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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옳음과 올바름 _ 패러다이스, 보리스 쿤츠 감독

그냥_ 2023. 8.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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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합리의 구심력에 저항하는 윤리의 원심력

SF적 상상력을 끌어내리는 현실의 중력

 

 

 

 

 

 

 

 

보리스 쿤츠 감독,

『패러다이스 :: Paradise입니다.

 

 

 

 

 

# 1.

 

수명을 거래하는 SF 영화라면 앤드류 니콜의 <인 타임>이 생각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파과적 상상력과 아만다 사이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캐스팅으로 이목을 끄는 데까진 성공했었는데요. 태만한 세계관 연출과 어색한 액션, 괴랄한 전개에 방점을 찍는 허무한 결말로 실망스러운 평가를 듣고 만 작품이었죠. 언젠가부터 소재의 자극성과 주연 배우의 미모에 힘입어 [결말 포함] 딱지 붙인 싸구려 유튜브 등지에서 소비되고 있는 듯한데요. 아무리 망작이라지만 썩 가혹하군요.

 

여하튼 아이템의 창의성이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이미 선점한 영화가 있다는 점, 특히 그 영화가 망했다는 점은 패러다이스에게 악재로 느껴지기는 합니다. 다만, 보다 보면 두 작품은 생각보다 더 궤가 다른 영화라는 걸 알게 되는데요. 수명이 화폐를 대신할 뿐이었던 인 타임과 달리 패러다이스의 세계는 1:1로 기증자와 수혜자가 맞교환하는 제한적 방식으로 전개되기도 하구요. 다른 무엇보다 인 타임은 끝내주는 비주얼의 남녀 주인공이 펼치는 장르물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과 달리, 이 작품은 관객에게 끊임없이 딜레마 안으로 들어갈 것을 제안하는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 2.

 

옛날에는 사람도 거래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문명에 신분제 특히 노예제가 있었으니까요. 낮은 신분의 인간은 노동력뿐 아니라 인격까지 종속되어 소비되었었죠. 반면 현대의 민주주의적 인간은 노동력과 인격을 분리하는 데 합의합니다. 우리는 합리적 기준에 입각해 노동력을 거래하지만, 윤리적 기준을 근거로 인격은 거래하지 않고 거래할 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러하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현대인은 노동력만을 거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력뿐 아니라 시간, 즉 수명까지 함께 거래하고 있으니까요. 근로 단위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노동력이나 노동생산량이 아닌 시급, 월급, 연봉 따위의 '시간'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우리가 수명을 거래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증명합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수명이라는 그릇에 얹어 판매한 후 이익을 보상받습니다. 수명이란 짐짓 온전히 인격의 영역에 있는 듯 보이지만, 노동하는 동안에는 거래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영위하는 동안에는 인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중간자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주인공의 아내 엘레나는 고가의 집을 태워먹은 바람에 담보로 잡았던 38년 치 수명을 지불하게 되는 데요. 대신 그만큼의 빚을 갚기 위해 38년간 일상을 포기당할 정도의 노동을 요구받았다 가정한다면, 그 두 가지 상황 사이에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라는 질문에는 분명 모호한 지점이 있죠. 수명을 가져간다는 것은 노동하느라 고생스러울 순간들을 '스킵'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힘든 과정을 건너뛴다는 측면에서 문득 아담 샌들러의 <클릭>이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빚을 졌으니 일해서 갚아라는 것은 노동력과 관련된 합리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빚을 졌으니 노예가 되어라는 것은 인격과 관련된 윤리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명이라는 것이 노동력과 인격의 중간 지점을 점유하는 개념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합리와 윤리의 대결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 3.

 

인공적이고 논리적이며 기하학적인 회사는 '합리'를 상징합니다. 자연적이고 감정적이며 유기적인 난민 캠프는 '윤리'의 공간입니다. 영화는 동선의 측면에서 회사에서 출발해 난민 캠프를 향해 단일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축약할 수 있습니다. 점점 합리에서 멀어져 윤리에 다가간다는 것이죠. 반면, 서사는 윤리보다 합리에 우호적인 즉 동선의 역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영화 속 사건이란 주인공 부부를 합리적 사고로 설득하는 과정이라 정의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죠.

 

비극의 시작이었던 화재의 책임을 엘레나에게서 회장 소피 타이센의 음모로 옮겨 담은 것은, 윤리적 책임감은 크게 덜어내면서 수명을 돌려받아야겠다는 합리성을 강화합니다. 소피 타이센에게 수명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사실 딸 마리 타이센이었다는 반전을 통해 잠시 윤리를 보강하기는 하지만, 금세 마리가 엘레나를 향해 총을 당기는 모습을 연출하며 다시금 합리를 강화합니다. 아이를 가진 애먼 부부를 총으로 협박해 난관을 통과하는 시퀀스는, 합리를 위해 윤리를 외면하고 있는 부부의 상황을 그 자체로 상징하고 있죠.

