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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채린이었다면 _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

그냥_ 2023. 12.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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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차라리 채린이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

 

 

 

 

 

 

 

 

임오정 감독,

『지옥만세 :: Hail to Hell』입니다.

 

 

 

 

 

# 1.

 

영화는 스스로를 모순된 이미지의 충돌로 소개합니다. 오프닝의 생일 축하한다는 말에 담긴 차가운 폭력은 전시적이죠. '지옥'이라는 부정적 어휘와 '만세'라는 긍정적 어휘를 붙여둔 제목은 작품의 방법론을 데뷔작다운 패기로 선언합니다. 모순된 이미지가 충돌하는 동안 다양한 위계의 딜레마들이 성실하게 적층 됩니다. 삶과 죽음, 낙원과 지옥, 복수와 용서, 고립과 연대, 가해와 피해, 맹신과 불신 등의 딜레마들과 그 딜레마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견인해 나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두 주인공에게 죽음은 절망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워 보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뭐랄까요.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MZ'스럽죠. 번개탄을 피우며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 모습은 죽음을 장엄하고 과시적이고 멋진 것으로 여긴다는 면에서 막연한 동경심을 읽게 합니다. 전반부 두 주인공은 개 목걸이를 활용해 자살을 시도하는데요. 묶여 있다 풀려난 개가 달려가는 장면의 인서트는 목걸이에 '자유'라는 개념을 연결 짓습니다. 두 인물에게 '죽음'이라 함은 일련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동경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갈망임을 암시하는 것이죠.

 

반면 죽음을 막연히 동경하는 만큼, 살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집에서 자살을 기도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엄마가 발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은연중에 녹아 있음을 뜻하니까요. 뜻하지 않게 목을 맨 나미의 다리를 선우가 받아 드는 장면이 있는 데요. 그와 대구를 이루는 옥상에 오른 선우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나미의 모습은, 살고자 하는 두 사람의 진심이 묻어나는 순간이자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을 '함께'의 가치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결말에 이르러 살기 위해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는 모습이라거나, 죽음을 가까이 올려다보며 직시하자 공포에 질려 입을 가리는 모습 따위는 소녀들의 치기를 타격하며 강렬한 삶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 2.

 

영화 속에는 크게 두 개의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하나는 학교입니다. 폭력을 방치하고 있는 사회와, 저항할 힘 없이 고립된 아이들, 그런 위태로운 아이들의 사정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불우한 가정환경의 대환장 콜라보죠. 다른 하나는 물론 사이비 교단입니다.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사이비 광신도에 대한 묘사가 정석적으로 그려집니다. 단단히 왜곡된 세계관과, 빼앗긴 핸드폰으로 상징되는 폐쇄적 논리에 세뇌된 아이들, 손쉽게 부정을 정당화하고 회개하는 타락한 교리와, 선량한 언어의 한 꺼풀 아래 새어 나오는 이율배반적인 폭력과 탐욕 따위죠. '낙원'이라는 쓸데없이 거룩한 이름의 성지와 구속 수감되어 있다는 교주의 존재는 상징적입니다.

 

두 지옥은 현상적으로는 대비되나 구조적으로는 크게 닮아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나마 학교를 표방하고 있다거나,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우는 방식, 따돌림당하는 누군가와 이를 방치 내지 독려하는 시스템, 그 과정에서 부모에게까지 압박을 받는다거나 하는 등이죠. 시스템 속에서 채린은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며 여왕벌로 군림하고 있는 데요. 그 역시 두 세계가 놀라울 만큼 닮아있음을 명시적으로 증명합니다. 일련의 불쾌감이 주는 압박감은 불쑥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라거나 덥석 맞잡는 손, '축복받아라'라는 말의 미묘한 뉘앙스, 직관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게 만드는 제의적인 어휘들, 흘려들을 수 없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수군거림으로 성실히 묘사됩니다. 두 세계 사이에서의 우열은 썩 무의미합니다. 사이비 교인에 둘러싸인 채린과 생일 케이크를 얼굴로 받는 선우의 비극에 우열은 없으니까요. 두 지옥에서 만세를 부르는 것은 사회를 넘어 삶이라는 공간을 염세적으로 진단하되, 그런 지옥 같은 삶에서도 생생하게 투쟁해 나가는 인간의 의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복수의 딜레마 역시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주요한 코드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모험이란 어쨌든 얼굴에 '기스'라도 하나 내보자는 것에서 출발한 복수니까요. 하지만 복수의 행위가 가해자에게 도움이 되는 모순된 상황 앞에 두 소녀는 복수를 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갈등하게 됩니다. 둘의 입장은 아랑곳 않은 채 하느님의 응답이라며 기뻐하는 장면의 불쾌감은 그 자체로 감독이 창조해 낸 딜레마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 3.

