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처절한 횃불은 스스로 피고 진다
저스틴 커젤 감독,
『맥베스 :: Macbeth』입니다.
# 1.
우리는 맥베스를 욕망의 화신이라 이해하고 있고, 그 욕망엔 별다른 불순한 것의 개입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욕망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선 지령과 달라 보이지 않는 마녀의 예언에서부터, 광기 어린 맥베스 부인의 몰아치는 추궁과 독려, 모두의 선망 위에 군림하는 던컨 왕을 향한 시기, 혈통만으로 왕위가 예정되어 버린 부조리한 말콤 왕자의 존재와, 이미 얻은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표독스러운 집착까지. 이 모두는 맥베스가 욕망하는 분명한 이유임과 동시에 어느 것도 명징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탐욕에 눈멀어 타락하다 파멸한 영웅의 비극은 그 기원에 대한 오래된 탐구다. 1623년에 발행된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이후 수많은 창작자에 의해 재해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모두는 확신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화두에 대해 각자의 답을 찾아 헤맨다.
가장 최근의 맥베스는 조엘 코엔의 작품이다. 덴젤 워싱턴과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열연한 <맥베스의 비극>(2022)은 예리하게 정제된 미니멀리즘적 표현으로 구현된 지극히 정신적인 맥베스다. 코엔 감독에게 야망이란 오롯이 맥베스에 의한 것으로, 두터운 어둠으로 그려낸 야망은 마녀와 부인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스로 발현한 것이라 해석된다. 눈부신 빛과 같았던 인간이 스스로 계단을 내려와 육중한 그림자에 잠식되어 나가는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목이 달아나지 않는 한 스스로 만든 욕망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반면, 저스틴 커젤은 조엘 코엔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는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마리옹 꼬띠아르의 <맥베스>에서 야망은 지극히 환경적인 것이다. 비가역적인 원리와 불가항력적인 운명 앞에 사소한 인간의 욕망은 연약한 반동에 불과하다. 조엘 코엔에게 세계는 인간 정신에 의해 밀려나고 지워졌던 것에 반해, 저스틴 커젤은 참혹한 찬탈이 벌어진 11세기 스코틀랜드를 압도적인 익스트림 와이드샷으로 공들여 담아내고 있는 이유다.
# 2.
감독은 욕망을 결핍되고 상처받은 자의 뒤틀린 발버둥으로 해석한 후 그 상실의 예시로서 가족을 제안한다. 어린 아들의 주검에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시작해, 전투 중에 죽은 소년병과의 연결, 거사를 앞둔 밤 단검을 들고 나타난 소년의 모습까지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누적하는 이유다. 적대자들의 해석 역시 마찬가지다. 던컨 왕의 아들인 말콤 왕자, 벵코우의 아들 플리언스, 파이프의 영주 맥더프의 자제들 모두 맥베스 내외의 상실을 적극적으로 자극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아들은 죽었다. 단호한 운명은 스코틀랜드의 대자연처럼 거대하고 무자비하며, 운명의 선택 앞에 인간은 한없이 무력하다. 내러티브를 지배하는 예언이란 운명을 거슬러 발버둥 치는 인간을 초라하게 만드는 결정론적인 운명을 의미한다. 특히 잔인한 것은 예언의 형식이다. 저 멀리 버남의 숲이 궁전 앞에 오기 전까지는. 여인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기대한 인간의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루어져 버리는 가혹한 운명이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것으로 결정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들의 죽음이 부모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결정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인간은 운명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운명에 도전하는 욕망이란 거대한 설원을 녹여보겠노라 모닥불을 피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불의 온기와 광기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작품의 가장 적극적인 각색이라면 버남 숲과 관련된 마녀의 예언이다. 원작에서는 말콤의 군대가 나뭇가지를 위장으로 사용한 모습이었으나, 본작은 불붙은 버남 숲의 불길이 던시네인을 넘어드는 모습으로 각색하고 있고, 이는 감독의 의지가 가장 진하게 투사된 순간임을 의미한다. 첫 예언을 듣고 부인과 대화하던 날부터 거사의 횃불과 맥더프 가족의 화형을 거쳐 착실히 누적된 불의 미장센은 세상을 녹이는 대신 자신을 향한다.
# 3.
제 아무리 개성적인 감독이라 하더라도 400년 전 희곡의 질감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맥베스를 해석했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그럼에도 공통된 것은 고전을 향한 순수한 연정이다. 연극의 형식미를 엄격히 추구하는 화면, 토씨하나 빠짐없이 이어받는 고전의 화법 말이다. 특히 예언에 빗댄 '말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한 작품에서 그 표현을 익숙지 않은 고전의 문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작품의 내러티브를 스스로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녀의 예언에 포획되어 그것을 처절하게 이행하는 맥베스의 이야기처럼, 관객은 셰익스피어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수사에 포획되어 희곡을 마치 예언처럼 실존하듯 느낀다.
영상은 억겁의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처럼 대단히 정적이다. 상황은 움직임보다는 배치와 구도와 질감으로서만 전시된다. 감동은 등장인물 각각의 드라마틱한 목소리면 충분하다는 듯 말이다. 하나의 이야기 위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면서도 그런 고전의 매력에 한없이 충실하다는 면에서 뭇감독들의 태도에는 도전과 사랑이 겹쳐 있다. 감독들의 눈에 비친 셰익스피어가 마치 맥베스의 눈에 비친 던컨 왕의 모습 같아 보인달까.
# 4.
맥베스는 언제나 연기자가 가진 모든 역량을 가감 없이 폭로한다. 이전과 이후의 모든 맥베스들과 맥베스 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덴젤 워싱턴의 맥베스가 상대적으로 철학적이고 사색하는 맥베스였던 것에 반해, 마이클 패스벤더는 다분히 처절하고 감정적인, 그러면서도 비장한 맥베스를 연기한다. 감정의 낙차를 표현함에 있어 진솔한 대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연극의 형식 탓에 내러티브의 진행이 더딤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패스벤더는 자신이 곧 영화이기라도 하다는 듯 맥베스를 표현한다. 점점 초췌해지고 메말라가는 인물의 지친 내면과, 불안과 광기에 중독된 외면이 대비되는 이율배반적인 인물의 연기는 고전의 미학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을 관객들도 인정할 작품의 크나큰 재미다.
마리옹 꼬띠아르의 연기 또한 절륜하다. 맥베스를 추동하는 환경 내지 조건에 불과했던 여타의 맥베스 부인에 비해, 같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본작의 맥베스 부인은 더 넓은 영역을 부여받고 있고 넓어진 놀이터 위에서 배우는 자신의 역량을 가감 없이 뽐낸다. 전반부 남편을 독려하며 마음의 횃불을 전달하는 장면과, 미쳐가는 맥베스에게서 불안을 느끼는 장면, 맥더프의 가족들이 끔찍한 화형을 당하는 모습에서의 좌절과, 마지막 완전히 불씨가 꺼진 창백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많지 않은 분량에도 각각의 장면들이 눈앞에 선명한 것은 오롯이 배우의 힘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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