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아포페니아를 지적하고 싶었던 교수님의 아포페니아
연상호 감독,
『계시록 :: Revelations』입니다.
# 1.
아포페니아를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정확히는 '세상 사람들이 아포페니아와 확증편향에 빠져 있다'라는 감독의 진단을 관철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영화다. 목사 성민찬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마자 이야기의 주도권이 형사 이연희에게 홀랑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연희의 환각과 환청이 민찬과 본질을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권양래의 실체로 이야기의 흐름이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대부분의 내러티브는 사람들을 ‘묘사’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함으로써 ‘증명’하는 방향으로 짜여있다. 목사 정국한과 아영의 부모 등 보조적 캐릭터를 배치해 볼륨을 보강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편리한 확증편향의 사례로서 금세 소비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요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관객들까지 제멋대로 수집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폭우가 내리던 날 절벽의 형상이나, 병원 창문 밖의 구름 따위를 ‘민찬이 보고 있는 시점’으로 표현한다. 우악스러운 그래픽과 별개로 아포페니아에 대해 대화하고 싶었다면 할 수 없는 방식이다. 관객에겐 그렇게 볼 수도 있나 싶은 애매함 그대로 건조하게 비추되, 확신에 찬 목사의 충전된 표정을 대비시켜 위화감을 연출하는 것이 아포페니아를 이미지화하기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반면, 계시록의 방식은 관객에게 착시를 실제 하는 것으로 느끼게끔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격한 연출로 표현된 몇몇의 순간을 신의 계시처럼 느낀 것은 관객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감독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포페니아를 관객들의 손에 쥐어준 다음, 받아 든 관객들에게 ‘거 봐라. 니들은 미개하게 확증편향에 휘둘리고 있다’ 지적하는 셈이다.
‘성민찬, 이연희, 권양래는 기저에 같은 정신상태를 공유한다’라는 이낙성 교수의 논평은 사실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이고, 따라서 이낙성 교수는 감독의 페르소나다. 구역질 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낙성 교수라는 캐릭터에게서 터무니없는 자의식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에 허덕이는 감정적인 바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지적으로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명명백백한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기꺼이 비판을 감수하는 사람. 고귀한 숙명을 다하는 것임에도 어리석은 자들이 팔매질하고 있지만, 이 모든 고난까지 신의 뜻이라는 자의식은 누가 보더라도 이낙성 보다는 성민찬과 닮았다. 계시록은 아포페니아를 비난하려는 자의 아포페니아.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드라마도 호러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흐리멍덩한 영화에서 자신의 사명을 선명히 발견한 감독의 아포페니아다.
# 2.
애초에 모든 캐릭터들이 계산적으로 수집된 것이기에 다수의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개성도 없고 그래서 변별력도 없다. 모두는 확증편향에 휩싸인 어리석은 존재라는 감독의 주장에 복무하기 위한 사례로서 동원되어 있고, 따라서 모든 배우들은 똑같은 톤으로 똑같은 불안과 똑같은 광기를 연기할 수밖에 없다.
류준열의 연기가 칭찬받는 듯하나 이는 배우의 능력과 무관하게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같은 연기를 하는 데 가장 넓은 공간을 부여받은 캐릭터이자 가장 배려받고 있는 캐릭터가 민찬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배역들은 배우가 아무리 열심히라 하더라도 그보다 상대적으로 작위적인 하위호환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연희를 연기한 신현빈은 특히 손해가 크다. 그녀는 류준열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배역을 받았다. 플롯에서의 역할은 형사로서 기능하는 데 감정선은 자식을 잃을 뻔한 민찬이나 아영의 부모, 자식이 사고 친 정국환 목사와 동일하다. 불안 밖에 연기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배우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환각에 두려워하면서 이성적으로 사건을 추적하면서 물리적인 액션까지 소화해야 한다는 것은 일견 잔인해 보일 정도다. 1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나마의 류준열조차 보다 보면 지겹다. 내적 갈등을 지나 본격적으로 아포페니아의 사전적 정의를 완전히 수행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인물의 말과 행동과 대처는 예상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아닌데? 맞아요! 신의 뜻이야! 아닌데? 맞아요! 신의 뜻이야! 이 모두는 토드 필립스의 조커가 그러했듯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이루어졌어야 할 민찬의 폭주가 적어도 1시간가량 앞당겨진 탓으로, 그 이유는 앞선 단락에서 이야기한 대로다.
# 3.
노골적인 목적에 귀속된 영화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완성도는 처참하게 추락한다. 특히 전개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cctv가 고장 났다'라는 한 문장으로 경찰을 모두 따돌리면서, '흙 묻어있다'라는 한 문장으로 연희는 모든 진행을 자유롭게 통과한다. 변주를 주겠답시고 하는 게 고작 cctv 하나를 치매 걸린 노인으로 바꾼다거나, 흙자국을 오디 열매자국으로 바꾼다거나 하는 모습은 불쾌할 정도로 게으른 상상력이다. 사람을 죽인 민찬은 시종일관 허술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 몇몇의 장면에서는 대놓고 ‘시신은 찾았습니까?’ 이 지랄하며 범인임을 자백하는 데, 그보다 더 짜증스러운 건 주인공인 연희를 제외한 나머지 형사들은 못 알아듣는 척 바보 연기를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어미가 딸이 실종되었다는 데 기도회나 하고 자빠져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확증편향에 빠진 광신도들 사이에 아영의 엄마를 앉혀 감독의 주장을 이미지화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것은 알 바가 아니다. 바람피우다 걸린 민찬의 아내가 차 안에서 회개하는 장면의 급발진도 어이가 없지만 대충 넘어간다 치더라도, 혼이 빠져나갈 듯 울부짖더니 유유자적 오후 일정 치르는 모습은 뭐 하는 건가 싶지만 어쨌든 병원에 민찬을 데려가 양래를 납치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것 역시 알 바가 아니다.
특히 감독이 관객들을 등신으로 보고 있구나 확신한 것은 권양래에 대한 동정론 운운하는 대목이다. 자취방에 감금당한 채 수차례 강간을 당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넝마가 된 피해자가 버젓이 살아있고 법정에서 절규하기까지 하는 데 못생긴 권양래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나는 게 가능하다는 주장은 황당하고, 이는 감독이 지적질을 위한 지적질을 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해 인식하는 지경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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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별을 주겠답시고 선택한 것이 고작 딸에서 동생으로 바꾼 태만함은 하찮기 그지없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