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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노을이 지난 후에도 _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미야케 쇼 감독

그냥_ 2024. 2.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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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처연하고 찬란한 노을이 지난 후에도 이어져 나갈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미야케 쇼 감독,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ケイコ 目を澄ませて』입니다.

 

 

 

 

 

# 1.

 

오가와 케이코. 도쿄 아라카와구 출생. 선천적 감음 난청으로 양쪽 귀가 모두 들리지 않는다.

2019년 프로복서 라이선스 취득. 데뷔전 1라운드 1분 52초 KO 승리.

 

선천적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負けないで)>를 원작으로 합니다.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라는 캐릭터가 목적의 전부였다면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감독은 구태여 영화라는 형식을 선택하고 있죠. 비슷한 경우 왜 굳이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한 걸까. 조금 더 정밀하게 질문하자면 감독은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 에 대한 대답을 탐미해 보는 것도 썩 괜찮은 접근이 됩니다.

 

작품은 크게 세 층위의 이야기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청각장애인으로서의 케이코, 여성 복서로서의 케이코, 그녀의 삶 전체를 담아내는 아날로그죠. 감독은 청각장애인이라는 '특별한 개인의 서사'를 복싱이라는 '보편적 삶의 원리'와 아날로그로 상징되는 '변화 속에서도 지켜나가야 할 사회적 가치'로 확장해 나갑니다.

 

 

 

 

 

 

# 2.

 

청각장애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불편이지만 동시에 고독감과 두려움에 집어삼켜진 마음의 상처이기도 합니다. 몸이 만드는 소리, 미트와 샌드백을 치는 소리, 기구가 삐걱거리는 소리, 글 쓰는 연필소리, 그 외 모든 소리들을 적극적인 메시지를 가진 언어로서 활용하는데요. 주변인과 관객은 사운드의 질감을 성실히 느끼지만 케이코는 인지하지 못하고, 이는 주인공이 느끼는 소외감의 사례를 성실히 증명합니다. 복싱을 쉬겠다 말한 후 친구와 수화하는 장면은 자막이 없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지 못하는 데요. 케이코의 소외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죠.

 

반면, 다양한 몸짓들은 소리를 대신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써 소통됩니다. 주먹에 얹어 주고받는 리듬과 호흡은 정직한 관계의 누적입니다. 감독은 직접적으로 복싱과 힙합을 연결시키기도 하는데요. 형태가 어떠한가 와 무관하게 합을 맞춰 주고받는 리듬에 본질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케이코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한데요. 영화의 시간들은 알게 모르게 그녀를 응원하고 보호하던 '눈으로 보는 소리'들을 발견하는 과정이자, 자기 입으로 내뱉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으로 점철됩니다. 빈 체육관의 거울을 닦는 모습은 거울을 닦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얼굴과 그 얼굴에 담긴 부정적인 감정과 인식을 닦아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케이코의 연습일지는, 여태까지의 영화를 다시 읽으며 케이코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라는 면에서 큰 감동이 있죠.

 

 

 

 

 

 

# 3.

 

직업이 복싱선수이기도 하지만, 복싱하듯 살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링 위는 어차피 혼자. 상대와의 관계는 쓰러트리거나 쓰러지거나, 투쟁에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의 이지선다뿐이라 생각합니다. 대단히 제한적인 인간관계와 어깨 부딪힌 사람을 대하는 소통의 방식 따위는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마초적이기 마련인 프로 복싱에 뛰어든 여성이라는 성별 역시 그녀의 고립된 상황을 강화합니다. 오프닝 웃옷을 벗은 선수 탈의실에 쭈뼛대는 장면을 포함한 눈치 보게 만드는 순간들, 등 뒤로 누가 드나드는지도 모르는 상황들은 모두 세상의 사건으로부터 분리된 케이코의 고독감을 증명합니다.

 

그녀의 고립과 투쟁은 역설적이게도 두려움에 근거합니다. 승리하기 위해 경기하기보다는 패배하지 않기 위해 경기하는 인물에 가깝죠. "아픈 게 싫다" 말하는 대목이라거나, 동생에게 말하는 "결국 사람은 혼자야. 나도 별로 강하지 않아"라는 한마디는 그녀의 두려움을 증언합니다. 두려우면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엄마가 그만하면 충분치 않냐 제안하는 것이라거나, 결국 복싱을 그만두기로 결정한 순간, 들어갔던 체육관을 다시 나오는 발걸음과, 새로운 체육관에 주저하며 집이 멀어서라 변명하는 비루함은 모두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뒷걸음질 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혹은, 에라 모르겠다 앞으로 돌격하기도 합니다. 복싱을 시작하기 전에 과격한 싸움이 있었다거나 마지막 경기에서 평정을 잃고 돌진하다 카운터에 쓰러지는 장면은 모두 두려움에 근거합니다. 발을 밟히자 평정을 잃는 것은 체육관이 사라진 분노와 두려움에 평정을 잃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케이코. 복싱은 싸울 마음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 싸울 마음이 사라지면 상대에게도 실례야. 위험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케이코” 관장은 시합을 주저하는 케이코에게 조언하는 데요. 본인의 의지와 상대에 대한 예의를 함께 지적하는 한마디는 비단 복싱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조언인 것이죠.

