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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가장 사소한 우주 _ 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 감독

그냥_ 2024. 1.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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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그놈은 그냥 돌멩이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들은 그것에 놀라 확 달아난 것이여.

 

 

 

 

 

 

 

 

웨스 앤더슨 감독,

『애스터로이드 시티 :: Asteroid City』입니다.

 

 

 

 

 

# 1.

 

가장 사소한 우주 영화입니다. 통상의 우주 SF라면 웅대한 우주를 탐험하는 초라한 인간의 대비라는 식으로 풀어가기 마련일 텐데요. 웨스 앤더슨은 독특하게도 스케일의 역전을 시도합니다. 우주의 구조를 도식화해 미니어처처럼 끌고 내려온 후, 관객으로 하여금 이를 내려다보게 만들어 관조적으로 삶과 우주의 원리를 통찰해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죠.

 

작품은 연극을 준비하는 무대 뒤 흑백 화면과, 그렇게 실현된 연극의 컬러 화면으로 구분되는 극중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요. 사실 수많은 관객들이 혼란스러워했던 것처럼 구체적인 레이어는 그보다 훨씬 깊고 또 복잡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웨스 앤더슨이 만든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 속으로 들어갑니다. 관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레이어는 그 어떤 배우도 아닌 화자로서의 호스트입니다. 다음으로 극작가 콘래드 어프와 감독 슈베르트 그린의 레이어가 존재합니다. 그다음 그들이 만드는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하나의 우주로서 온전히 작동하고 있죠. 연극의 세계 속에서 다시 가상의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있고, 그 안에 소행성이 충돌했다는 크레이터가 더 작은 레이어로서 존재합니다. 그렇게 타고 타고 내려간 끝에 도달하게 될 가장 작은 레이어는 외계인이 가져갔다 돌려놓는 소행성 조각이라 할 수 있겠죠.

 

비단 수직적이고 점층적인 레이어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연극 속 등장인물들은 소행성과 별개로 아내 혹은 엄마를 잃는다거나, 극중극중극의 시나리오를 연습한다거나, 꼬마 아가씨들처럼 마녀를 상상한다거나, 친구와 이성을 사귄다거나 하는 식의 각자의 내러티브에 따라 새로운 하위 레이어로 분화됩니다. 콘래드 어프가 만나는 수많은 배우들의 꿈 역시 각자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애스터로이드 시티로서 분화됩니다. 가장 크게는 영화를 보고 있을 관객들 또한 개인의 인격에 따른 각기 다른 감상이라는 면에서 새로운 구심점으로 분화되고 있죠. 심지어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멀리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뜬금없이 지붕 위로 올라가는 누군가처럼 특유의 롱테이크 너머 보이는 모든 사건들 또한 그 자체로 각자의 방향으로 뻗아가는 분화된 레이어로서 기능합니다. 정신이 없을 수밖에요.

 

 

 

 

 

 

# 2.

 

영화의 사건들은 구조적으로 보자면 동심원이라는 자기 유사성을 반복하는 프렉탈 구조 위에 배치됩니다. 엄마 잃은 아이들은 마녀를 상상하는 동안은 자전하지만 홀로 남은 아빠를 중심으로 각자의 반경에서 공전하기도 합니다. 각지에서 모인 천재 소년들은 자신의 연구를 중심으로 자전하지만 히켄루퍼 박사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공전하기도 합니다. 과학 행사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과 선생님 역시 다채로운 수업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죠.

 

흑백 화면 속 연극배우들은 콘래드 어프의 작품에 포획되어 공전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꿈속에서만큼은 스스로를 구심점으로 삼아 자전합니다. 가장 바깥의 관객들 또한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붙잡혀 공전하고는 있지만, 그 감상만큼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면에서 스스로 동심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은 우리 은하 속에서 다시 공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가장 중심의 조그마한 소행성 조각에 포획되어 거대하게, 웅장하게 회전합니다.

 

이 같은 동심원의 프렉탈 구조는 지극히 기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형식미를 통해 표현됩니다. 감독은 미술 연출을 통해서도, 카메라 연출을 통해서도 동심원 구조를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다른 사건이라 하더라도 카메라가 옆으로 회전하고 있다면 같은 레이어 위의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을 교차로에 놓은 카메라를 한 바퀴 돌리는 장면이라거나, 인물들을 쭉 훑고 지나가는 롱테이크 패닝 쇼트들은 대표적이죠.

