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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맑은 하늘의 자화상 _ 어느 멋진 아침, 미아 한센 로브 감독

그냥_ 2024. 1.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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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불안한 선택의 미로 끝에 뒤돌아 깨닫는 맑은 하늘의 자화상

 

 

 

 

 

 

 

 

미아 한셀 로브 감독,

『어느 멋진 아침 :: One Fine Morning』입니다.

 

 

 

 

 

# 1.

 

파리라는 배경, 불안이라는 코드, 걷는다는 이미지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같은 작품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침 프랑스 영화이기도 하고, 각각 코린 마르샹과 레아 세두의 존재감으로 견인하는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혹은 삶의 무게에 떠밀린 주인공의 분투를 현실적으로 그린다는 면에서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 같은 작품이 연상되기도 하는군요.

 

겉보기에는 주인공 산드라의 고단한 삶을 진중하게 조명하고 독려하는 드라마처럼 보이는데요. 생각하기 따라서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벤슨 증후군에 걸린 산드라의 아버지 게오르그의 메모에 담긴 몇몇의 철학적 화두들, 특히 '프란츠 카프카'라는 이름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겠죠.

 

영화는 길을 걷는 산드라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점점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 다음 계단을 올라 굳게 닫힌 문 앞에 섭니다. 병에 걸린 아빠의 집이죠. 집은 그 자체로 아빠의 인격과 삶을 상징합니다. 딸이 아빠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은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간신히 문이 열리고 처음 건네는 대사는 "안녕, 아빠." 영화는 굳게 닫힌 문을 넘어 진정한 아빠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 2.

 

산드라에게 세계란 그 자체로 구체적이고 객관적이고 물질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인간은 그러한 세계의 안정감 속에서 위안을 얻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멀쩡히 살아있는 아빠보다 아빠가 읽어온 책들이 더 아빠 같다 말합니다. 아빠가 쓴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답하죠. 설령 아빠라는 인격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빠가 쓴 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문자로써 객관화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생각합니다. 산드라는 그림이나 배 모형은 가차 없이 버려도 좋다 말합니다. 그런 류의 의미가 불확실한 것들은 삶과 세계를 혼탁하게만 할 뿐인 것이죠.

 

통역사라는 직업은 세계를 언어라는 논리로 컨버팅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인물의 사상을 표상합니다. 클레망이 갑작스레 약속을 취소하자 통역을 놓치는 장면이 있는데요. 예측하지 못한 불확실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산드라의 사상이 공격받고 있음을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클레망에게 관계 정립을 요구하고 만날 때마다 잠자기를 갈구하는 것은, 애인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 그 자체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폐쇄적인 인식은 얼굴만 간신히 들어가는 화장실의 작은 거울을 통해 은유됩니다.

 

영화 내내 무수히 전환되는 시퀀스 속에서 산드라는 자아가 아닌 세계에 대응하는 '역할'로서 규정됩니다. 딸로서, 엄마로서, 손녀로서, 통역사로서, 내연녀로서 세계에 대한 리액션으로서만 존재하고 있고, 그것에 충실한 것이 존재의 의의라 생각합니다. 클레망의 흔들리는 마음보다 '정부'라는 역할의 불확실성을 불만하는 장면은 인물이 생각하는 세계를 잘 보여줍니다.  

 

 

 

 

 

 

# 3.

 

반면, 산드라의 불안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세계는 모퉁이 너머를 예측할 수 없는 미로와 같고, 그녀의 삶이란 그런 미로를 매일같이 부지런히 헤매는 시간들인 것이죠. 클래망은 변덕스럽고, 아빠의 상황은 위태롭고, 딸은 마음 같지 않고, 요양원은 수차례 옮겨 다닙니다. 좁고 긴 형태의 복도나 골목 등의 공간이 유독 많이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영화의 시간 대부분을 걷는 데 할애하는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소 어지럽기까지 한 반복적인 시퀀스 전환 역시 그녀의 삶을 같은 곳을 맴도는 미로처럼 느껴지게 하죠.

