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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블루 얼럿 _ 더 킬러, 데이비드 핀처 감독

그냥_ 2023. 11. 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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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봉준호의 진단에 답하는 데이비드 핀처의 서슬 푸른 경고

 

 

 

 

 

 

 

 

데이비드 핀처 감독,

『더 킬러 :: The Killer』입니다.

 

 

 

 

 

# 1.

 

아무래도 킬러 영화들은 '킬러에게 표적이 된 사람의 서스펜스'라거나 '킬러가 엮인 특별한 사건의 스릴러'이기 마련일 텐데요. 본 작품은 제목에서처럼 킬러가 직업인 사람의 멘탈리티를 중심으로 풀어나갑니다. 혹자는 이야기가 심심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듯도 보이지만, 주인공의 생각과 감각을 추적하는 데 최대한 집중할 뿐 그 외의 타깃이나 사건은 중요하지 않기에 의도적으로 비워두고 있다 판단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위플래시와 라라랜드로 익숙하실 데미안 셔젤의 영화 중에 <퍼스트맨>이라는 작품이 있죠.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을 탐구하고 체험하는 것에 최대한 집중하는 작품이기에,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혹은 감동하지 못했던 묘사들을 극단적으로 배제했던 것과 부분적으로나마 방법론을 공유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로 든 퍼스트맨에서도 그러하듯 통상은 탐구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특수성을 탐미하기 마련입니다. 의인의 경우 평범한 당신과 어떤 면이 달랐고 그 와중에 어떤 본질적인 것은 같았는 가를 보여준다거나, 악인인 경우 이렇게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괴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죠. 그 과정에서 평소 당연하다 생각해 무디게 여겼던 무언가, 이를 테면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나, 윤리 의식과 가치관의 재고, 소소한 관계와 일상의 가치 따위를 반추하는 드라마가 완성되곤 합니다.

 

반면 <더 킬러>는 주인공의 특수성을 탐미한다는 장르의 보편적 방법론을 역행합니다. 주인공의 특별함을 과시하기는커녕 오히려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가를 묘사하는 과정으로 점철되고 있죠. 영화는 총 6개의 쳅터와 하나의 에필로그로 구성되는 데요. 특히 첫 번째 쳅터의 내레이션을 통해 주인공의 사고방식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인구 통계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약육강식이라는 사회에 대한 냉소적 진단, 선악설을 지지하는 듯한 인간에 대한 냉소적 진단 따위는 인물이 가진 합리화와 비겁함을 동시에 묘사합니다. 자신은 회의주의자일 뿐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는(Skepticism is often mistaken for cynicism)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자기변호는 상징적이죠. 동시에 권태나 방어기제, 미세하게 격앙되는 말투, 고독감, 경계심 등의 보편타당한 정서를 노출하기도 하는 데요. 이들 모두는 킬러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냉소적인 사람으로서의 사고방식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 2.

 

영화에 있어 킬러란 치열하고 처절하고 피로한 투쟁을 물리적으로 과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킬러는 생각보다 그렇게 유능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유능함은 대부분 상황을 벗어나는 순간의 유능함이지, 실행시키는 순간의 유능함이 아닙니다. 킬러로서의 능력은 다음 쳅터로 인물을 옮기기 위해서만 작동할 뿐, 동귀어진 할 요량이었다면 굳이 킬러가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이죠. 택시기사를 죽인다거나, 도둑이 든다거나, 오피스에 숨어든다거나, 배달부가 돌변한다거나 하는 일은 특별히 유능한 킬러가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주인공의 이름과 직업이 매 쳅터마다 변하고는 있지만 그 직업 모두는 지극히 평범한 직업과 관계들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행객, 애인, 물류 기사, 청소원, 좀도둑, 음식 배달부는 모두 일정하게 소시민성을 대변합니다. 스토리 역시 평범한 소시민이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의 과장으로 점철됩니다. 각 쳅터는 일에 실패함으로 인한 위험, 그 여파가 가족에 미침으로 인한 위험, 상사와의 갈등으로 인한 직업적 위험, 물리적 위험, 철학적 위험, 경제적 위험으로 요약됩니다. 감독은 일련의 투쟁의 끝을 클라이언트로 귀결시키는 데요. 클라이언트는 당연하다는 듯 돈을 주겠다, 필요한 것을 말하라 제안합니다. '소수'는 '다수'의 투쟁이 돈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킬러가 원하는 것은 복합적 의미에서의 안전이었죠.