 

반면 같은 상황에서 같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다 하더라도 줌이 걸린다면 다른 레이어로 이동했음을 의미합니다. 어기 스틴백과 밋지 캠벨이 창문 너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겠죠. 가장 줌 아웃되어 있는 순간의 두 사람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격리된 사람'이라는 레이어에 존재합니다. 그 단계에서는 건물 밖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전경이 스크린의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죠. 반면 한 단계 줌인되어 도시가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게 되면 두 사람은 쌍성을 이루어 질량 중심을 공유하며 공전하는 관계로 전환됩니다. 그러다 밋지 캠벨이 욕조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하자 다시 한번 줌이 걸리는 데요. 그 순간 스칼렛 요한슨은 밋지 캠벨이라는 개인에서 손에 들린 시나리오 속 여인의 레이어로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 3.

 

일련의 프렉탈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게 될 변화는 바로, '작은 소행성 조각이 정체불명의 외계인에 의해 사라졌다 나타났다'라는 '불확실성'이 전부입니다. 중력에 끌려 털썩 추락한 소행성 조각의 건조하고 둔탁한 충격은 파동이 되어 상위 레이어로 점점 퍼져나갑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띄워둔 나뭇잎이 돌멩이 하나가 물에 던져짐에 따라 파도에 밀려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관찰하는 듯한 작품인 것이죠. 앤딩에서 사람들을 태운 차량들이 각자의 방향을 향해 곧게 뻗어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의식과 방법론을 복합적으로 표현합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가 이상해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설명가능하고 이해가능한 상황의 조립을 기대하고 심지어 집착하기 때문이죠. 인간은 불확실성을 최대한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는 존재라는 진단은, 작품을 관통하는 허무주의와 낙관주의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해되지 않고 덧없게 느껴졌다는 일부의 혹평이 역설적이게도 이상적인 감상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주의 원리란 이해되지 않고 덧없다는 것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죠.

 

감독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통찰한다 말씀드렸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웨스 앤더슨의 '불확실성'이란 '저항'이 아닌 '동력'이라는 점입니다. 통상 불확실성이라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인간 예찬으로 흘러가기 마련일 텐데요. 감독은 불확실성을 그 자체로 지루한 공전 궤도를 벗어나 보다 상위 레이어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게 만드는 에너지로서 해석합니다.

 

 

 

 

 

 

# 4.

 

우리 모두는 거대한 우주에 종속된 사소한 부속품으로서 공전하지만, 동시에 각자의 레이어에서 자신의 우주를 관할하는 구심점이기도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극단적인 스타일과 구조와 형식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인이 되는 동심원을 가득 메운 내용은 지극히 통속적이고 인간적인 감정들이라는 점입니다. 

 

아내를 잃은 한 남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납니다. 엄마 잃은 아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니다. 사위가 탐탁잖은 장인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타협에 이르죠. 천재적이지만 사교적이지 못했던 아이들은 친구를 사귑니다. 젊은 소년들은 윤리와 규칙 사이에서 용기를 선택합니다. 소담한 학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만들기도 노래 부르기도 춤을 추기도 합니다. 예술가들은 이 불확실한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꿈꾸며 영감을 표출합니다. 가장 바깥의 레이어에서 영화를 보게 될 관객들 역시 작은 소행성 조각에서 비롯된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들의 감정들과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을 가지고 극장을 떠나가겠죠. 앤딩에서 마을 중심에 카메라를 놓고 차량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그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이유입니다. 관객은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갈 뿐, 감독은 그 출발점에 앉아 자신의 관객들이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는 그 자체로 제멋대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소행성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인 데요. 그런 면에서 동그란 눈과 찐따 같은 자세의 외계인은 감독 웨스 앤더슨이 스스로 상상한 본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몰래 훔쳐보고 싶어 하는 듯한 검은색의 응큼한 속내를 가진 소심한 외계인의 디자인은 특별히 흥미롭다 할 수 있겠죠. 웨스 앤더슨 감독, <애스터로이드 시티>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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