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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두려운 자의 품격 _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맷 브라운 감독

그냥_ 2024. 9.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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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고통이 두려워 신을 부정하는 자와 고통이 두려워 신을 갈망하는 자 사이에서의 품격

 

 

 

 

 

 

 

 

맷 브라운 감독,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 Freud's Last Session』입니다.

 

 

 

 

 

# 1.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미국의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Mark St. Germain)이 아몬드 M. 니콜리 주니어(Armand M. Nicholi Jr.)의 저서 <The Question of GOD>에서 영감을 얻어 쓴 희곡이다.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영국이 전면전을 선포하며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겸 기독교 호교론자 C. S. 루이스(C. S. Lewis)가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파크컴퍼니가 라이선스 계약으로 가져와 2020년부터 꾸준히 공연 중이다. 아흔을 앞둔 대배우 신구 이하 출연진의 열정과 호연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인기 연극이니만큼 기회가 닿는다면 관람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화는 동명 연극의 영화화지만, 닫힌 서재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2인극이었던 연극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재해석된다. 두 주인공의 철학과 내면을 형성하는 과정으로서의 과거 회상과, 안나 프로이트와 도로시 빌링엄의 이야기도 적잖이 다룬다는 면에서 전기영화적인 면도 섞여있다. 프로이트는 앤서니 홉킨스가, 루이스는 매튜 구드가 연기한다. <섀도우 랜드>(1993)에서 루이스를 연기한 바 있는 앤서니 홉킨스가 30여 년의 시간이 흘러 루이스와 논쟁하는 프로이트를 연기하게 되었다는 것은, 영화의 핵심과 닿아 있는 노화와 죽음이 연상된다는 면에서 소소한 흥미로움이 있다.

 

 

 

 

 

 

# 2.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대담으로 작품을 소개받은 관객은 신의 존재와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 논쟁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원작의 소설이나 연극의 경우 그 부분에 타협 없이 집중하고 있으나,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크게 연성화된다는 것은 아쉽다.

 

두 주인공의 대담을 희생해 유년기와 전쟁씬 등 회상장면에 투자한다. 빗속을 달리는 안나 프로이트도 일정 부분을 할당받는다. 파편적인 에피소드의 재현에 낭비하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존 버니언을 시작으로 아인슈타인, J. R. R. 톨킨, 에드거 앨런 포 등의 반가운 이름들이라거나, 모든 것을 섹스와 연결 지으려 한다는 식의 당대 평판과 관련된 부분, 시가와 구강기적 집착을 연결 지어 짓궂게 질문받았던 에피소드, 안나가 극복해야 했던 당대 여성에 대한 멸시 따위인데, 모두 말초적 흥미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시나리오의 본질에서 벗어나 작품을 산만하게 한다.  

 

억지로 몸집을 키우기 위한 사족들을 추려내고 나면 대담에서 의미 있는 논리 전개는 찾아보기 힘들다. 프로이트가 신의 전지전능함을 공격하는 대목이나, 루이스가 프로이트의 말실수를 꼬집는 장면 따위는 솔직히 유아적이다. 철학적 화두를 견인할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그것이 의지 탓인지 능력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에서 두 사람의 대담을 모티브로 내적 성찰의 계기로 선회한 듯하나, 이 역시 안이하기에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도, 루이스에 대한 이해도 얄팍하다. 캐릭터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기에 안소티 홉킨스의 연기 역시 '자기 확신이 강한 지적이지만 독선적인 노인' 이상의 표현은 하기 힘들어 보인다. 물론 그 제한적인 캐릭터조차 끌고 나가는 배우의 힘은 대단하지만 말이다.

 

대담의 균형은 프로이트에게 일방적으로 쏠려 있는 데다 반복되는 프로이트의 병증은 논박의 여지를 틀어막는 식으로 작동하기에 더욱 일방적이다. 종교의 위기가 가속화되는 시대적 맥락과 맞물려 영화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프로이트의 뒷좌석에 앉아 응원봉을 흔드는 꼴이 될 수 있는 데, 이는 관객의 잘못이 아닌 작품의 실패라 하는 것이 정당하다.

 

 

 

 

 

 

# 3.

 

빈곤한 대담 아래 숨겨진 통찰이란 결국 '인간이란 고통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고통이 두려워 신을 부정하는 존재로 그에게 무신론은 내내 찾아 헤매는 모르핀이다. 루이스는 고통이 두려워 신을 갈구하는 존재로 그에게 유신론은 타인에게 선물 받은 깡통 속 유토피아다. 여기서의 고통이란 죽음에 대한 공포로서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고, 나의 죽음과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통할한다. 어두운 밤 빗속을 내달리는 안나가 두려워하는 것 역시 (아버지의) 죽음이다. 영화가 전쟁 발발 직후 이틀 사이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절망 위에 펼쳐진 이유이고, 프로이트가 끊임없이 라디오를 체크하는 이유다. 작품을 통째로 축약하는 라디오에서는 죽음의 보도와 고풍스러운 음악이 교차해 흘러나온다. 작품의 완급에 기여하는 클래식 음악은 그 자체로 대담의 은유다.

 

감독이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철학적 논증이 아닌 태도로서의 품격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평가하듯 어리석고 오만하고 오류 투성이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대담의 과정에서 품격을 잃지 않듯, 감독의 주안점 역시 자신의 세계를 도전하고 공격하는 상대에 대한 인간적 존중과 품격에 있다. 인간은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칠흑같이 어두워 두려운 죽음을 향해 시간의 선로를 나아갈 것이고,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신을 부정하기도, 갈망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존중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선량하고 다정하지만, 시시하고 당연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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