 

비단 산드라의 현실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클레망의 직업은 우주 화학자입니다. 우주에서 지구로 떨어진 소행성의 성분을 분석하는 직업이죠. 우주의 아주 작은 편린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불확실성을 분석하는 직업이라는 면에서 산드라의 통역사와 대칭되는 직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클레망과 린이 명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태양계 행성을 나열하다 마지막에 행성에서 탈락한 명왕성에 대해 말하는 데요. 명왕성이라는 존재는 변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본질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죠.

 

딸과 함께 본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영화를 딸은 재미있어하지만 엄마는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해하는데요. 같은 영화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영화를 어떻게 인지하느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장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딸이 다리를 아파하자 병원에 데려가는데 다친 것이 아니라 성장통이었죠. 엄마가 꾀병을 의심하자 의사는 딸이 진짜 아픔을 느꼈을 것이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원인과 별개로, 딸이 진짜 통증을 느꼈다는 것이죠.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도 마찬가지. 어른들이 산타가 있는 양 시늉하는 동안 아이들은 해맑게 산타를 상상합니다. 그 순간의 산타클로스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면에서 충분히 본질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 4.

 

산드라는 아빠의 벤슨 증후군을 객관적인 증상으로서만 정의합니다. 이를 매우 두려워하며 자신에게 같은 증상이 보인다면 안락사시켜 달라는 무서운 부탁까지 하죠. 객관적인 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고통받던 산드라는 '희귀병 속으로 걸어가다'로 시작하는 아빠의 메모를 발견합니다. 메모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벤슨 증후군이라는 증상에 대한 지극히 철학자다운 아빠의 저항입니다. 그것을 비장하고 위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아빠의 정신과, 죽은 책장 따위가 아닌 메모에 쓰인 글귀야 말로 아빠의 본질임을 확인하며 늦은 밤 성장에 도달합니다.

 

잠시 논외로 아빠의 화장실을 받기 위해 간호사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관성적으로 산드라는 간호사에게 '역할'을 주문하는 데요. 간호사는 당신이 역할에 집착하느라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실존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결말의 성장을 앞둔 일종의 복선이라 할 수 있겠군요.

 

 

 

 

 

 

# 5.

 

그리고 앤딩입니다. 혼자가 아닌 셋이 된 산드라는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길을 걷고 계단을 올라 파리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광장에 올라섭니다. 조밀한 도시의 건물들은 조밀하게 들어선 책장 속 책들과 연결됩니다. 애인 클레망과 딸 린은 에펠탑과 몽파르나스 타워, 생 뱅상 드 폴 성당이라는 랜드마크를 큰 이정표로 짚은 후, 집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방향으로 대신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의 누적이 아닌,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몇몇의 기준점을 이정표 삼아 선택의 방향을 탐색하고 나아가는 자아에 있음이 간결한 대화에 실려 은유됩니다.

 

대화가 끝난 후 하늘 위로 '어느 멋진 아침'이라는 제목이 새겨지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후의 영상을 길게 뽑는 것이 아니라 정지시킨 것은 일련의 이야기에 완결성 내지 완전성을 부여합니다. <어느 멋진 아침>은 미처 쓰이지 못한 아빠의 자서전 제목이라는 면에서 아버지의 인생과도 같습니다. 오프닝에서의 미장센을 이어받는 수미상관의 구조라는 것이죠. 굳게 닫혀 있고 들어가 봤자 비좁다 생각했던 아빠의 삶에 비로소 온전히 들어간 딸이 마주하게 된, 맑은 하늘 아래 파리만큼이나 거대한 아빠입니다.

 

동시에, 타인으로서의 아빠가 살아온 방식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과 세계가 존재하는 원리를 경험한 끝에 깨달은 것이라는 면에서 파리의 풍경은 그 자체로 산드라 본인의 삶이기도 합니다. 영화 내내 파리 시내를 배회하던 산드라가 자신이 걸어 다닌 길을 뒤돌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엔딩에서 마주하게 된 파리의 전경은 산드라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와 같은 주제의식은 아빠 게오르그와 딸 산드라뿐 아니라, 그 순간에도 파리를 살고 있을 모든 사람들과, 영화를 즐기고 있는 관객 모두의 삶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미아 한셀 로브 감독, <어느 멋진 아침>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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