 

 

 

 

 

 

# 4.

 

부부 맥스와 엘레나는 분명 사랑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립하는 캐릭터입니다. 도입부 차 안에서 투닥거리는 장면은 감독이 두 캐릭터를 어떤 목적으로 쓰고 싶어 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죠.

 

맥스는 회사에 속한 세일즈맨이라는 설정을 가진 '합리의 인간'입니다. 엘레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윤리의 인간'입니다. 감독은 합리의 인간에겐 설득하던 타인이 아내가 되어버린 자기모순을 부여합니다. 모순 앞에서도 합리를 고수할 수 있을까 묻는 것이죠. 역으로 윤리의 인간에겐 당장 인생이 망가져 버린 자신의 처지로 이기심을 독려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끝나게 생겨버린 상황 앞에서도 윤리를 고수할 수 있겠느냐 묻는 것이죠.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결말에서 두 사람은 드라마틱하게 교차합니다. 합리의 인간인 남편은 윤리의 인간이 되고, 윤리의 인간인 아내는 합리의 인간이 되는 것이죠. 남편은 윤리적인 선택 덕에 마음은 편하겠지만 합리를 상징하는 사회적 관계라거나 안전한 미래를 잃게 됩니다. 마지막 씬에서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분명한 비극임을 명시합니다. 아내는 합리적 선택으로 젊음과 새로운 아이와 새로운 남편을 모두 얻지만, 그를 위해 맥스와 마리를 희생시킨 윤리적 가책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미래를 상징하는 드넓은 바다를 앞둔 엘레나의 등 뒤를 잡는 맥스의 배치는 그 자체로 죄책감을 상징하는 미장센입니다. 일련의 결말은 윤리와 합리 중 한쪽 편을 드는 대신, 합리와 윤리 둘 모두의 모호성과 불완전성을 강하게 지적한 후 전시합니다.

 

감독은 합리와 윤리에 대한 고찰이라는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SF적인 상상을 현실 세계로 끌고 내려옵니다. 수명을 옮기기 위해 DNA가 맞아야 한다는 설정과 직계의 경우 성공률이 높다는 설정은 장기 이식 혹은 장기 매매와 같은 현실적 문제의식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개인이 투쟁하는 형식을 빌려오고 있지만 누구나 아시다시피 상당히 강력한 계급론적 문제의식을 끌고 들어오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빈자의 수명이 부자에게 전개되는 구조라거나, 방탄조끼 덕에 멀쩡히 살아있는 회장과 총 맞고 즉사하는 반란자의 대비는 노골적이죠. 마지막 난민이라는 코드 역시 합리와 윤리의 불완전성이라는 문제의식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 5.

 

빈민에 난민이면 창창한 나이니까 한 5년 주고 한몫 당기면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라는 나이브한 생각으로 관객을 유도한 다음, 딜레마에 몰아넣는 방식은 도발적이고 위력적입니다. 재벌들이 끝없는 수명을 얻게 되면서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느껴 막아낼 수 있었다는 대목은 합리의 극단이 주는 위화감을 참신한 상상으로 구현한 깨알 재미라 할 수 있겠죠.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이클 샌델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과 같은 저술에서 지적하는 내용들, 이를 테면 돈을 주고 새치기를 사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인가라는 류의 문제의식으로 확장되는 맛도 있습니다. 다소 딱딱할 수도 있었을 철학적 사고실험을 과장해 장르 영화로 구현했다는 점은 인정받아도 좋은 거겠죠. 딜레마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연출 또한 칭찬받을만합니다.

 

반면 결말에서 문제의식을 힘 있게 전달하는 데에는 다소 미흡해 매가리 없이 털썩 주저앉는 감은 있습니다. 전반부 수명 거래와 관련된 SF의 설정적 재미가, 후반부 합리와 윤리의 딜레마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탄력을 받지 못해 휘발되는 듯한 감각도 있습니다.

 

특히 남편과 아내의 심정 변화에 더 많은 정성을 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크게 남습니다. 두 사람의 선택 모두 불완전한 가운데 그 선택을 하게 되는 개인으로서는 모두 설득되었어야 하는 데 이 부분에서 미흡합니다. 때문에 한쪽에서는 마지막에 돌아서는 남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마지막에 폭주하는 아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동시에 나오고 말았죠. 보리스 쿤츠 감독, <패러다이스>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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