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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마른 인간 연구소 _ 우주인, 조한 렌크 감독

그냥_ 2024. 3.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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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조한 렌크 감독,

『우주인 :: Spaceman』입니다.

 

 

 

 

 

# 1.

 

징그러운 거대 거미와 징그러운 아담 샌들러가 포옹하는 우주 영화입니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의 소설 <보헤미아 우주인>을 원작으로 합니다. 조한 렌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아담 샌들러가 주연으로 열연합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작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많은 양산형 로코물 탓에 비아냥을 많이도 샀던 아담인데요. 넷플릭스와의 계약은 확실히 분기점이 된 듯합니다. 노아 바움백의 <마이어로위츠 이야기>와 샤프디 형제의 <언컷 젬스>에 이어 2022년 공개된 <허슬>까지 필모그래피가 만개하고 있는데요. 정극 연기하는 아담 샌들러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건 격세지감이라 할 법하죠. 다만, 앞서의 작품들과 이번 <우주인>은 결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익숙한 불안과 폭발보다는 오히려 처연하고 신중하게, 조용한 우울을 표현하는 데 집중합니다. 우주괴물 하누시를 연기한 폴 다노 특유의 부드럽고 소심하고 찌질한 목소리의 기여도 인상적입니다. 기능적인 역할이라 운신의 폭은 좁지만 그럼에도 캐리 멀리건 역시 최선의 연기를 선보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남편으로서의 역할, 우주비행사로서의 소명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남자가 자기 삶의 모순을 직시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야쿠프는 가혹한 유년기 트라우마의 연장으로서 불안하고 집착적인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그는 긴 사색의 우주 비행을 통해 일종의 심리 치료를 시도합니다.

 

따라서 전형적인 우주 SF를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목성 인근에서 딜레이 없이 통화되는 상황을 체코커넥트라는 게 있어 대충 연결된다 우기고 넘어간다거나, 굳이 공간 널널한 우주선에 한 명만 달랑 실어 보내는 등의 설정은 SF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만든 사람도 관심이 없는 SF적 완성도에 집착하는 것은 경제적인 반응이라 하기 힘들겠죠. 우주 비행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인생을 은유하고, 그 과정을 통해 발견되는 것들 역시 내면의 성찰을 은유한다는 면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애드 아스트라>나 데미안 샤젤의 <퍼스트맨> 같은 작품들과 함께 범주화하는 것이 차라리 자연스럽습니다.

 

 

 

 

 

 

# 2.

 

임무 189일째. 우울한 우주항해사 야쿠프 프로하스카(아담 샌들러 분)는 초프라 구름이라는 우주적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목성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누구와도 교감할 수 없이 그저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인 야쿠프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한계에 봉착하다, 임신한 아내 렌카(캐리 멀리건 분)와의 연락 두절과 이별 통보에 크게 흔들립니다.

 

야쿠프는 한마디로 외로운 인간입니다. 당의 정보원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원망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삐쩍 마른 몸매, 그늘진 얼굴의 피로감. 그 모든 정신적 이상을 통할하는 것은 끊이지 않는 소음과 수면제입니다. 제자리를 걷는 러닝머신은 목적 없이 반복되는 야쿠프의 삶을 은유합니다. 매일 달려야 하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뼈가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걷고 또 걷는 인물인 것이죠. 감독은 우주선 안의 야쿠프 주변을 천천히 도는 카메라로 담아 상하좌우 감각을 붕괴시킵니다. 방향도 중력도 없이 부유하는 듯 공허함으로 포위된 인격은 카메라 구도를 통해서도 은유됩니다. 그때그때 광고 슬로건을 반복해야 하는 것 역시 무기력하고 수동적이고 연기적인 삶을 은유합니다.

 

 

 

 

 

 

# 3.

 

어느 날 말하는 거대 원시 거미 하누시가 우주선에 나타납니다. 야쿠프는 현실인지, 피곤과 절망이 만든 상상의 산물인지 혼란스러워하고, 관객 역시 마찬가지의 혼란에 빠집니다.

 

