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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한 그루의 사과나무 _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감독

그냥_ 2021. 11.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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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기억되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

보이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데이빗 로워리' 감독,

『고스트 스토리 :: A Ghost Story』입니다.

 

 

 

 

 

# 1.

 

<그린 나이트>를 보려고 했는데요. 감독 이름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누구더라... 아! 고스트 스토리의 감독이었군요. 생각난 김에 고스트 스토리를 애피타이저로 한 번 더 보고, 그린 나이트를 봐야겠습니다.

 

철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쫀쫀한 이야기는커녕 시간이 멈춘 듯 느린 템포와, 바스러지는 현학적 대사들과, 연출적 물리적 관계적 개념적 층위의 공백들과 여백들이 감상을 어렵게 합니다. 혹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셨고 말씀드린 류의 건조하고 느린 호흡의 메시지 중심 작품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다른 작품을 보는 것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한번 지루하다 느끼기 시작하면 답도 없을 정도로 지루하다가 맥없이 끝나는 영화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죠.

 

 

 

 

 

 

# 2.

 

작품을 천천히 짚어봅시다. 달달한 예술가 연인이 함께 사는 데 교통사고가 나 남자가 죽습니다. 겁나 큰 천 쪼가리 두르고 검은 점 두 개 찍은 다음 유령이라 우깁니다. 혼자된 여자 친구는 슬퍼하며 파이 퍼 먹고 현타 온 표정으로 음악 듣더니 종이쪽지 하나 벽에 묻어 두곤 이사 갑니다. 남겨진 고스트는 손가락으로 벽 팝니다. 승질났는지 만만한 멕시코 가족한테는 크게 깽판 치고, 사람 많은 파티장에서는 작게 깽판 치지만, 재개발된 회사 사장님 앞에선 잠자코 있습니다.

 

MIB 윌 스미스 빙의한 것마냥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려 백 투 더 퓨쳐를 시전 합니다. 처음 보는 어느 가족이 나타나 빈 터에 자리를 잡고 살다 죽어 백골이 진토 됩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과거의 자신과 연인을 만납니다. S... T... A... Y... 오프닝의 어그로는 자작이었습니다. 예정된 교통사고가 다시 벌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며 타이밍을 재다가 잽싸게 벽 파서 쪽지 꺼내보고 승천합니다.

 

... 거 보세요. 쎄하실 거라 말씀드렸죠?

 

 

 

 

 

 

# 3.

 

프레임입니다. 공간입니다. 앞모습과 뒷모습입니다. 집이구요. 창입니다. 틀이고, 죽음이며, 유령이죠. 날씨입니다. 예속이구요, 해방입니다. 소리입니다. 음악입니다. 의미이고, 고립이며, 관계이고 동시에 단절입니다. 지구입니다. 우주입니다. 서사는 메시지에 힘입어 과감하게 확장되지만, 영화는 서사가 아닙니다. 그저 장면의 나열에 불과하죠.

 

이야기라기보다는 개념을 담은 장면들의 배열에 가깝습니다. 각 시퀀스는 서사적 인과보다는 철학적 사유를 돕는데 주력합니다. 관념적 해석을 유도하는 메타포가 즐비합니다. 홀로 남겨진 유령에 대한 구제척인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남겨진다는 것의 의미, 유한한 존재들의 의의 따위를 탐구하는 작품 쪽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했죠.

 

영화는 세상을 ⑴ 누군가로부터 인식되고 기억되기 전의 중립적인 물질,  인식하고 기억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인식되고 기억될만한 가치를 얻은 예술이라는 세 갈래로 분류합니다. 유령은 그중 세 번째 개념을 의인화한 것이라 할 수 있죠. 제목에 담긴 유령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마모되어 인식되고 기억되기 전의 중립적인 물질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의 집착과 허무함입니다. (여기서의 예술이라 함은 음악이나 미술 따위의 전문적 분야를 일컫는 협의의 예술이 아닙니다. 인간이 의도를 담아 정보를 생산하는 모든 인위적 행위라는 뜻을 담은 광의에서의 예술이죠.)

 

 

 

 

 

 

# 4.

 

'터'는 중립적입니다. 누군가 나타나 개척하고 삶을 전개하는 순간 터는 의미를 가진 '집'으로 승화됩니다. 어린 소녀가 종이에 무언가를 써 돌 아래에 숨겨놓습니다. 가족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자 공간은 다시 터로 회귀합니다. 소녀가 남긴 종이에 적힌 무언가 역시 의미가 휘발되어 무의미한 물질로 돌아갑니다.

 

C가 유령이 되어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주 오래전 개척자 가족의 이주와 생과 기록과 죽음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유령으로 남은 C와 달리 가족의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 건, 이들을 증명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리' 또한 그 자체론 중립적입니다. 베토벤이라는 인간이 나타나 소리를 적절히 배열해 '교향곡 제9번'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음악'이라는 예술로 승화됩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위대한 음악이라 하더라도 영원할 순 없습니다. 들어주고 기억하고 영감 받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손가락으로 땅을 파는 짓과 별반 다를 바 없죠. 그리고 그 순간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겁니다.

