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예술가는 끝인사마저 이렇게 눈부신가.
알랭 레네 감독,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You Haven't Seen Anything Yet』입니다.
# 1.
작가 앙투앙의 비보에 13명의 배우가 초대된다. 다정하게 손님을 맞은 집사는 유언이라며 영상을 하나 보여준다. 화면을 향해 걸어 나오는 이는 거짓말처럼 해맑은 앙투앙이다. 이미 죽은 앙투앙은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한 후 부탁을 하나 청한다. 자신이 쓴 연극 <에우리디케>를 젊은 예술가들이 다시 연기하려 하는데, 리허설 영상을 보여줄 테니 가부(可否)를 대신 결정해 달라는 것이다. 장례에 참석한 배우 모두는 과거에 <에우리디케>에 참여한 연기자들이었다.
배우들은 리허설 영상을 보다 말고 자신의 에우리디케를 선보인다. 객석은 삽시간에 무대가 된다. 집중력과 흡입력은 압도적이다. 다만 배우 각각이 연기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 모른 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이 보는 연기는 실존하지 않는다. 리허설을 계기로 되살아난 기억의 모습이다. 정신은 눈앞에 펼쳐진 연기처럼 선명하다. 그 정신은 고유한 것이다. 영화에는 각기 다른 위상(位相)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유함이 펼쳐진다. 저마다 에우리디케를 연기했던 시점도 다르고, 그에 대한 해석도, 열화 된 기억도 다르다. 신화 속의 에우리디케와, 희곡의 에우리디케와, 앙투앙에 의해 재해석된 에우리디케와, 이를 되새기는 각기 다른 배우들의 에우리디케 역시 모두 다르다.
# 2.
고유한 정신은 알랭 레네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중첩된다. 둘 이상의 배우가 만나 조화하며 연결된다. 신화와 유령과 인간과 창작과 차원의 경계는 무너진다. 시간도 공간도 사상(事象)도 생사(生死)도 초월한다. 영화에는 저택, 방, 문, 화면, 객석, 의자 따위의 무수히 많은 프레임이 등장하는데, 이는 프레임은 고유하지만 동시에 예술 앞에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고 전화를 받는 오프닝은 배우의 선명한 모습과 흐린 실루엣의 배치로 연출된다. 선명한 모습은 존재다. 실루엣은 기억과 상상의 총체로서의 정신이다. 그것이 같은 메시지(전화)로 말미암아 오버랩되며 앙투앙에 대한 애도를 중심으로 연결된다. 감독은 오프닝에서 자신의 영화를 이미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경계의 붕괴는 작가와 배우뿐 아니라 관객에게까지 확장된다.
막이 끝나고 나면 객석에 앉은 배우들이 감상을 이야기하는 데, 꼭 영화관을 찾은 관객처럼 보인다. 배우가 곧 관객이라면 관객은 곧 배우다. 리허설을 보며 기억을 끄집어내는 배우들과, 알랭 레네의 영화를 보는 동안 이를 재구성할 관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 각자의 머릿속에서도 그들의 감식안과 가치관 하에서 에우리디케는 재배치되고 재해석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배우들의 그것만큼이나 고유하고 예술적이다. 관객인 '나' 또한 한 공간에서 연결된 저 모든 배우들과 같다면, 그들의 기억과, 그들의 기록과, 리허설 속 배우와, 지금도 어딘가에서 에우리디케를 연기하고 있을 누군가와 연결된 것이다. 연결인 것일까. 아니다. 거대한 의식체계로서 하나다.
매 순간 두 사람이 연기하는 듯 보이지만 이를 관찰하는 관객까지 셋이서 예술하고 있다. 흔히 영화를 보고 나면 '남의 경험'을 대신 이입한다 생각하지만 틀렸다. 모든 것은 온전한 나의 경험이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는 관객이자 배우이자 감독이며 오르페우스이자 에우리디케다. 환상적이지 않은가. 영화를 보는 것도, 체험하는 것도 아닌 영화라는 예술로서 우주와 일체 된 감각에 대한 실험이다. 그 감각에 몰입해 극을 즐길 수 있다면 충분하다.
# 3.
알랭 레네에게 감독이란 영화라는 예술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각자 고유한 의식체계 속에 갇힌 사람들이 기억과 상상을 펼쳐놓고 연결될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상을 넘나들며 정신적으로 접촉한다. 지금 영화를 보는 시점에서 감독 알랭 레네는 죽어서 없다. 하지만 관객인 나는 온전히 그의 정신과 접촉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죽은 그 역시 온전히 나의 정신과 접촉하고 있다. 예술은 그런 것이다. 나와 함께 하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다.
아흔에 다다른 감독의 영화라 그런지 몰라도, 죽음과 관련된 코드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배우의 숫자가 굳이 13명이라거나, 이승과 저승 중간 어딘가를 보는 것만 같은 저택 디자인 따위 말이다. 작가 앙투앙은 노감독의 페르소나다. 죽은 줄 알았지만 살아있었던 사람이고, 살 것이라 생각하지만 죽어버린 사람이다. 죽은 앙투앙을 연기한 배우는 버젓이 살아있고, 앙투앙이 대신하는 감독은 이미 죽고 없다. 그렇게 평생 모든 관념을 극복해 온 예술가는 죽음과 삶을 초월한 모습으로 끝인사를 건넨다.
왜 하필 '에우리디케'의 이야기여야 했을까.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아내로 남편의 능력으로 저승에서 살아 나올 뻔 하지만, 남편이 뒤를 돌아보아선 안된다는 조건을 어긴 탓에 하데스에게 끌려가버린 인물이다. 죽음의 절대성에 대한 신화이고, '본다'는 것은 그 죽음의 절대성을 의미한다. '보지 못했다'는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순리에 배치된다. 다만 부정하고 저항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어차피 죽음은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은 썩 마뜩잖지만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것에 가깝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당신, 예술로 하나 되어 하데스의 품에서 알랭 레네를 끄집어내어 줄 당신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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