 

 

 

 

 

 

# 4.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물러서지도 돌진하지도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위빙, 더킹. 좋은 리듬으로 침착하게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다 원투죠. 영화의 시간 대부분은 스파링이나 경기가 아닌 코치와 합을 맞추는 시간들로 점철되는데요. 복싱의 본질은 상대에 대한 전쟁이 아닌 자신의 거리와 리듬을 찾는 것이고 이는 삶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거리와 리듬을 찾기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하고 호흡을 맞추고 추억을 쌓는 것이죠. 코치와 연습하는 장면과 늦은 밤 동생네와 춤을 추는 장면은 감독이 포착하고자 하는 본질을 명확히 공유합니다. 케이코는 체육관의 마지막을 앞두고 관장과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고 연습하는데요. 내면의 두려움 앞에 눈을 응시하고 거리와 리듬과 균형을 유지하는 케이코의 성장은 관장이 마지막으로 전수하는 복싱 지도이자 인생 지도죠.

 

경기를 기준에서 보자면 첫 경기에서 승리하고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합니다. 패배했던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승리하는 평범한 서사와는 반대죠. 승리나 패배라는 결과는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결말의 강변에서 케이코는 자신을 이긴 상대와 인사 나누는데요. 적을 상대로 주먹을 들던 케이코는 코치와의 연습을 통해 리듬과 호흡을 배우고, 관장과의 연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고, 마침내 상대를 통해 그녀 역시 내 발을 밟은 비열한 적이 아닌 나와 똑같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또 다른 나였음을 깨닫습니다.

 

케이코에게 집중하기 쉽습니다만, 영화 속 무수히 많은 사람들 모두 자신만의 복싱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육관의 마지막을 앞두고 울음을 참지 못하는 코치와, 선수의 미래를 끝까지 책임지려 머리 숙이는 관장, 생활비가 쪼들리는 와중에도 음악이라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동생, 쓰러질 듯 버겁지만 그럼에도 경기를 지켜보는 엄마, 미래를 꿈꾸며 불안과 싸워나가는 수많은 선수들, 호텔 일을 새로 배우는 신입까지. 반복되는 인서트 속에서 주인공이 지나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증명하는 나름의 성실함과 이를 일정하게 관철해 나가는 균형과 리듬은 청각장애인이나 여성 복서뿐만 아닌 인간 보편의 가치로 확장됩니다.

 

 

 

 

 

 

# 5.

 

16mm 필름의 감성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죠. 필름은 영화 속 무수히 녹아있는 아날로그들을 대변합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오던 체육관과 낡은 화이트보드와 샌드백, 연필로 끄적이는 일지와 바느질하고 있는 글러브 그림, 먼지가 자욱한 트로피들과 머리 처박고 들여다보는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 따위죠. 특유의 질감은 아날로그의 특성과 만나 영화의 모든 순간들을 처연하게 석양 지는 노을로 만들어 작품의 진중함을 지지합니다. 노을처럼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사랑. 일본 영화가 이런 감성은 정말 귀신같이 잘 쓰죠.

 

감독은 영화를 통해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대체되는 시대, 코로나에 만나지 못하고 입을 가리는 시대임에도 그럼에도 이어져 나갈 소중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정직하고 솔직한 인간적인 기량의 가치.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의 용기 있는 한마디. 입을 가리고 귀를 막아도 눈을 들여다보며 연결될 관계. 우리들의 호흡과 리듬. 치열하게 땀 흘린 후 건네는 겸허한 악수, 전수하고 전수받으며 이어지는 역사와, 그 모든 과정에서 새어 나오는 온화한 웃음인 것이죠. 그런 면에서 관장은 케이코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체육관이라는 균형을 힘닿는 데까지 성실하게 버텨온 사람이니까요. 영화가 지향하는 바의 의인화 같은 인물인 것이죠. 인생이라는 멋진 복싱 경기를 끝내고 링 아래로 담담히 내려오는 사람. 체육관에 전시된 트로피들은 감독이 관장과 그의 세대에게 바치는 선물입니다.

 

 

 

 

 

 

# 6.

 

다소 뜬금없을까요. 방법론적 측면에서 놀란의 오펜하이머가 함께 연상된다는 것은 썩 흥미롭습니다. 놀란은 맨해튼 계획을 묘사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무한히 반복 분열하는 핵반응과 구조적으로 연결지은 후 영화적 방법론으로 끌고 들어오고 있는 데요. 이 작품 역시 단순히 청각 장애를 가진 복서 케이코가 다음 경기를 준비한다는 사건뿐 아니라, 그녀의 인생을 그 자체로 하나의 복싱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해석함과 동시에 보편성을 추출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인격적 성장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일지에 담긴 매일매일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주인공의 담담하고 솔직한 목소리는 감동입니다. 정직한 몸의 움직임과 소리는 크나큰 울림이 됩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코치와의 미트 연습도 인상적이구요. 이 모든 순간의 감동을 모아 석양의 실루엣을 받으며 달려 나가는 결말은 대단합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리로 그린다는 것. 인물과 서사와 영상과 소리와 편집 그 모든 면에서 걸작이라기에 부족함이 없죠. 미야케 쇼 감독,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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