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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omance

3분 20초 _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감독

그냥_ 2019. 9. 2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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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1970~80년대 모타운 음악들을 좋아합니다. 스티비 원더나 템테이션스, 인챈트먼트, 잭슨 5, 마빈 게이, 슈프림즈 같은 이름들이죠. 리뷰를 쓰는 지금은 'Superstition'으로 유명한 '스티비 원더'의 『Talking Book』 앨범 수록곡 'Lookin' for another pure love'이 흘러나오고 있네요. 서른 줄이 넘어가다 보니 새로운 노래들을 찾는 게 점점 힘에 부친 달까요. 안전하고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특정 브랜드에 익숙해져 갑니다. 얼마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녔던 것 같은데요. 갑자기 서글프네요.

 

물론 이건 제가 이상한 거구요. 보통 저의 세대에겐 버즈와 SG워너비로 대변되는 소몰이 창법 때의 음악이 향수를 불러 일으킵니다. 저보다 살짝 윗 세대분들은 야다나 얀 같은 락발라드와 HOT, 젝스키스 등의 1세대 아이돌에서 향수를 찾고, 저보다 대여섯 살 어리신 분들은 대체로 빅뱅과 같은 개성 강한 아티스트 아이돌에게서 이 정서를 느끼시더군요.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황금시대'가 있죠. 그 순간을 그리며 다들 그렇게 푸념합니다. 그때가 좋았다고. 지금은 즐길만한 문화가 없다고. 너무 소비적이고 즉흥적이라 지루해 죽겠다고. 글쎄요. 만약 지금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혹시 이 영화는 어떠신가요?

 

 

 

 

 

 

 

 

'우디 앨런' 감독,

『미드나잇 인 파리 :: Midnight in Paris』 입니다.

 

 

 

 

 

# 1.

 

어려운 영화는 아닙니다. 1890년대 '벨 에보크'에서 '아드리아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길'의 입을 빌어 대놓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 해주고 있으니까요. 결국 이 영화는 '현재의 지루함을 버티지 못하고 도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물질적이고 산술적인 신자유주의의 반작용으로서 낭만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말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짧게 말하면 '이동진' 평론가의 "비관주의자의 낭만주의"라 할 수 있겠죠.

 

감독에서부터 192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 예술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동경이 엿보이는데요. 아마도 우디 앨런에게 이 영화는 너무도 행복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희망을 꺼트리는 가슴 아픈 작업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눈부시게 낭만을 묘사한 이유라는 것이 되려 결국 지나간 시대의 낭만이란 결코 손에 쥘 수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는 측면에서 잔인한 면도 없지 않아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네요.

 

시대로 대변되는 사유의 양식을 구체적인 세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입꼬리를 가진 '레이첼 맥아담스'를 현실에서의 약혼녀로, 세상에서 가장 고혹적인 눈빛을 가진 '마리앙 코띠아르'를 1920년대의 이상적 페르소나로,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아우라를 가진 여배우 '레아 세두'를 주제의식을 투영하는 새로운 연인으로 삼다니. 거 참 부럽네요. 젠장.

 

 

 

 

 

 

# 2.

 

... 아, 이게 아니죠.

 

'레이첼 맥아담스'가 분한 '이네즈'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적 인물입니다. 그녀의 가치관은 주인공 '길'과 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이 되는 건 아니죠. 이 배역에 표독스럽고 이기적인 캐릭터를 부여한 후 그에 적합한 배우를 얼마든지 섭외할 수 있었겠지만 감독은 그러지 않습니다. '길'과 '이네즈'는 다른 사람이지 틀린 사람이어서는 안 되거든요. 그랬다가는 자칫 과거에 대한 동경을 당연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진행을 위해 '길'의 등을 떠밀려다 보니 '이네즈'의 캐릭터성이 살짝 붕괴된 감이 없잖아 있긴 합니다만, 배우의 매력이 상당부분 희석시켜준 점은 다행입니다. '레이첼 맥아담스'를 이 배역에 캐스팅한 것은 이상적이라 할 수 있겠네요.

 

'마리앙 코띠아르'가 분한 '아드리아나'는 '길'이 가진 1920년대에 대한 향수를 구체화한 인물입니다. 꿈꿔오던 삶을 완성시켜줄 완벽한 퍼즐이죠. 하지만 완벽한 그녀는 '벨 에보크' 시대를 동경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결핍된 완벽함'이라는 형용모순이 발생하죠. '길'은 '아드리아나'의 존재를 통해 자신이 꿈꿔오는 낭만주의에 대한 집착이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드리아나'가 사랑스러울수록 완벽한 페르소나가 되어갈수록, 그녀의 존재는 사막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흐릿해집니다.

 

그리고 '길'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사람은 지금 시대에서 함께 과거의 매력을 공유하는 레코드 가게 아가씨, '가브리엘'입니다. 사실 그녀와 걷는 비 오는 파리는 여전히 '길'의 '황금시대'가 아닙니다.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정서를 공유할 사람을 만났을 뿐이죠. 욕망로부터 해방되었다거나 욕망을 채워줄 운명의 사랑을 만난 것이 아니라, 욕망을 해소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체념한 상태로 그걸 함께 위로할 사람을 만났을 뿐입니다.

 

 

 

 

 

 

# 3.

 

영화의 핵심은 거창한 주제의식이나 화려한 배우들, 유수의 예술가들이 아닙니다.