하누시에게는 야쿠프의 정신에 접속하는 능력이 있는데요. 그를 관념적이고 착란적인 존재로 해석될 주요한 근거가 됩니다. 얼굴 속에서 나타난 첫 등장은 생각 속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손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작았던 크기가 부풀어 오른다는 것은 렌카와의 이별 후 급격히 비대해진 고독감을 은유한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하누시를 본 야쿠프는 당황하며 노란 살균 가스를 살포하는데요. 그 위로 노란 꽃 위에 선 아내를 떠올리죠. 이는 행복한 기억으로 고독감을 죽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지만 망상의 연기가 사라지고 나면 고독감은 멀쩡히 되살아납니다. "당신의 외로움이 궁금해졌어요." 거대거미에 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야쿠프의 외로움과 연결하는 대사라는 면에서 사실상 같은 개념이라 소개하는 대사처럼 들리기도 하죠. 다만, 자신이 살았던 원래 행성에 대한 이야기나 초프라 구름에 대한 설명 따위는 야쿠프와 별개로 실존하는 우주인으로 이해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하누시가 실제인지 아닌지는 영화 끝까지 알 수도 없고, 무엇보다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영화는 오롯이 야쿠프의 이야기니까요. 실제와 무관하게 하누시는 야쿠프의 내면에 누적된 외로움의 구체화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체보다 흥미로운 것은 디자인입니다. 앙상한 몸은 피로감을 은유합니다. 수많은 팔과 손은 집착을 은유합니다. 수많은 눈은 트라우마와 잡념을 은유합니다. 징그러운 외형은, 버려지고 남겨지는 것에 대한 야쿠프 본인의 두려움을 은유합니다. 하누시는 야쿠프를 이름이 아닌 '마른 인간(Skinny Human)이라 부르는 데요. 이 역시 앙상한 피로감과 헐벗은 고독감을 동시에 직시하게 합니다.

 

 

 

 

 

 

# 4.

 

아내 렌카는 기능적인 캐릭터로 이해됩니다. 야쿠프의 관계를 모조리 끌어안고 있다 외로움을 폭발시키는 트리거랄까요. 아내라는 입장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지구에서의 생활은 현실이라는 개념을, 임신이라는 상태는 아버지 관계라는 개념을, 무수한 회상 장면은 삶이라는 개념을 모조리 대리합니다. 우주 한복판에 야쿠프와 하누시만 남겨두기 위해 다른 모든 관계를 압착시켜 둔 것이 바로 렌카라는 것이죠. 개인적으론 부부관계에 대한 영화라거나, 아내에게 반성문을 쓰는 영화라는 평은 다소 느슨하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아내에게 쓰는 반성문이 목적이었다면 마지막 앤딩을 통해 너그러이 용서하는 아내를 연출해야 하지만, 오히려 가장 간절한 관계는 하누시, 자기 자신의 외로움에 닿아 있기 때문이죠.

 

설명드렸듯 우주선은 곧 한 인간의 인격을 은유합니다. 우주선 안에 혼자 있다는 것은, 인간이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가와 별개로 홀로 살아가는 외로운 존재라 정의합니다. 특히 아내의 집 역시 하나의 우주선처럼 묘사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영화의 제목 <우주인>은 주인공 야쿠프이자 거미 하누시이며 결국 각자의 우주선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과 대화하는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하누시는 초프라 구름을 '위대한 발견'이라 부르죠. 이전까지의 허무한 삶을 종료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위대한 발견임과 동시에, 이전의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인생의 끝을 역설적으로 비트는 명명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문을 닫고 벽을 치며 외로움을 통제하지만, 외로움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조차 두려운 인간의 절대적인 외로움은 작품의 주제의식입니다. 이는 하누시를 대하는 방식이기 이전에 아내와 아버지와 피터와 그 외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야쿠프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밀어내고 자신을 고립시켜 외로움에 적응하는 것으로 외로움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순. 결말의 반성은 이런 자기모순에 대한 자신에게 쓰는 반성문입니다.

 

 

 

 

 

 

# 5.

 

감상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자면 다소 답답하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우주선 안에 갇혀 있습니다. 야쿠프의 기억을 조사할 때가 제한된 내부를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인데, 그 회상 장면조차 거미의 눈을 빌리기라도 한 듯 비스듬하게 반사적으로 구성되어 제한적으로 묘사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내성적이고 절망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결론이라는 것 역시 거대하고 웅장한 성장이나 도약이라기보다는 담담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면에서 사색적인 작품이라는 것은 감안하시는 것이 좋겠죠.

 

야쿠프의 심연에 다가감에 따른 감정적, 철학적 변화에 대한 고찰은 크게 빈곤합니다. 대부분 샌들러의 고통스러운 연기와 하누시의 눈을 빌린 회상장면에 기대는 터라 상당히 버겁고, 이는 작품을 지루하고 얕아 보이게 만드는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야쿠프의 자아와 동기화되는 데 실패한 관객은 결국 마지막을 '내면의 반성'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로 인지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그 결과 부부싸움이니 반성문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죠. 주제의식을 힘껏 끌어안았어야 할 초프라 구름의 이미지는 시각적 효과만 과장될 뿐 별다른 감동은 없습니다. <애드 아스트라>에서 삶의 무게를 어마어마한 물리량으로 은유하던 머리 위 해왕성과 비교하면 크게 초라하죠.

 

아참, 개뜬금 한국이 경쟁상대로 나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뭐, 큰 의미는 없어 보이구요. 고요의 바다나 승리호 같은 우주 영화를 염가에 찍어 쏠쏠하게 팔아준 데 대한 넷플릭스의 가벼운 치하이자, 우리 관객들을 향한 귀여운 프러포즈가 아닐까 싶네요. 조한 렌크 감독, <우주인>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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