 

이처럼 각각의 딜레마들은 제법 흥미롭고 또 재기 발랄합니다. 그것을 한 이야기 속에 다양한 레이어로 적층 시켜 구현하겠다는 의지 역시 인정할만하죠. 다만, 각각이 지나치게 따로 논 끝에 의미 있는 결말로 소집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지옥 만세라는 거창한 선언을 내지른 것에 비해 두 소녀의 성장이란 나 사실 죽고 싶지 않았네? 사실 살고 싶었었네? 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 불과하고, 이런 단편적이고 기계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기엔 영화가 깔아놓은 판이 쓸데없이 거창합니다.

 

학교 폭력에 대한 의미 있는 고찰, 없습니다. 앤딩을 통해 영화가 제안하는 폭력을 극복하는 방법이란 고작 '저항'과 '연대'라는 것인데요. 왜 학교 폭력 피해자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은 방기 되는 결말이죠. 결국 달라진 것은 두 소녀의 사고방식뿐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책임을 함께하지 못하고 고립을 선택한 채 나약하게 자살이나 시도하는 피해자들에게 돌리는 것으로 오해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겁니다.

 

<미드소마>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이비 종교의 작동 원리 같은 것을 진득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이 있냐 하면 그런 것도 없습니다. 약과 병원을 대신하는 기도라거나, 축복받아라는 말에 담긴 불쾌한 압력 같은 상투적인 묘사의 나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고. 이 모든 것을 자식 잃은 상처를 보상받기 위한 피해망상과, 투자와 회수의 개념에서 접근한 경제적 탐욕으로 압축시킨다는 것은 썩 실망스럽습니다.

 

복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하나. 그 이전에 복수란 무엇인가. 등으로 파생되는 복수와 관련된 딜레마 역시 납득할만한 대답은 없습니다. 공연장에서 우물쭈물하던 나미처럼 어영부영 포기하는 모양새로 방치될 뿐이죠. 고작 얼굴에 상처라도 내야 한다라는 말만이 사이비 신도들에 의한 폭력으로 적당히 수습될 뿐이라 기만적이라는 느낌마저 전달됩니다.

 

 

 

 

 

 

# 4.

 

감독은 '삶이라는 비극 안에서도 함께라는 연대의 가치를 예찬'하고자 했다 인터뷰하는 데요.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가 '주장'될 뿐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영화 속 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두 사람이 그냥 충분히 친해질 어떤 계기가 있었다면 같은 결말에 도달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이 느낀 감정의 변화는 특별한 사건에 의한 필연적인 성장이 아닌, 치열해 보이기만 할 뿐 영화적으로 안전하게 조작된 어드밴처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개목걸이에 목을 매다는 미성년자가 지옥 만세!! 를 질러버리며 출발한 영화의 결말이, 고작 '마음먹은 것을 고쳐먹고 둘이서 손잡고 친해지렴~'이라면 시시할 수밖에 없죠.

 

# 5.

 

끝까지 보고 나면 차라리 주인공이 채린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약간 <친절한 금자씨> 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학교 폭력을 자행하는 순간의 채린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폭력의 작동 원리를 통찰하는 맛도 있었을 테구요. 그런 채린이 회개하기 위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서사와 그 과정에서의 심리 변화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 있겠죠. 어느 날 불쑥 채린을 찾아온 두 친구를 통해 채린은 어떤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가를 관찰함으로써 복수의 딜레마를 의미 있게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결말에서 나미와 선우와 채린은 각자 다른 갈림길로 갈라지는 데요. 지옥(학교)에서 지옥(서울)을 지나 마지막에 두 친구가 함께하는 지옥으로 가는 피해자와, 낙원(학교)에서 낙원(서울)을 지나 이미 죽어 존재하지 않을 허구적인 낙원을 향해 나아가는 가해자가 대비되는 장면이죠. 일련의 결말 역시 채린에 집중했더라면, 내내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통제하고 있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함께'에 도달하지 못한 인물의 비극이라는 면에서 감독이 전달하고자 한 가치를 표현하기에도 용이한 측면이 있었을 겁니다. 겸사겸사 학교 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린다는 오해도 피할 수 있고 말이죠. 임오정 감독, <지옥만세>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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