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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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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omance

봄날의 수채화 _ 더 테이블, 김종관 감독

그냥_ 2019. 4. 24.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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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섬세한 이야기꾼의 습작입니다. 날씨 좋은 날의 한가한 오후. 소소한 약속이 있어 찾은 카페. 작은 눈과 덥수룩한 머리의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 작가. 한가로이 사람들을 구경하며 무심하게 눈앞에 놓인 테이블과 음료 두어 잔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를 낡은 재킷 주머니에 걸어둔 만년필을 꺼내 냅킨에 쓱쓱 써 내려간듯한 영화입니다.

 

 

 

 

 

 

 

 

'김종관' 감독,

『더 테이블 :: The Table』 입니다.

 

 

 

 

 

# 1.

 

유명 배우 '유진'과 전 남자 친구 '창석'의 대화는

다른 입장으로 인한 거리감을 다룹니다.

 

창석은 셀러브리티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진은 평범한 직장인의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수차례 건네는 '변했다'란 말은 '이해할 수 없다'의 완곡한 표현이죠. 둘은 다른 이유에서 서로를 만나 각자 원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나누려 하지만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군요.

 

창석에게 유진은 차가운 맥주로 기억되나 봅니다. 갈증을 씻겨줬던 사람. 목마름만 가시면 그뿐인 사람. 거칠게 넘기고 나면 잊혀도 좋은 사람. 반면 유진에게 창석은 에스프레소 같은 사람입니다. 작고 쓴 사람. 스타가 되기 이전의 나를 기억할 몇 안 되는 사람. 그래서 이런 찌질이인 줄 알면서도 구태여 얼굴을 보러 나왔던 사람. 마시는 동안엔 분명 얼굴을 찡그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생각날 사람. 상징적이죠.

 

아쉬운 건 창석이 유진에게 너무 무례하게 군다는 점입니다. 밸런스가 무너져 있달까요. 때문에 첫 에피소드를 보는 동안은 인물 간의 관계와 입장에 따른 내면보다 무례한 찐따만 기억에 남고 말았네요.

 

 

 

 

 

 

# 2.

 

'경진'과 '민호'는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속도로 걷는 사람들의 온도차를 이야기합니다.

 

앞선 에피소드에 비해 직관적인 관계 설정 덕에 몰입하기 편안합니다. 똑같은 두 잔의 커피를 함께 나눠마시고 똑같은 초콜릿 무스케이크를 나눠 먹는 둘은, 서로에 대한 호감이라는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라는 게 진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인 거겠죠. 같은 걸음을 걷기 위해선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합니다. 누군가는 본래의 걸음보다 조금 더 빨리, 누군가는 자신의 걸음보다 조금 더 천천히 걸어야 하죠. 위태롭게 끝나버릴 것만 같던 두 사람의 사랑은 앞서 달려 나갔던 민호가 용기 내 뒤돌아보며 완성됩니다. 알리오 올리오라니. 오래전 풋풋하던 시절의 사랑이 떠오를 만큼 달콤합니다. 연애해봤냐구요?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배우 정은채는 대단한 분위기를 표현합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서운함, 먼저 고백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미움, 무심한 남자의 얄미움과, 그럼에도 이 남자가 싫지 않은 자신의 미련함. 이 모든 걸 사랑스러움으로 묘사합니다. 4명의 훌륭한 여배우들 사이에서도 가장 주목할만하죠.

 

 

 

 

 

 

# 3.

 

'은희'와 '숙자'의 대화는 

진심의 밀도가 다른 두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결혼 사기꾼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업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입니다. 소위 '작업의 대상'이었던 가게 사장은 두 여인 모두에게 거짓의 대상이었기에, 은희가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은 약혼남은 여전히 숙자에겐 사냥감일 뿐이었죠. 은희는 숙자에게 진실을 거짓말할 것을 요구하지만, 숙자는 은희의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은희 역시 숙자의 연기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거짓인지 알지 못하죠.

 

은희가 진짜 결혼을 하려 함을 알고 난 후 두 여인은 서로에게 자신의 진심을 최대한 전하려 하지만, 대화의 마지막까지 서로는 상대의 진심을 오롯이 느끼지 못합니다. 거짓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이 테이블 앞에서 최대한의 진심을 이야기하지만 그 끝이 거짓 연기로 귀결된다는 게 역설적이고 비극적이죠. 둘 앞에 놓인 라떼에 한 명은 설탕을 넣고 다른 한 명은 넣지 않는다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끝내 둘은 비슷할지언정 같은 음료를 마시지는 못하는군요.

 

그럼에도 희망적인 건 두 여인 모두 서로에게 진심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숙자는 은희의 진심 어린 결혼을 축복하고 있고, 은희는 숙자의 진심 어린 축하에 고마워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하네요. 아무리 단맛이 달라도 라떼는 라뗍니다.

 

 

 

 

 

 

# 4.

 

'혜경'과 '운철'은 같은 상황, 같은 진심, 같은 속도로 걸어가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임수정이 담배를 피웁니다. 반칙이죠. 감독님들은 기억하세요. 그 미모, 분위기, 눈빛은 반칙이에요. 이후의 이야기 따위 알게 뭐랍니까.

 

결혼을 앞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남녀의 내적 갈등과, 결국 그 갈등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현실이 섬세하고 위태롭게 이어집니다. 상대에게 건네는 유혹의 말들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 들리는군요. 도발적인 말을 건네는 서로는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걸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운철'이 마셨던 식어버린 커피와, '혜경'이 남긴 홍차는 다른 음료이지만 같은 미련입니다.

 

 

 

 

 

 

# 5.

 

네 쌍의 사람들이 만드는 '다름'과 '거리'의 변주가 흥미롭습니다. 각 옴니버스 에피소드들은 '입장의 다름', '속도의 다름', '밀도의 다름', '시간의 다름'이라는 각기 다른 위상의 차이가 만드는 거리감과 긴장감을 다룹니다. 다소 추상적일 수도 있는 관계들을 구체적이고 범용한 이야기들로 풀어내는 게 매력적입니다. 흔한 회상씬 하나 없이 대화만으로 풍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솜씨가 훌륭합니다. 테이블에 앉은 인물들을 관찰하면서도 이 인물들에 대한 진지함과 애정을 잃지 않는 작가의 진심이 전해집니다. 8명의 인물들 앞에 놓인 각기 다른 음료와 디저트는 감독의 위로입니다.

 

테이블 가운데 놓인 꽃과 음료의 구성에서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깊은 은유라고 하긴 힘들겠지만 관계를 시각화하는 문학적인 묘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의 위태로운 감수성이 떠오를 법한 색감과 구도가 화면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눈부신 마스크를 가진 8명의 배우 모두 이야기의 성격과 분위기를 정확히 캐치해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연기를 선사합니다. 좋네요. 이런 영화가 땡기는 게 봄이 오긴 왔나 봅니다. '김종관' 감독, <더 테이블> 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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