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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숨을 참는다 _ 맘말, 레베카 달리 감독

그냥_ 2025. 1.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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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깊은 물속에서 숨을 참는다

 

 

 

 

 

 

 

 

레베카 달리 감독,

『맘말 :: Mammal』입니다.

 

 

 

 

 

# 1.

 

감독은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이혼녀와 가출 청소년의 이야기를 포유류(哺乳類)라 명명한다. 두 주인공의 이면에 담긴 종 단위 본성을 싸늘한 시선으로 관조하기 위함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물 일반이 아닌 굳이 좁은 범위의 포유류로 특정한다는 것이다. 포유류는 젖먹이 동물로, 수컷과 암컷이 새끼를 낳으면 암컷이 유선에서 분비된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방식을 특징한다. 즉, 영화는 젖을 먹이고 싶은 암컷의 본성과, 번식하고자 하는 수컷의 본성에 대한 것이다.

 

인상적인 오프닝처럼 '물'은 작품을 장악하고 있는 핵심적인 메타포다. 당연하게도 물은 영화의 착점으로서 포유류의 본성을 의미한다. 수영장을 가로지르는 마가렛의 오프닝에서 갑자기 눈앞에 뛰어드는 아이의 존재감과, 통상 양수와 탄생을 은유하기 마련인 물의 함의, 터져 나오는 가쁜 숨, 직후 충분히 늘어진 젖가슴과 제왕절개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은 감독이 물을 어떤 뉘앙스로 활용할 것인가를 친절하게 소개한다.

 

물은 자애롭고 평화로운 것이지만 숨 막히는 압박감이기도 하다. 서글픔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어두운 밤 정체 모를 불청객 앞에 오줌을 지리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 본성에 매몰됨은 숨 막히는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찰나와 같은 쾌감이 숨어있다는 면에서 저주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즐긴다기보다는 포유류의 본성을 은유하는 육중한 물의 존재감을 느끼는 과정이다. 두 주인공과 함께 몸 담그고 숨을 참아보는 것이다.

 

 

 

 

 

 

# 2.

 

물은 다시 그 형식에 따라 세분화된다. 통제를 의미하는 수영장과, 포기를 의미하는 바다와, 수용을 의미하는 비다. 기하학적이고 규격적이고 형식적인 수영장은 물을 가둬놓고 통제하는 마가렛의 공간이다. 중년의 마가렛은 능숙하게 포유류의 욕망을 통제하고 있고 이는 유려한 수영실력으로 표현된다. 그녀의 주변엔 젖먹이 동물의 어미가 가지는 모성 본능에 대한 대리만족이 곳곳에 투사되어 있다. 아들 또래 남자를 꿰어 하숙을 놓는다거나, 길고양이 새끼들을 살핀다거나, 조에게 아들 옷을 입히고 욕조에 앉은 그를 씻긴다거나 하는 식이다. 친아들과 교류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모성을 대리하는 방식으로 거짓된 평온을 누리던 마가렛은 아들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허구가 폭로되며 한번, 조는 절대 자신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다시 한번 붕괴된다.

 

끝을 알 수 없는 거칠게 굽이치는 바다는 속옷마저 벗어던진 채 냅다 뛰어드는 조의 공간이다. 본성에 몸을 던져버린 그는 통제를 포기한 존재로, 수영장에선 수영하지 못하는 이유다. 따라서 내내 조는 야생적이고 돌출적인 행동을 보인다. 훔치고 폭행하고 마약하고 욕정 한다. 욕조에서 섹스한 조는 번식할 수 없는 마가렛에게 좌절하지만, 애타게 젖을 먹이고 싶어 하는 존재와, 자신 역시 젖을 먹고 싶은 미숙한 존재였음을 희미하게 자각하며 어미의 품으로 돌아간다. 공통적으로 보이는 샤워는 포유류로서의 본성이 발산되는 순간의 상쾌함이라 생각하면 무난하다. 역으로 욕조에서 움츠러든 모습은 본성 앞에 무기력한 순간 느끼는 개체의 고독감이라 생각하면 무난하다.

 

 

 

 

 

 

# 3.

 

목마른 두 사람에게 서로는 포유류의 본성을 해갈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험된다. 마가렛은 조를 통해 아들을 충동하고 조는 마가렛을 이성으로 탐한다. 마가렛은 조의 바다에 몸을 던지고, 조는 마가렛의 수영장에서 수영장을 배우는 것은 그런 의미이지만, 조의 바다에서 마가렛은 익사할 것 같은 위험을 느끼고 조는 마가렛의 수영장에서 손가락을 치켜든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음이다. 순간은 달리는 자동차의 창을 여는 것처럼, 드넓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자유롭고 상쾌하다. 그럼에도 스스로 목을 조르듯 자학적인 것이자 늦은 밤 매질하는 것처럼 폭력적인 것이며, 마리화나에 취하는 것처럼 중독적인 것이다.

 

결국 영화는 좌절하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젖먹이 어미는 남의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없다. 미성숙한 개체는 번식할 수 없다. 본성은 편리하게 통제한다고 해서 편리하게 몸 던진다고 해서 충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목 조르고 싶은 절망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순리에 따르는 것뿐이라는 서늘한 체념이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다소 앙상하다는 것, 적잖이 도식적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우나 주인공과 같은 눈높이에서 깊은 물속에 침잠된 느낌을 누리는 것은 매력이다. 박찬욱의 영화가 본성을 이성으로 통제하려다 실패하는 영화라 한다면, 레베카 달리의 영화는 본성의 결핍을 대안으로 해결하려다 좌절하는 영화라 할 수 있고, 적어도 우리 모두 본성 앞에 무력하다는 것만큼은 동일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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