바로 3분 20초짜리 오프닝 시퀀스죠.

 

표면적으론 미드나잇의 파리를 원없이 보여주겠다 라고 합니다만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너무 긴 시간을 파리의 전경에 할애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합니다. 자, 질문을 하나 해보죠. 혹시 오프닝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이 드시던가요. 파리가 멋지다? 가보고 싶다? 저런 곳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낭만적이다?

 

네. 그 정서가 바로 1920년대를 대하는 '길'의 마음입니다. 영화는 과거의 파리를 동경하는 것에 대한 허망함을 이야기하면서 은근슬쩍 화면 너머 '예술의 도시 파리를 동경하는 관객의 마음' 역시 허망하다 지적합니다. 인트로의 시퀀스를 보는 동안의 관객은, '길'로 치자면 종소리 울리는 열두 시의 파리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은 셈이죠.

 

파리의 전경을 담은 긴 오프닝이 끝나기 무섭게 감독은 『Midnight in Paris』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여줍니다. 그리곤 '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능청스럽게 앤딩 크레딧을 띄우죠. 네, 영화를 마무리 짓는 방식입니다. 감독은 도입부 3분 20초가 영화의 모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3분 20초 동안의 파리의 전경. 화려함. 낭만. 싱그러움. 비 오는 파리와 총총걸음의 사람들. 개선문. 해가 저물어가는 동안의 그림자. 형용할 수 없는 동경. 붙잡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실망감. 허무함. 그리고 그 위를 매만지는 '시드니 베세'의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곡 "Si Tu Vois Ma Mère"까지. 이 모든 걸 보고 듣고 느낀 감정들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 말합니다. 영화가 그리는 파리에 한껏 젖어 관람을 하고 난 후, 스크린의 막이 내리고 현실로 돌아온 관객의 허망함이 진짜 주제라 말합니다. 오프닝 이후에 이어지는 '길'의 환상적인 시간 여행도, '레이첼'의 미소도, '마리앙'의 눈빛도, '레아'와의 산책도 모조리 부차적인 쿠키 영상에 불과합니다.

 

 

 

 

 

 

# 4.

 

따라서 쿠키 영상 따위에 주눅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살바도르 달리'니, '파블로 피카소'니, '어니스트 헤밍웨이'니, '스콧 & 젤다 피츠제럴드'니 하는 유명인사들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이런 거 잘 모르는데 괜찮나? 네. 모르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길'의 환상을 구체화하기 위한 도구들일 뿐이니까요. 이들은 영화의 지루함을 완화하기 위해 관객의 지적 유희를 북돋우는 불쏘시개이자, '길'이 철학적 성장을 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다 줄 맥거핀에 불과합니다.

 

유명 인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유의미한 이야기를 하는 과거의 인물이 딱 한 명 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말미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폴 고갱'의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향수가 바로 그것이죠. 영혼과 죽음에 대해 설파하는 상남자 '헤밍웨이'의 연설이나 '거트루드 스타인'의 형이상학적인 비평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라면 '고갱'의 심드렁한 푸념 한마디만 못합니다.

 

전 이 지점이 특히 흥미로운데요. 이 대사는 굳이 '아드리아나'와 함께 거슬러 올라간 1890년대 '고갱'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죠. 1920년대의 인물들이 직접 '나는 그 이전의 어느 시대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감독은 구태여 1920년대에서 몇십 년 더 거슬러 올라간 1890년대라는 시간을 새로 만들고 그 속에서 다시금 르네상스를 이야기하게 합니다. 환상 속 1920년대의 허망함 속에서 '길'이 '단 하나도' 얻어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강박적 속내가 엿보인 달까요.

 

 

 

 

 

 

# 5.

 

서 일련의 배경지식이 의미가 없다, 주눅 들지 마시라 말씀드렸습니다만 당연하게도 배경지식이 풍부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 시절 예술가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하시다면 분명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즐기시는 데 큰 도움이 되기는 할 겁니다. '헤밍웨이'의 마초성이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내적 갈등과 '젤다 세이어'의 불안. '파블로 피카소'의 여성 편력과 시니컬함이나, 괴짜 '살바도르 달리'의 코뿔소. 혹은 '코코 샤넬'이라는 익숙한 이름과 '콜 포터'의 'Let's Do It'에 대한 지식의 유무는 영화를 보고 난 후 평가를 달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죠. 하지만, 이런 것들에 매몰되어 공부하듯 영화를 대하실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배경지식의 판별 따위에 영화의 주제의식을 희석시키는 건 미련한 짓이죠.

 

아름다운 여배우를 셋이나 동원해 놓고 '마냥 희망적이고 낭만적인 이데아란 없다'는 세상 잔인한 이야기를 하질 않나. 3분짜리 본편에 90분짜리 쿠키 영상을 붙인 채 모른 척 능청을 떨질 않나. '아드리아나'와 함께한 환상적인 파리를 영화 내내 보여줘 놓고선 결국 레코드를 팔던 '가브리엘'과의 비 오는 다리를 설득해 내질 않나. 파리에 가보고 싶다 생각하는 관객들마저 현타에 빠트리지를 않나. 언제나의 우디 앨런 답게 아름답고 재수없는 영화입니다. '우디 앨런' 감독, <미드나잇 인 파리>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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