 

첫 쳅터의 원형 계단은 킬러가 자신의 냉정함과 성실함이 계급 상승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착각을 의미합니다. 낡은 건물에서 요가를 하고 건강을 위해 빵을 뺀 햄버거를 먹으며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그것은 그저 같은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기만 할 뿐입니다. 결말부 클라이언트에게 잠입하는 장면에서의 넓은 주차장 슬로프는 진짜 상위 계급의 도달할 수 없는 압도적인 거리감을 물리적으로 표현합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모두가 죽는 와중에 클라이언트는 해치지 못한다는 점인 데요. 이는 곧 영화 속 투쟁이란 결국 '다수' 간에 주고받는 수평폭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로레스가 죽는 공간이 계단을 미끄러져 떨어진다거나, 죽은 변호사의 시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온다거나, 전문가가 죽는 장면 역시 계단에서 넘어진 순간의 살인인 것처럼 낮은 죽음인데 반해, 클라이언트와 타깃은 까마득히 높은 건물에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자주 활용하는 것처럼 수직적 계급 관계를 물리적으로 치환해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택시 기사의 죽음은 공터에 버려진 택시의 운전석입니다. 비스트의 죽음은 철창에 갇혀서도 등 뒤 불을 보지 못하고 짖는 개입니다. 전문가의 죽음은 연민과 친근함의 핸드백 속에 숨겨진 칼입니다. 모두는 다수 계급의 처절한 생존 투쟁을 이미지적으로 투사합니다. 이들의 죽음 뒤로 차마 죽이지 못하는 클라이언트의 존재는 다수 계급의 비극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 3.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킬러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구나 킬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킬러가 보통명사화 되는 순간 각각의 쳅터는 개별 에피소드로 해체됩니다. 세 번째 쳅터는 어느 변호사에게 원한이 생긴 청소부가 살인을 벌인 있을 법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쳅터는 비스트가 오해했던 것처럼 그냥 도둑이 들어서 사람을 죽이고 방화를 저지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섯 번째 쳅터 역시 어느 늦은 밤 강변에서의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관계는 각각의 쳅터 앞에 달린 지역명으로 연결되며 확장됩니다. 뉴올리언스는 변호사의 도시, 플로리다는 비스트의 도시, 뉴욕은 전문가의 도시, 시카고는 클라이언트의 도시라면. 이들이 죽어나간다는 것은 곧 뉴올리언스와 플로리다와 뉴욕과 시카고의 죽음이고, 이는 결국 미국의 위험이자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회의적일 뿐이라 착각하는 냉소적인 다수의 불안으로 인해 안에서부터 붕괴되는 미국입니다. 영화 중간중간 의뭉스럽게 녹아있는 국적이나 인종에 대한 코드들은 이 같은 사회적 맥락에서의 추측에 기여합니다. 타깃을 노리는 장면은 미국의 사회적 알레고리에서 벗어나 있기에 미국 밖의 파리로 설정된 것으로 이해하면 무난합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은신처 역시 도미니카 공화국에 위치시킴으로써 미국 밖으로 밀어냅니다. 영화 <더 킬러>는 강력한 계급론 위에서 작동합니다. 킬러가 대변하는 계급성은 수미상관의 형식으로 지적되는 소수와 다수에 대한 대사들을 통해 확인되고 강조됩니다. 마치 '한국 사회를 향한 봉준호의 진단'에 대한 '미국 사회를 향한 핀처의 대답'처럼 들리는 듯한 작품이랄까요.

 

 

 

 

 

 

# 4.

 

물론 그렇다 해서 분노한 다수에 의한 무정부주의적 폭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행을 경고한다 해서 불행을 독려한다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킬러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고, 이는 링컨의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의 이름을 짚음으로써 지적되고 있습니다.

 

감독은 작품을 통해, 다수에게는 자신의 무분별한 분노와 불안으로 인한 수평 폭력에 대한 경고를, 소수에게는 그 다수의 총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 있고 이는 원천적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달아날 수 없는 필연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비싼 돈을 들여 높은 건물에 숨더라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영화의 포스터는 포스터를 바라보는 사람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다수든 소수든 이대로라면 어차피 총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요. 이 같은 경제 계급 중심의 비판적 메시지를 읽고 나면 맥도널드에서 시작해 아마존으로 끝나는 배경은 흥미롭기도 하고 신랄하기도 합니다. 특히 아마존은 노동자의 희생을 발판 삼아 자본을 축적한다는 비판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기업이죠.

 

물론 연출적인 면에서도 탁월함은 가득합니다. 데이비드 핀처의 완벽주의적 결과물은 언제나처럼 높은 완성도의 저점을 보증합니다. 인물과의 거리감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사운드와 편집 기술. 내레이션을 동원하는 장면과 멈춘 후 숨소리로 전달하는 장면들의 서스펜스. 음악을 들으며 사람을 죽이던 킬러와 음악이 켜진 공간에서 음악을 끄며 들어가는 연출의 대비라거나, 유리창을 깨며 사람을 죽인 킬러와 은신처의 깨진 거울을 통해 상황의 역전을 표현하는 방식은 유려합니다.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미니멀한 가운데 비스트와의 격투 스턴트에서는 박력 있는 액션 연출력이 돋보이기도 하구요. 강력한 액션 시퀀스 이후에 면봉 같이 생긴 틸다 스윈튼의 위트는 관객 경험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자의 결과물이라 할법합니다. 물론 배우의 연기도 칭찬해 마땅합니다. 누구나 이면서 아무도 아니어야 하는 마이클 패스벤더는 선명한 캐릭터 대신 계급의 보편성과 추상성을 높은 밀착감으로 연기한다는 면에서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연기자인지 마음껏 선보입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 <더 킬러>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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