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잔인하고 곤혹스러운 시인의 세계
백해선 감독,
『연희 :: Yeon hui』입니다.
# 1.
몇몇의 배우들은 삶의 특별한 순간 감정적으로 격해질 때면 습관적으로 거울을 찾는다 한다.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비춰 기억하기 위함이다.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외면하거나 망각하고 지나쳤을 감정들. 자연인으로서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을 끔찍한 순간에조차 그 안에 담긴 모든 추악함까지 들여다보고 끄집어내어 새긴다는 건 마치 맨 손으로 선인장을 움켜쥐는 것만큼이나 아프고, 그래서 고단한 일이다.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과 수업. 무명의 시집에 담긴 시를 베껴 교수와 동기들에게 인정받던 학생 연희의 수업에 청강생 강희가 들어오며 단편은 시작된다. 교수의 칭찬과 동기들의 부러움에 여유를 부리며 스스로의 치부를 외면하던 연희는, 재능 있는 강희의 작문에 점점 열등감을 느낀다. 우연히 자신이 베꼈던 시집을 강희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연희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학기 마지막 과제는 '비밀 드러내기'. 부끄러운 과거를 용기 있게 고백한 강희의 시선은 다음 차례인 연희에게 향하고, 연희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려 애쓴다.
# 2.
짐짓 시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시들은 충분히 고통스럽고 심지어 가혹한데, 다른 모든 예술들이 그러하듯 결국 시라는 것 또한 세계와 그 세계를 인지하는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배우는 연희의 내면을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는 단편은 그 자체로 이미 시에 대한 영화다. 하나하나의 시퀀스는 연희라는 시의 연이 된다. 각각의 행에는 그녀의 칭찬받고 싶은 욕망과, 재능에 대한 갈망과, 시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의심과, 고통과 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저질러버린 치부에 대한 죄책감과, 치부를 자백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폭로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거칠지만 정직하게 뒤엉킨다. 마지막 관객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드라마틱한 행에 도달하기까지의 표현들. 이를테면 오랜만에 듣는 사각이는 연필소리나, 눈가를 간지럽히는 눈썹 한 올, 부르튼 입술의 피로감, 애꿎은 손톱을 괴롭히는 손끝의 조바심, 이어폰을 끼고 뒤돌아선 위축된 감정은 모두 그 자체로 시적인 은유가 되고, 따라서 시의 인상을 결정짓곤 하는 심미적 표현들이란 그 자체로 본질이 아닌 것이다.
시란 그러하다. 마지막 연희가 울먹이며 더듬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토해내기 위해 깨끗하고 평화로운 것뿐 아니라 비굴하고 추악한 것까지 집요하게 직시하고 조각한 끝에 출산하는 사람의 아픔과 고단함이다. 마지막 주저하는 연희의 고백도 버겁고, 그 고백을 듣는 관객의 마음도 따갑다. 관객 저마다에게도 직시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치부가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속 시원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저하는 더듬거림에서 칼로 잘라낸 듯 마무리한 후 사색을 위한 여백을 던진다. 영화가 생각하는 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직시하는 것뿐이고, 시를 읽고 솔직해지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 3.
그렇다면 영화는 단순히 시의 재현일 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든 영화에는 영화만의 이유가 있고, 단편 <연희>의 의의는 화자의 내적 갈등의 요체들을 의인화해 투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인공의 치열한 내적 갈등과 번민을 수업의 형식으로 빗대어 구체화한 것이라는 추측이다. 교수는 연희가 배운 시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윤리 강령을 반영한다. 자조적인 친구들은 미숙한 연희의 현실을, 연희는 연희가 스스로 연기하고 있는 자아를, 강희는 연희가 이상화한 자아를 의미하는 식이다. 실제 강희는 지나칠 정도로 연희의 콤플렉스를 투사하고 있고 모든 면에서 연희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강희는, 누구도 알지 못할 비밀스러운 치부를 알고 있다거나 친구들이 하나둘 옮겨가는 것뿐 아니라 당장 '연'약하고 '강'인한 이름에서부터 연관성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영화는 크게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과, 어두운 연희의 방으로 구분되는 데, 실제 연희는 오로지 자기 서재 책상 앞에만 멍하니 앉아 있었을 뿐이고, 우리는 영화를 통해 고뇌하는 시인의 텅 빈 눈 속을 들여다본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대로 흥미롭다.
그렇다면 감독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인 걸까. 내면의 치부에 대해 집중하긴 했지만 표절이라는 테마 역시 매우 주요하다. 편하게 남의 것을 훔치고 싶은 욕망은 모든 창작자들의 유혹이고, 이는 단편을 찍은 젊은 감독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앞서 영화는 연희에 대한 시라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모든 것들조차 고뇌하는 백해선의 시인 것은 아닐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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