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쉬운 길을 어려운 일인 양 주행한다.
강예솔 감독,
『로봇이 아닙니다. :: I’m not a Robot.』입니다.
# 1.
문장형의 제목은 썩 익숙하다. reCAPTCHA 테스트의 문구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리캡챠는 봇을 필터링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오히려 인간이 로봇이 아님을 시험받는 구조로 짜인 테스트다. 역설적이게도 시행하는 인간의 인간스러운 선택과 인간스러운 움직임을 심사하는 주체는 온전히 프로그램이고 말이다.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리캡챠를 누르다 보면 애매한 시험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계단을 누르라는 데 살짝 삐져나온 칸은 골라야 하는 걸까, 고르지 않아야 하는 걸까. 표지판을 골라야 하는 데 표지판의 봉은 골라야 하는 걸까, 고르지 않아야 하는 걸까. 오토바이를 찾아야 하는 데 저기 보이는 스쿠터는 오토바이라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내가 어떤 선택을 한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온전한 인간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테스트가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답한다면, 내 선택은 인간의 선택인 것일까, 로봇의 선택인 것일까.
리캡챠에서 영감을 얻은 감독은 두 개의 테마를 추출한다. 하나는 고압적으로 인간을 심사하는 프로그램과의 위계에 대한 문제, 둘은 그런 위계 속에서 심판되는 인간다움과 선택에 대한 문제다. 전자는 거슬리는 기계음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후자는 3D 시뮬레이션 전문가인 여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다.
# 2.
과격한 표현 아래 숨겨진 통찰은 시시하다. 아르고스의 신화와, 반지의 제왕 속 Ring Verse 등을 끌고 오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1984>와 빅 브라더의 재탕이다. 태초부터 감시와 통제는 권력이었으며 현대에는 그 역할을 구글을 비롯한 빅테크 기업이 대신하고 있다는 주장은 식상하다. 반복적으로 시가를 기도문인양 읊조려 분위기를 잡으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래서 일련의 작동에 대해 감독은 어떤 고찰을 하고 있느냐 물어도 아무런 대답은 없다.
시뮬레이션 전문가 파트는 더욱 심각하다. 위계 파트는 신화든 소설이든 무언가 표현이라도 있지만, 선택 파트는 그런 것도 없다. 시뮬레이션을 위한 3d 모델링의 프로세스가 지루하게 나열되는 장면은, 마치 잘 모르는 노년층을 구슬리기 위한 블록체인이니 멀티버스니 하는 키워드 장사질처럼 보인다.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 같은 작품들의 80-90년대 세기말 담론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는 바 없는 영화는, 그 끝을 아무런 빌드업도 없이 젠더에 꼬라박는다. 성인 남성은 90%, 10대 소녀는 50%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숫자는 자극을 위한 자극이다. 소녀의 죽음이 자동차의 입장에서 왜 합리적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그렇게 정하고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인공지능 로직의 논리적 선택이 부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면밀하게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감독 본인 손으로 던져 놓고 이건 시뮬레이션 탓이라 우긴다 해서 설득이 될 정도로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실험 영화의 느낌을 주기 위해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영화에는 어떤 종류의 실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장하기만 할 뿐이라 프로파간다에 가까운데, 그 주장의 퀄리티조차 얄팍하다 보니 일련의 표현 또한 있어 보이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 3.
조금 논외의 이야기를 하자면, 영화는 <다큰아씨들>이라는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후원받은 만큼 만드는 영화'를 표방한다 주장하지만 황당하다. 건강하고 패기 있는 산업적 실험인양 하지만 실상은 리스크를 후원자들에게 떠넘기는 흔한 크라우드펀딩에 불과하다. 직업적 안정성을 위해 후원을 받아서 작품으로 돌려드린다?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를 개봉해서 팔고 수익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과 다른 것은 실패했을 때의 위험을 누가 짊어질 것인가 단 하나뿐이다. 이건 비겁한 것이다.
후원받은 만큼 영화를 만들겠다는 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는 만큼 만들겠다는 건데 이 방식으로 창의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독립영화는 문자 그대로 독립성이 중요하고, 독립성은 경제적으로 빚지지 않는 것에 기반한다. 지금의 방식은 후원자의 성향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규모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시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후원자층의 성향에 더 진하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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