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수중엔 100만 원밖에 없다.
이병헌 감독,
『극한직업 :: Extreme Job』입니다.
# 1.
부모님께 150만 원짜리 안마의자를 선물하려 하는 데 수중엔 100만 원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순하게는 부업을 하면 된다.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정직하게 50만 원어치 더 일해서 소득을 늘릴 수만 있다면야 뭐, 이상적이다. 아니면 부모님께 50만 원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당신을 위한 선물이니 말이다. 양해를 구할 염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나중에 150만 원짜리 안마의자를 돌려드리면 기뻐하실 게 분명하다.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이번엔 영화감독이다. 당신의 시나리오 초안엔 100만큼의 재미가 담겨있지만 관객에게 150만큼의 재미를 선사하려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은 비슷하다. 단순하게는 시나리오를 더 다듬으면 된다. 어떤 식으로든 150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면 모두가 행복하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기약이 없다는 사소한 문제만 극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조금 더 편안 방법은 50만큼의 재미를 빌리는 것이다. 100의 재미를 150처럼 느낄 수 있도록 50의 불편을 장치해 상대 격차로 착시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 2.
실제 대부분의 장르 영화들이 그렇게 작동한다. 주인공의 활약 직전에 고난을 앞세우는 것도, 빌런이 악마로 돌변하기 전에 위선을 떠는 것도, 누군가 얻어터질 때면 밉상짓을 해 업보를 쌓는 것도 모두 의도된 불편을 통해 효과를 과장하기 위함이다. 충분히 고도화된 현대의 영화 연출은 관객이 느낄 50의 불편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부여했다가 자연스럽게 휘발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고, 적어도 장르적 기준에서 영화의 만족도는 이 불편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느냐에 따라 크게 판가름 난다. 덕분에 능숙하게 다듬어진 영화를 본 관객들은 50의 불편을 체감하지 못한 채 기분 좋게 극장을 나선다. "끝내주게 재미있는 영화였어! 마지막에 진짜 통쾌했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를 비롯한 대부분의 타란티노는 좋은 예다. 영화의 스토리는 빌어먹을 나치주의자와 차별주의자를 주인공이 도륙 낸다는 단순한 이야기다. 후반부 액션을 떠받치기 위해 상당분량을 빌런의 업보에 투자하고 있음에도 불편이 느껴지지 않는 건, 응징하고자 하는 마음만을 걸러내는 연출이 그만큼 유려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예는 <7번 방의 선물>(2013) 같은 영화다. 흥행과 별개로 다수의 혹평을 감수해야 했던 건 마지막 용구의 죽음을 과장하기 위한 반동으로 영화 내내 용구를 학대하고 있고, 그 억지스러운 목적을 표독스럽게 노출했기 때문이다.
다만 불편을 인지하지 못한다 해서 불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어 번은 모르고 넘어갈 수 있지만 반복되면 될수록 비용처리된 50의 불편은 점점 분명하게 받아들여진다. 작금의 관객들이 작위적인 드라마에 지쳐 신판의 '신'자만 나와도 진절머리를 내는 것은, 양산형 드라마를 통해 감정을 쥐어짜는 불편을 분별하는 방법을 학습해 버린 탓이다. 1
# 3.
흔히 <극한직업>의 의의를 코미디의 선명성이나 신파의 부제로 설명하곤 하나 정확히는 불편을 빚지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100만큼 재미있는 시나리오로 담백하게 100만큼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채로운 코미디가 펼쳐지는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상황과 상황을 인지하는 인물의 충돌, 같은 상황을 달리 인지하는 인물들 간의 충돌, 클리셰를 비틀어 내는 부조리 코미디 모두 이전 씬의 불안, 긴장, 분노, 갈등, 연민, 회한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좀 강박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예는 흘러 넘칠 정도로 다양하나 대표적으로 선희(장진희 분)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는 장면이다. <러시 아워 2>(2001)의 장쯔이를 보는 것만 같은 선희에게 발목이 돌아가는 대상은, 사실 문법대로라면 마약반 막내여야 한다. 열정적인 막내가 선희에게 된통 당해 병원에서 호스 꽂고 누워 있는 걸 보여줌으로써 마약반과 관객 모두에게 분노와 동기를 부여한 후, 장연수(이하늬 분)로 하여금 보상케 하는 것이다. 반면 이병헌 감독은 그 역할로 관객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는 홍상필(양현민)을 희생시킨다. 심지어 목발 신세를 지게된 인물이라면 마땅히 가질 법한 보복의 여지조차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감독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 4.