 

주인공 C와 M의 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연인이 사는 방식이 공간의 성격과 의의를 결정하지만, 다음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 앞에 허무하게 지워집니다. 피아노의 쓰임은 특히 상징적이죠. 유령은 그릇을 집어던지며 부정해보지만 도도히 흘러가는 '과학적' 순리 앞에 무기력합니다. 가족의 공간은 파티장으로, 회의실로, 고층 빌딩으로 변해가고 그럴수록 연인의 소중한 집은 지워지고 잊힙니다.

 

 

 

 

 

 

# 5.

 

화면을 독특한 프레임에 가둬둔 이유를 이 영화 자체가 '데이빗 로워리'라는 인간이 물질들을 적절히 배열해 둔 예술이라는 것과, 그것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이 '기억'하는 만큼을 유한한 수명으로 가지게 될 예술이라는 것을 자백한 것이라 이해합니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 역시 언젠가 기억해줄 사람이 남지 않을 테고 그 순간이 오면 고스트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지겠죠. 배경 음악에 인색한 편인 작품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ost, Dark Rooms의 <I Get Overwhelmed>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M과 관객이 이 노래를 기억하는 동안만큼만 C와 노래는 존재할 겁니다.

 

드넓은 우주 속 수많은 별들 가운데 지구가 의미를 가지는 건 이를 인식할 주체로서 인류가 아직은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언젠가 태양이 팽창해 지구를 집어삼키고 나면 사라져 버리고 말 테지만요. 고스트의 스토리는 예술의 스토리이자, 인간 역사에 대한 스토리이며, 지구와 그 너머 우주의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괜히 오프닝에서 뜬금 우주를 보여준 게 아닌 것이죠.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조차 잊어버리게 될까 두려웠던 유령은 역사가 만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죽지도 못합니다. 과거로 돌아갈 뿐입니다. 찰나와 같이 지나는 연인의 History에서 유령은 쪽지를 읽고 비로소 승화됩니다. 이 승화의 의미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 6.

 

옆집 유령과의 대화에서 누굴 기다리고 있냐는 물음에 기억이 안 난다 대답하는 장면은 장르적인 측면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 중 하나 임엔 분명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는 말미에 C가 말하는 "History"라는 한 마디 대사라 생각합니다. C의 육신이 죽고 그곳에서 태어난 존재의 이름을 배역의 입을 빌어 직접 들려준 대목이라고 봤기 때문이죠. 끝나기 직전 은근슬쩍 흘려둔, 관객을 위한 감독 나름의 힌트랄까요.

 

영화의 제목은 <고스트 스토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고스트와 그의 감정에 집중하게 될 테지만, 영화의 본질은 스토리에 담겨 있습니다. 고스트가 고스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작동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지만, 스토리가 아니었다면 성립조차 할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죠.

 

 

 

 

 

 

# 7.

 

그렇다고 잊히는 것들의 허무함에 허우적대다 끝나면 곤란합니다. 그건 (영화 스스로가 말하다시피) 과학적 진단에 불과하니까요. 중요한 건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와 관련된 메시지겠죠. 영화의 메시지를 알기 위해선 다른 무엇보다 고스트의 마지막을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겁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가 새드엔딩이라는 건 영화라는 예술을 만드는 감독에게 자기부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역시나 전개의 발전 방향과, 사라진 C의 껍질 위로 떨어지는 빛의 산란, 음악의 뉘앙스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암시합니다.

 

고스트는 M이 남긴 쪽지를 꺼내 읽습니다. 쪽지의 내용은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말인즉, 쪽지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겠죠. 오프닝 소파 위 대화에서 슬쩍 밝힌 M의 이야기. '어쩔 수 없이 떠나가야 했던 M이 남겨둔, 기억하고 싶었던 것들과 좋아했던 것들의 흔적'이 쪽지라는 것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C가 사라지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것은, 쪽지의 존재가 C로 하여금 사라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죠.

 

 

 

 

 

 

# 8.

 

 

우리는 왜 어차피 사라질 텐데도 불구하고

음악을 하고 영화를 하고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History 를 만들어 가는가.

 

 

92분에 걸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어차피 피하지 못할 멸망이라면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순간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렇게 쌓아온 역사라는 것이 이렇게나 눈부시지 않나' 라는 것입니다. 가녀린 손가락으로 벽을 파고 억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거슬러 내려온 고스트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본인이 살아 있던 시절 최선을 다해 누렸던,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 절절히 알고 있는 그때 그 순간의 M과의 사랑이었듯 말이죠. 영화의 시작을 소파와 침대에 누은 최대한 애틋하게 그려진 두 사람의 모습으로 장식한 건, 어쩌면 감독이 '여기 이 영화의 대답이 있다'고 미리 알려준 건지도 모르겠네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명언을 체험적으로 늘려둔 영화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문득 되게 처연하고 침울한 귀신 영화에서 얻어가는 교훈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라는 게 아이러니하네요. 역시 이런 영화들에겐 이런 영화에서만 얻을 수 있는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 <고스트 스토리>였습니다.

 

# +9. 연출 특히, 공간 연출과 촬영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멋진 그림이 가득한 영화인데 주제 얘기를 신나서 하다 보니 짬이 없었네요.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깊으신 분들이 많으니 영화에 얽힌 감독의 연출과 관련된 분석들도 한번 찾아보실 것을 권하겠습니다. :)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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