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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Mystery & Thriller

브레히트와 세 번의 기적 _ 더 원더,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

그냥_ 2025. 4.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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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

『더 원더 :: The Wonder』입니다.

 

 

 

 

 

# 1.

 

기나긴 역사 속에서 운명은 수차례 인간을 짓밟았고, 19세기 초 아일랜드에 들이닥친 대기근은 유독 가혹한 것으로 기록된다. 터무니없는 결핍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은 합리적인 대응 따위로는 벗어날 수 없고, 한계에 다다른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모든 위기를 단숨에 해결해 줄 기적에 종착한다. 따라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적은 보통 아름다운 것으로,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그것은 그르지 않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로 인해 진보된 숱한 역사가 증명함이다. 다만 기적의 대상이 가뭄을 멎게 해 줄 단비나, 푸른 하늘 겹쳐진 무지개, 우연히 찾은 네잎클로버가 아닌 인간이 되는 순간 비극은 걷잡을 수 없다. 그러해야 한다 믿는 자들의 맹신에 포획되어 버린 이의 앞날은 가혹한 운명보다 더 가혹하다.

 

아일랜드의 소녀 애나는 거창한 제목처럼 '기적의 소녀'라 불리지만 그녀의 능력은 마음을 꿰뚫고 비를 내리고 하늘을 나는 여타의 기적들에 비해 지나치게 하찮다. 4개월 동안 아무 음식을 먹지 않았음에도 비교적 건강하다 보니 혹시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 전부다. 대신 소녀의 기적은 대기근에 직면한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지극히 합목적적이다. 그녀의 기적은 그 자체로 지금 먹지 못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희망에 충실히 보상한다. 먹이지 못해 굶주린 자식을 보는 부모들에게 위로가 되고, 끔찍한 기근을 내린 신의 뜻을 헤아릴 길 없던 성직자도 버티게 한다. 다른 아이들을 건사해야 할 애나의 부모에게도 기적을 목도하려 찾아오는 이들의 기부금은 절실하다. 심지어 애나 본인에게도 기적은 필요한 것이다. 고작 아홉의 나이에 친오빠에게 성폭행당한 소녀의 충격은 사랑으로 둔갑되고, 죄 없는 소녀가 죄지은 오빠를 지옥에서 건지기 위해 대속한다는 뒤틀린 사랑이란, 내면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기적적인 발악이다.

 

 

 

 

 

 

# 2.

 

영국인 간호사 리브와, 함께 고용된 수녀의 임무는 2주간 애나의 기적을 관찰하는 것이다. 멀리 아일랜드의 상황을 마주한 이방인은 인디언 기우제와 다를 바 없는 모순된 구조의 잔인함에 금세 위화감을 느낀다. 애초에 기적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도, 기적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소녀의 안녕도 안중에 없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소녀가 죽기 전까지는 기적이 없음을 확정할 수 없으니 먹일 수 없고, 기적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소녀는 이미 죽었을 것임으로 먹일 수 없다. 따라서 기적의 가부와 무관하게 소녀는 이미 먹을 수 없고, 기적이 보호하지 않는 한 이미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존재가 기적에 종속되었다는 뜻이자, 한 인간의 생명이 타인의 필요에 귀속되어 완전히 도구화되었다는 뜻이다.

 

내내 분투하던 리브는 애나를 설득하기 위해 '기적의 소녀 애나'를 대신하는 '리브의 양녀 낸'이라는 자아를 제안한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위태로운 소녀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리브는 애나를 구원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럼에도 기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진 못한다. 오히려 거짓말처럼 애나의 유해가 사라져 버렸기에 역설적이게도 기적을 완성시킨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기적은 행하는 사람이 아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것이고, 그것은 애나도 리브도 어찌할 수 없음이다. 기적을 완성시킴으로써 간신히 낸이 된 소녀만을 데려 나온 영화는 특유의 유화적인 색감과 미술적인 구도, 강하게 짓누르는 화면비와, 과장된 명암처럼 나약한 인간의 무력감을 구슬프게 그린다.

 

 

 

 

 

 

# 3.

 

분명 영화 안에서 바라보는 기적은 애나다. 반면 영화 밖에서는 어떨까. 현대의 관객은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고 금식이 소녀를 죽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에 애나는 기적적이지 않다. 오히려 19세기 아일랜드라는 시공간과 스크린이라는 차원의 벽을 넘어 무력하게 죽어가던 애나를 구원한 리브야 말로 관객의 요구에 충실한 기적적인 존재다.