빌런을 연출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형사물은 범인을 체포하는 이야기고 문법대로라면 빌런은 최대한의 카리스마로 연출되어야 한다. 장첸(윤계상 분)을 비롯한 <범죄도시> 시리즈라거나 조태오(유아인 분)를 비롯한 <베테랑> 시리즈를 생각하면 확연하다. 반면 본작의 빌런은 아무런 권위를 제공받지 못한다. 범죄자들의 카리스마가 관객을 위협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무배(신하균 분)와 테드 창(오정세 분)이 만나는 장소는 한낮의 피자집이고, 행여나 조금이라도 권위적일까 싶어 쉴 새 없이 잔망스러운 농담을 던진다. 총탄과 폭력이 난무하는 앤딩의 부두에서조차 마찬가지다.
후반부 전개를 위해 팀원 하나가 얻어터지지만, 그마저도 클리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저 자식은 무조건 안전하다' 싶은 마봉팔(진선규 분)이고, 그마저도 공격당하는 장면은 생략한 후 탈출하는 장면만을 보여준다. 마지막 앤딩은 당연히 고상기(류승룡 분)와 이무배(신하균)의 1대 1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고반장이 무리 없이 이길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싶을 관객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었던 감독은 친히 최반장의 입을 빌려 안전장치를 설치한다. "안 죽어. 그 형은."
물론 극한직업의 방법론을 더 우월한 것이라 이해하면 곤란하다. 정석이 정석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고, 정석적 방법론의 안정감을 주인공의 캐릭터성에 모조리 투자해 성공을 거둔 작품이 사실 훨씬 많다. 범죄도시가 맛있는 생삼겹살이라면 극한직업은 힘줄, 지방, 다 걷어내고 씹기 좋게 다듬어 뭉쳐낸 떡갈비고, 생삼겹과 떡갈비 모두 맛있는 음식이다. 단지 동네에 온통 삼겹살집뿐이라 유일하게 떡갈비를 팔았던 극한직업은 그 희소성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형사 코미디의 클리셰를 적절히 비켜나간 것이기도 하지만, 충무로의 관성적인 영화 문법 그 자체를 비켜나갔다는 면에서도 의의가 있는 것으로, 장면마다 그 부분을 역산해 보는 것도 극한직업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 5.
의도된 불편의 부수적 효과는 자연스럽게 완급이 생긴다는 것이다. 긴장을 줬다가 카타르시스를 줬다가 긴장을 줬다가 카타르시스를 줬다가. 사이사이에 잠깐씩 쉬어가는 파트(보통 코미디나 가벼운 로맨스가 동원된다.) 정도만 집어넣으면 대충 대여섯 번의 등락으로 구성된 익숙한 장르 영화의 호흡이 완성된다. 반면, 긴장을 주는 파트가 의도적으로 배제된 영화는 거의 모든 시퀀스를 빼곡하게 코미디로 채워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는 코미디의 양과 질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극한과제로 이어진다.
극한직업은 그 부분에서 마치 주성치의 명작들이 연상될 정도로 괴랄한 타율을 선보인다. 홈런은 없다지만 2루타를 6할, 7할씩 때려 넣는 영화에서 미학적 완성도를 거론하는 것은 부질없다. 넷플릭스 글로벌 순위에 올라가는 순간 갑자기 감독의 의도가 느껴지는 것처럼, 이 정도의 범용성과 성공률을 겸비한 코미디라면 그 자체로 코미디의 미학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때론 철학적 메시지가 뒷받침되지 않은 코미디는 팝콘무비라는 식으로 저평가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극한직업은 대단히 잘 만들어진 뛰어난 영화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어쨌든 홈런은 없다는 것. 영화를 정의 내려줄 한 방은 분명 부족하고, 억지로 찾는다 하더라도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쉬움이다. 대개 명품 가방을 선물 받은 아내와 대화하는 장면, 배달전화 받는 장면 정도를 떠올릴 텐데 두 장면 모두 영화를 상징하는 씬이라기엔 다소 힘에 부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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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신파라는 말의 연원과 효용과 오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할 수 있으나 지금은 생략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