센조 나탈리 감독

그냥_ 2019. 10. 12. 06:30
728x90

 

 

# 0.

 

두 남녀가 차를 타고 인신매매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갑니다. 오빠는 햄버거를 혼자 맛있게 먹고 그 꼴이 뵈기 싫었던 임산부 동생은 토를 하죠. 동생의 헛구역질에 입맛이 떨어진 오빠는 차를 세우는데요. 때마침 찝찝하기 그지없는 풀떼기들 사이에서 웬 꼬마 아이의 "도움!" 소리가 들립니다. 오지랖이 발동한 임산부는 뱃속의 아이는 나 몰라라 하고 남의 아이를 구하겠다 말하는군요. 동생은 갓 구운 피자 옆에다 읽던 책을 살포시 내려놓고 오빠는 먹던 햄버거를 남깁니다. 꼬마의 미끼에 낚여 풀 숲에 갇히게 된 오누이는 결국 아이언드래곤에게 빨래질을 당한 박무석이 되죠.

 

네. 이 작품은 햄버거를 남기면 변사체가 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빈센조 나탈리' 감독,

『높은 풀 속에서 :: in the Tall Grass』 입니다.

 

 

 

 

 

# 1.

 

오누이가 변사체가 되어가는 동안 부동산 중개인인 몸짱 아빠 역시 처자식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급하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마찬가지의 풀떼기들 옆에 차를 세운 가족. 수풀 사이에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러자 눈치 없는 댕댕이가 자길 부르는 줄 알았는지 냅다 수풀로 뛰어드는군요. 아끼는 댕댕이를 쫓아 아들이 풀숲으로 들어가고, 엄마와 아빠 역시 아들을 따라 들어갑니다.

 

풀의 미로에 갇힌 엄마는 둠피에게 처맞은 젠야타처럼 납작해지고 손현주 못지않은 거렁뱅이 아들을 둔 아빠는 일리단이 됩니다. 역시 모든 사단은 강아지 때문입니다. 만약 고양이를 키웠다면 수풀로 뛰어드는 대신 얼굴을 할퀴는 수준에서 끝났을 텐데요. 기억하세요, 댕댕이보다는 갓냥이를 키워야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감독은 런타임 내내 나름대로 열심히 가오를 잡습니다만 그래 봤자 영화의 결말은 사실 뻔합니다. 결국 주인공 파티가 주야장천 미로를 탐험하다가 죽을 사람들은 적당히 죽고 살아 나올 법한 사람들은 적당히 살아 나오겠죠. 영화의 경쟁력은 '어떤 곳에 갇히느냐', '어떻게 리타이어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살아 나오느냐'에 달려있을 겁니다.

 

 

 

 

 

 

# 2.

 

처음 제목을 보고 솔직히 '뭐 이 따위야'라는 생각을 했었더랬죠. '이건 너무 무성의한 작명 아니야?'라구요. 하지만 세상에나. 원제가 『in the Tall Grass』였네요. 다행스럽게도 영화를 보다 보면 제목에 납득이 가기는 합니다. 진짜 '키 큰 풀떼기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전부인 데다 영화의 색깔 역시 제목만큼이나 직선적이고 깔끔하거든요. 단, 전반부까지만.

 

길게 뻗은 고속도로처럼 방향을 제대로 잡고 들어갑니다. 보편적 공포로 전이된 초현실적 미스터리라는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내달립니다. 공간을 무섭게 보이게끔 만드려 억지를 부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상적인, 심지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풀들로부터 공포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한 공포만을 포착합니다. 마치 여러 요인이 혼탁하게 섞여 있는 공포이라는 포괄적 정서로부터 딱 '무지의 공포'만을 추출하려는 듯 하달까요. 일련의 정제된 공포가 주는 이질감이 생각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할로윈 파티에나 쓰일 법한 해골 따위 들이 전혀 없음에도, 보이는 거라곤 바람에 흔들리는 풀떼기들 뿐임에도 묘하게 더 괴기하고 묘하게 더 오싹하게 느껴집니다.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판단할 수 없는. 길을 잃은 사람의 발버둥과 무기력이 영화를 지배합니다. 길을 잃은 사람의 나약함이 인상적입니다. '칼'은 생전 처음 보는 꼬마 아이를 무작정 따라가고 '베키' 역시 무척이나 찝찝한 얼룩이 옷에 묻은 장성한 남자를 겁도 없이 따라갑니다. 그 순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무력함이 엿보입니다. 길 잃은 사람에게 '기댈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검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보단 '믿을 수 없는 것이라도 믿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어째선지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슬쩍 생각나는군요.

 

 

 

 

 

 

# 3.

 

중반부 넘어 이야기가 한번 크게 확장됩니다. 단순히 변화하는 미로의 숲이 아니라 시공간이 함께 뒤틀리며 왜곡되는 공간을 설득해 냅니다. 그것이 밀도의 변화뿐 아니라 순환으로 이어지도록 한 것도 참신합니다. 미래가 과거로 이어지고 그 과거는 새로운 미래를 낳으며 시간의 순서를 뒤흔들다 못해 그런 것을 정의하는 것 자체를 부질없게끔 이야기를 몰아붙입니다. 단순한 공포 스릴러로 보였던 시나리오가 그로테스크한 호러와, SF적 미스터리의 매력을 함께 품은 서사로 한 단계 진화합니다.

