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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Action

탁일항과 연예상 _ 백발마녀전, 우인태 감독

그냥_ 2021. 2. 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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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차고 넘칠 정도로 매력이 검증된 세계관. 다채로우면서도 위계가 명확한 캐릭터 구조. 눈과 귀를 쉴 새 없이 즐겁게 하는 풍부한 볼거리. 칼과 채찍과 봉과 주먹 등 다양한 수단으로 합을 주고받는 화려하고 직관적인 액션. 사이사이를 메우는 특유의 왁자지껄한 유머들과, 질척거림 없이 1시간 30분 만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스피디한 전개까지. 이 정도만 잘 갖춰도 액션 오락 영화로서 훌륭하다 하기에 충분하죠.

 

 

 

 

 

 

 

 

'우인태' 감독,

『백발마녀전 :: 白髮魔女傳』입니다.

 

 

 

 

 

# 1.

 

그 위로 다른 어떤 장르로도 대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7~80년대 홍콩 영화 고유의 분위기가 더해집니다. 거대한 집단 간의 충돌 앞에 놓인 나약한 개인의 비극, 뜻하지 않은 오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무너져 내리는 처절하고 아련한 정서가 더해집니다. 중화권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독특한 미장센이 영화의 퀄리티를 한 단계 끌어올립니다. 흘러가버린 삼십 년의 시간이, 원래 영화가 가지고 있진 못했던 오래전 잊고 지냈던 것들에 대한 낭만까지 더해준다면 작품의 가치는 또다시 한 단계 끌어올려질 수 있겠죠.

 

<백발마녀전>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한다면, 아무래도 고전적 성역할 관계의 역전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대체로 정의로운 편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안전하게 성장한 공주님과, 거친 야생의 들판에서 투쟁적으로 살아온 전사 간의 사랑이 플롯을 활용하는 클래식한 접근입니다만 영화의 시나리오는 그와 정반대 되는 선택을 합니다.

 

 

 

 

 

# 2.

 

남자 주인공인 '탁일항'이 되려 무당파 차기 당주로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 사랑 하에 성장하고 여자 주인공 '연예상'이 늑대 무리와 함께 자랐다는 의미의 '랑녀'라는 별칭 하에 거칠게 성장하죠. 성장 과정에서의 고충 역시 '탁일항' 쪽이 관계 중심의 '질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해, '연예상'은 '고독감'과 '존재 의의'라는 자기중심적인 역할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사랑을 얻기 위해 극복하는 난관 또한 '탁일항'은 그저 떠나가면 그만이지만 '연예상'은 피를 토하는 고충을 겪어야 했죠. 원작 소설이 쓰였던 당시의 시대상까지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색적이고 매력적인 변주라 할법합니다.

 

다만, 관습적이지 않다는 것은 역으로 직관적인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 부족한 설득력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페널티를 지고 있음을 뜻하죠. 그 외에 나름의 시대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금 다시 보기엔 다소 어색한 전개의 리듬, 덜 잘려나간 것만 같은 편집점들, 낡은 연출, 불필요하게 노골적인 묘사 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일련의 단점 혹은 보완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방법은 무려!

 

 

 

 

 

 

# 3.

 

적당히 두 주연배우에게 알아서 해결하게끔 맡겨 둔다.

 

라는 건데요. 그게 됩니다. 어이가 없죠. 장국영과 임청하는 반칙입니다. 그 어느 여배우보다 깊이 있는 서정성의 장국영과, 그 어느 남배우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임청하는, 영화의 몇몇 사소한 단점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관객의 눈높이 따위 등을 가볍게 극복합니다.

 

장국영은 혼자만의 힘으로 무협물로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어버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합니다. 심지어 줄리엣 역인데 말이죠. 만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무시무시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눈물 그렁그렁할 것만 같은 서정적 주인공이라는 걸 손발 오그라드는 위화감 없이 설득합니다. 역시나 그는 유명세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배우였죠.

 

 

 

 

 

 

# 4.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만큼은

백발마녀 '임청하'의 영화입니다. 

 

아예 남탕을 만들지 않는 한 무협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어떤 장르보다 히로인이 중요합니다. 감독의 시나리오 해석 여부와 무관하게 장르 자체가 필연적으로 마초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별다른 노력 없이 서사의 진행만으로도 탄력을 쭉쭉 받는 남자 주인공에 비해, 여자 주인공은 이야기의 조력 없이 스스로 존재감을 확보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주인공 간의 균형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 중요한 멜로물, 상대는 장국영이죠.

 

사랑을 처음 느낄 때의 표정과, 이름을 얻을 때의 설렘과, 마교를 등질 때의 단호함과, 자신에게 이름을 준 사랑의 배신을 겪고 절규하며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가는 순간과, 그 전후의 표정 변화 모두 어마어마합니다.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캐릭터 고유의 순수성을 놓치지도 않구요. 심지어 와중에 액션도 소화합니다. 본인은 이 작품과 <동방불패> 등을 들어 중성적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적당히 잘하지 그러셨어요

 

 

 

 

 

 

# 5.

 

배우 얘기를 많이 하긴 했습니다만 디테일한 고증에 치중하곤 하는 무협물 치고는 메타포가 제법 풍부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도입 탁일항이 쓰다듬던 벌레를 삼키는 대목이나, 새끼 양을 구하던 탁일항을 이리 떼를 이끄는 랑녀가 구하는 대구. 사저 하록화가 건네준 옥에 담긴 캐릭터성이라거나, 등을 맞대고 하나처럼 붙어있는 희무쌍의 나비와 같은 공격적인 디자인과 의미심장한 대사들. 두 주인공을 각각 연모하는 두 조연의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한 멘탈리티 등은 모두 영화의 볼륨을 풍성하게 하는 흥미로운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구태여 그 의미를 글로 정리해 두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딱히 어려운 것들도 아니거니와 홍콩 영화 특히나 <동방불패>나 <황비홍> 등으로 대표되는 무협물들은 사실 분석하듯 보는 영화들이 아니니까요. 작품성을 탐미하고 싶다면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 누아르나, <아비정전>, <중경삼림>을 지나 <화양연화>로 정점을 찍게 되는 '왕가위' 감독의 멜로드라마 쪽을 즐기는 편이 훨씬 좋죠. 

 

 

 

 

 

 

# 6.

 

오랜만에 왓챠를 통해 이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이 작품도 그러하듯 OTT에 서비스되고 있는 옛날 영화들은 대체로 화질구지인 경우가 많은데요. 뻔뻔하다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오래된 영화들의 경우 서비스되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면서도 그럼에도 조금 더 좋은 화질이 아쉬운 마음이 함께 들기도 합니다. 그치만 때론 화질이 좋지 않아서 더 좋은 영화라는 것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됩니다. 그 시절 비디오 대여점과 VHS 플레이어만 있었더라면. 연이어 <동방불패>를 빌려보고 싶은 밤이군요. '우인태' 감독, <백발마녀전>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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