 

돌이켜보면 리브는 숭고한 목적으로 합리화하고 있을 뿐 유독 맹목적이다. 의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권한 넘어 애나의 영역을 복합적으로 반복적으로 침범한다. 대뜸 머리를 들이밀거나 손을 잡아채는 것은 물론 집을 멋대로 뒤지고 가족과의 만남을 차단한다. 둘러업고 다니길 망설이지 않고 소중한 물건을 부수며 심지어 호스를 식도에 집어넣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마지막 씬에서 애나가 자신을 낸이라 소개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망설이는 애나를 리브가 압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관객 또한 애나가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을 낸이라 말하길 종용한다는 점이다.

 

관객은 영화 내내 벌어지는 리브의 맹목성과 폭력성을 묵과한다. 기적을 바라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기적을 위해서라면 애나의 위험을 외면하던 위원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따라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애나'를 요구받는 것과 리브에 의해 '낸'을 요구받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사람들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기적을 꿈꾸고, 영화 밖의 사람들은 불쌍한 애나를 구원한 리브가 있었으면 하는 기적을 꿈꿀 뿐이다. 혹여 영화를 통해 애나를 구한 리브의 성과에 윤리적 고양감을 느꼈다면, 그 순간의 당신은 애나를 굶기며 기적을 바라던 아일랜드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4.

 

애나의 이야기 이면에 리브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배치한 것은 둘 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증거다. 이를테면 금식의 기적을 확신하는 애나에게 오빠와 관련된 불행한 과거가 있듯, 구원의 기적을 확신하는 리브에게도 가족과 관련된 불행한 과거가 있다. 정체 모를 약을 삼키고 아기의 신발을 쓰다듬고 스스로 피를 뽑아 삼키는 등의 이상행동은 카드를 뽑으며 스스로 세뇌하던 애나의 왜곡된 정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리브는 지나가듯 과부가 가장 나쁜 죄라 자조하는 데 애나가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 또한 과부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기적을 실천하는 것과, 기적을 해체하는 방식의 기적을 실천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뿐 둘은 사실상 같은 위계의 인격인 셈이다. 따라서 관객이 영화를 통해 본 것은 애나와 리브가 아닌 기적이란 개념을 둘로 분리해 관찰한 것과 같다. 리브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순간은 기적을 1인칭으로, 리브의 시점쇼트로 애나를 보는 동안에는 2인칭으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장면을 관조하는 동안에는 3인칭으로 경험한 것이고, 기적의 얼굴을 나와 너와 그로서 들여다보는 것이야 말로 영화 더 원더의 무대를 관람한 의의다.

 

리브는 기적을 완성한 후 그 증거로서의 애나를 낸이라는 이름으로 데려가 버린다. 마찬가지로 감독은 리브라는 기적을 완성시킨 후 니암 알가를 직시하게 해 플로랜스 퓨라는 이름으로 데려가 버린다. 유해를 남기지 않은 기적의 소녀를 빈 손에 쥔 아일랜드의 사람들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존재하지 않는 리브의 기적을 아스라이 빈 손에 쥐게 하는 결말이다.

 

 

 

 

 

 

# 5.

 

폴은 애나에게 소마트로프를 선물한다. 각각은 고정된 프레임으로만 존재하고 그것이 빠르게 운동하는 착시를 움직임으로 인지한다는 면에서 시네마를 간소화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무대를 노출시키는 이질적인 오프닝과 앤딩, 안과 밖이라는 최면적 암시로 연결되며 확장된다. 기자라는 직업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작가의 은유다. 애나와 리브 사이에서의 기자는 곧 리브와 관객 사이에서의 감독과 구조적으로 동치 된다는 면에서 감독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창작이지만, 적어도 몰입해 관람하는 동안에는 사실과 구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영화를 실제하는 것이라 믿는 것은 그 믿음에 각자의 필요를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작품에 압력으로 작동하는 모습은 기적의 기작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기적을 거절하려는 영화의 감독은, 영화에 기대면서 압박하는 관객을 반복적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다. 니암 알가의 내레이션을 공들여 연출한 이유다. 보통의 내레이션은 논평하거나 부연하나, <더 원더>에서의 그것은 그러하지 않는다. 그저 반복할 뿐이다. 보고 있는 것을 반복해 읊조림으로써 보는 것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보이는 것을 반복적으로 의심하고 멀어지게 한다. 시퀀스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관성을 배척하는 것이다. 영화가 차용한 소격효과의 정체다.

 

관객은 애나를 연민하는 리브에서 시작해, 리브를 압박하는 관객으로 옮겨간 후, 마침내 리브를 압박하고 있던 관객이었음을 자각하는 관객으로 다시 한번 밀려난다. 위원회가 애나에게 바라는 것을 첫 번째 기적이라 한다면, 관객이 리브의 존재를 바라는 것은 두 번째 기적이라 할 수 있고, 그런 관객이 타인으로 하여금 기적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우치는 것이야 말로 세 번째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극과 감정적으로 떨어져 스스로를 이성으로 객관화하는 것.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제안이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Netflix, Tving, WatchaPlay, CoupangPlay, Appletv,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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