 

무성한 풀잎들처럼 인과가 뒤엉켜 나가는 과정에서 앞선 대사들과 관계들과 행동들을 곱씹게 됩니다. 숲과 연계된 귀신같아 보였던 가족이 사실은 '베키'네와 같은 처지라는 것이 밝혀진다던지, 풀들은 죽은 것을 옮기지 않는다는 설정을 상황을 극복하는 단서를 삼는다던지 하는 것들 말이죠. 서사의 축이 다음 스텝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때마다 이전의 의문은 해갈되면서 동시에 더 흥미로운 새로운 의문이 솟아납니다. 그 와중에 후반부에 주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떡밥들도 충실히 제시하죠.

 

서사의 구조가 회오리치듯 반복되는 가운데 점점 수정되며 확장되어나갑니다. 동시에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 불편하고 불쾌한 고유의 감각은 서서히 점층 되죠. '순환하며 확장되는 서사'와 '순환하며 수축되어가는 정서' 간의 교차와 교감이 인상적입니다. 괴기하고 불쾌한 느낌을 문학적인 표현과 함께 간결하면서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여러모로 딱 '스티븐 킹'의 느낌이군요.

 

 

 

 

 

 

# 4.

 

여기까지가 전반부입니다. 그리고 이 매력이야말로 영화가 끝까지 가지고 갔어야 할 올바른 길이죠.

 

불행히도 영화는 주인공 파티와 마찬가지로 급격히 길을 잃습니다. 후반부에 접어들며 짜릿한 공포와 미스터리에 찝찝한 오컬트가 스믈스믈 기어듭니다. 잘 만들어 놓은 상황적 공포가 특정한 인물에 대한 물리적 공포로 격하됩니다. 뭔가 점점 맛탱이가 간다는 느낌이 장마철 꿉꿉한 날씨처럼 스며듭니다.

 

뭐? 갑자기 추격 스릴러 하다 말고 드라마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출산 직전 임산부의 오빠와 전 남편 간의 갈등을 지금, 그 순간에 풀어놓겠다고? 얼쑤? 주먹질까지 하네? 갑자기 분위기 사랑과 전쟁이야? 뭐?!?! 곧 뒤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특히나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사람까지 있는 와중에 뒤통수를 갈긴다고? 철천지 원수랑도 '피카소'와 '샤갈'이 사진 찍는 것 마냥 쎄쎄쎄를 해도 모자랄 것 같은 이 타이밍에? 지금 나랑 장난해?!?!????

 

 

 

 

 

 

# 5.

 

아무런 언질도 없이 풀떼기 원시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사람을 둥가둥가 하지 않나. 땅이 냅다 꺼지더니 돌 아래 구울들이 득실득실 거리지를 않나.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하늘에 시뻘건 물감을 풀어 재끼지를 않나. 액션 영화도 아니고 다대일 투닥투닥 결투씬을 벌이질 않나. 괴기한 느낌만 가득한 가운데 일관성이 있다는 인상이 전혀 없습니다. 그로테스크한, 러브크래프트스러운 심연에 있을 것만 같은 공포에 관한 분위기만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가운데, 영화는 급격하게 길을 잃습니다.

 

서사에 맥이 없다 보니 결말도 힘을 받지 못합니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죄다 죽었답니다. 루프 속에서 영원히 아빠에게 뚝배기가 따였답니다. 짜잔! 안녕!> 하며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누가 되었든 간에 어쨌든 풀떼기 감옥을 벗어나긴 해야 하는데요. 영화는 무책임하게 '트레비스'가 돌을 만지고 나가는 길을 찾은 다음에 꼬마에게 알려줬다 라는 것으로 뭉개버립니다.

 

이 무책임한 결말 덕분에 바위 덩어리를 중심으로 둘러싼 모든 설정들이 무척이나 애매해질뿐더러, 애 아빠는 진짜 등신이 됩니다. 자기 애 가진 마누라 버리고 도망간 놈팽이도 극복할 수 있는 돌의 힘 따위에 굴복해 자기 마누라 제 손으로 죽이고 아들내미도 들어다 바치는 아빠가 등신이 아니면 뭔가요. 꼬마가 숲을 탈출한 후, 바깥 시간들에 대한 패러독스들을 무책임하게 방기 해버리는 건 덤이죠. 결국엔, 구태여 동원한 임산부 설정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 뭐 이딴 교훈극으로 대충 마무리 하는데요.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이모양이면 메시지가 힘을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음은 당연합니다. 

 

... 영화의 처지가 영화 속의 숲에 갇힌 인물들과 비슷하다는 게 역설적입니다. 올곧게 길 따라 달려가나 싶더니 제 발로 멈춰 서서 미로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길을 잃고, 길을 잃은 후엔 자기가 싸지른 말과 행동들에 스스로 발이 묶이며, 본래 가진 매력의 절반은 미로 속에서 죽여버리는군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지점까지만 해도, 죽은 강아지 앞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는 순간까지만 해도 참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말이죠. '빈센조 나탈리' 감독, <높은 풀 속에서>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